- 103위 성인전 1, 聖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완결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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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372 신성구 [xhak59] 2004-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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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에 이어..
이들은 곧 방갓과 상제옷으로 몸을 가린 후 어두운 밤을 틈타 상륙하게 되었으니 1845년 10월 12일이었고,
나바위에서 하룻밤을 지낸 김대건 신부는 다음날 서둘러 떠났다. 김대건 신부는 용기 백배해서 적극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언어와 활동에 제약이 없는 방인 성직자로 전국의 교인들을 찾아 다니며 영신을 위로하고
전교에 힘쓰며 성무에 충실했다. 다시없이 유능하고 신뢰할 만한 방인 성직자였기에 페레올 주교는 25세의
청년 사제 김대건 신부를 조선교구 감목으로 선임했다. 김대건 신부는 먼저 고 주교가 안전하게 있을곳을
마련해 서울로 오게 하고 자신은 고향으로 내려가 교우들을 돌보고 꿈에도 잊을수없던 어머니를 찾았다.
10년 동안 외국을 다니다가 신부가되어 돌아온 아들을 대하는 어머니 고 우르술라는 가슴이 메어지느듯한
벅찬 감격으로 말을잇지 못했다. 어머니를 위한 미사를 드리면서 순교하신 아버지를 기억하는 김대건 신부는
자신의 목숨도 이미 천주께 바친 몸이며 한 어버이의 아들이기 전에 모든 교우의 아버지가 된 책임을 크게
느꼈다. 한편 청나라에서는 아직 입국할 기회를 잡지 못하고 대기하고 있는 메스트로 신부와 최양업 부제가
본국에서 오는 연락을 초조하게 고대하고 있었다. 고 주교의 밀명을 받은 김대건 신부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마포 나루를 떠났다. 1846년 4월, 교우 임성룡의 배를 타고 연평도 앞바다를 지나 등산곶에 이르렀다.
마침내 백령도 부근에서 그물을 치고 조기잡이하는 중국어선의 그들이 믿을 만한 사람임을 확인하고 준비해간
편지와 지도를 북경교구에 전해줄것을 부탁하고 매우 기뻐하면서 배를 돌려 돌아가자고 했다. 그런데 천만
뜻밖에 등산곶 일대를 감시하는 군교들이 중국어선을 몰아내기 위해 배를 빌려 달라고 쫓아 왔다.
당시의 국법으로 양반 소유물을 정부에서 징발할 수 없게 되어 있었으므로 김대건 신부는 자기 배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거절했다. 여기서 시비가 벌어져 김대건 신부는 폭행을 당하고 옹진 감옥으로 연행돼 갔다.
1846년 음력 5월 12일 밤의 일이었다. 최양업 부제와 메스트로 신부 영입을 위해 연평도 조기잡이 배에
접근해 편지와 지도를 전하고 기뻐하던 김대건 신부는 체포됐다. 순위도의 부산진으로 연행된 김대건 신부는
옹진, 해주 감옥을 거쳐 마침내 서울로 압송되었다. 엄중한 문초와 혹독한 고문을 가하는 취조 과정에서 일찍이
천주교를 위해 해외로 파견된 샌학생 이었음이 밝혀졌다. 한편 김대건 신부가 갖춘 깊은 학식과 해박한
세계 지식은 박해자들을 놀라게 했다. 김대건 신부는 옥중에서 박해자들의 요청으로 예쁘게 채색한 영어로된
두 장의 세계 지도를 그려 올렸다. 6년간의 마카오 유학과 4년여의 중국 만주 대륙에서의 활동을 통해얻은
학식과 견문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는 서양 학문을 직접 수학하고 체득한 지식인답게 세계 조류에 대해 폭 넓은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세계 정세에 비추어 볼때 한국의 문호를 개방하고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
민족과 국가 발전에 유익한 일임을 역설한 선각자였다. 이런 김대건 신부의 신분과 경력, 그리고 학식이
유별남에 놀란 정부당국은 40여 차례나 심문했고 국왕을 모신 어전회의를 열어 거듭 논의하기에 이른다,
(당시 일부 관료들은 김대건신부의 사형만은 면해달라는상소를 올렸음 )
이러한 때 8월 9일 프랑스 함대가 홍주 앞바다에 나타나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시부,
샤스탕 신부의 문제를 가지고 문책 소동을 벌이며 국교를 열 것을 요구해 왔다. 일찍이 청국에서의 아편전쟁
소식을 통하여 서구 식민주의 국가의 침략행위를 알고있던 조선정부는 당황해 하며 김대건을 활용할 방도를
강구하려 했다.그를 프랑스 함대에 보내 전날 세 선교사를 죽이게 된 것에 대한해명과 함께 앞으로의 화의를
제의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김대건도 살아남을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는 1년 후에 다시 오겠다며 8월 10일 조선을 떠나고 말았다.
조정은 다시 강경한 쇄국정치를 주장하면서 김대건 신부를 통외(通外)의 위험 분자로 몰아서 마침내 최후의
단안을 내려 군문효수형을 내린다. 26세의 젊은 나이에 신앙을 증거하기위해 굽힐 줄 모르는 김대건 신부는
처형을 받기에 앞서
"여러분 나의 말을 들으시오! 내가 외국 사람과 교제한 것은 오직 우리 교를 위하고
우리 천주를 위함이었으며 이제 죽는 것도 천주를위한 것이니 내앞에는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려 합니다.
여러분도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천주교를 믿으시오" 라고 믿음과 신념에 찬 말을 외치고 의연한 모습으로
한강물 굽이쳐 흐르는 서울 성밖 새남터에서 휘광이가 내려치는 칼날에 8번만에 목이 떨어지는 더할나이없는
참혹한 순교의 피를뿌렸다.김대건 신부는 비록 서품 받은지 1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엇지만 그의 생은 참으로
굵직한 삶이었다. 페레올 고 주교는 김대건 신부를 잃은 후 파리 외방전교회의 신학교 교장 바랑 신부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 젊은 조선인 신부를 잃은것은 조선교회에 거의 갚기 어려운 불행입니다.
나는 아비가 그 자식을 사랑하듯이 그를 사랑했습니다. 오직 그의 천국에서의 행복을 생각해서
그를 잃은 슬픔을 겨우 스스로 위로할수 있습니다. 그는 동포 중에서 가장먼저 사제 성직에 오른 분으로
그것도 오늘까지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열렬한 신앙과 진지하고 성실한 공경과 놀란 만한 웅변의 사람으로
한 번만이라도 그와 접촉한 교우는 곧 존경과 사랑을 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라고 하시면서
페레올 주교님은 당신도 죽으면 김대건 신부님 곁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기심으로 돌아가신후
미리내 성지에 나란히 묻어 드렸다. 김대건 신부는 순교한 지 11년 후인 1857년 9월 23일에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가경자 칭호를 받게 되고, 1925년 7월 5일에는 북자위에 오르게되었다.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1949년 11월 15일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성직자들의 대주보로 받들게 되고,
7월5일을 김대건 신부의 축일로 정하게 되었다.
1984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에 한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03위한국 순교복자들을 성인으로 선포하면서 김대건 사제 순교자를 그 첫 자리에 올렸다.
... 끝...
ps: 다음편은 聖김재준 이냐사오님 입니다 (김대건 신부님 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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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회서5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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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희
2004-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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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
2004-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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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372
신성구
2004-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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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성인 신부님의 깊은 하느님 사랑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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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379
박여향
2004-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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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명
2004-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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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찬
2004-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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