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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399 김동운 [flashman] 2004-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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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아버님 생전에


내 바로 아랫동생이 아버님과 이야길 나누는 것을


무심코 지나다 우연치 않게 엿들을 수 있었다.


아버님 말씀은 동생이 수계범절을


잘 지키지 않는 다는 생각이 드셨는지


마침 다니러 온 동생을 앉혀 놓으시고


훈계를 하시고 계셨던 모양이다.


앞서 오간 대화는 모르겠으나 아버님의 평생 생활신조는


오로지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의 지향이셨다.


아버님께서는 친구도 별로 없으셨다.


밖엘 도통 나다니시지를 않으시니 그럴 법도 하다.


언젠가 그 이유를 아버님께 여쭈어 본 적이 있었다.


아버님의 대답은 아주 간단 하였다.


나돌아다녀 봐야 얻을 것이 죄밖에 더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나 같은 사람의 시각으로 볼 때 그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생각이셨다.


그러나 나도 나이가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아버님의 그 생각에 점점 더 동조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나도 내 나이가 예사로운 삶을 살 수 있는


나이를 지나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예사로운 삶이란 너무나 구태의연하게 살아온


내 삶에 대한 반성을 든 말이다.


그 때 두 사람의 대화는 신앙생활의 전반에 관한


이야기일 것은 뻔한 일이다.


왜냐하면 아버님은 신앙에 관한 이야기 외엔


우리에게 별로 말씀이 없으셨기 때문이다.


동생의 직업은 군인이다. 지금은 공군대령인데


그 때는 아마 소령 때 있었던 일로 기억이 된다.


군인이다 보니 여기 저기 발령이 나는 대로 가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한 곳에 정을 두고 정착을 하기란 힘 들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러다 보니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로 어영부영했었을 법도 하다.


그것이 아버님 눈에 보였던 모양이다.


자식의 행동거지 하나로써 생활의 전반을 가늠하시는 눈치는


어느 부모님인들 모두가 크게 다름은 없을 것이다.


이야기 중에 내 귀에 들어온 것은 동생내외가 열심 치 않으니


그 자식들인들 제대로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겠느냐는


아버님의 책망이셨다.


문제는 동생의 대답이었다.


신앙은 자유인데 부모라고 해서 어떻게 자식들에게


강요를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이것은 참으로 아버님께는 큰 충격적인 대답이었다.


우리 9남매가 어렸을 적엔 부모님께서는 새벽같이 일어나셔서


가마솥에 밥을 앉혀 놓으시고 아버님은 부엌에서 불을 때시고

어머님은 방에 들어가셔서 모두를 깨우시고 침구를 정리하시면


밥이 뜸들 때쯤 하여 아버님도 방에 들어오셔서


11식구가 무릎을 꿇고 조과를(아침기도) 바치고 나서야


아침을 먹고 모두 자기 갈 곳을 가곤 했다.


물론 저녁에도 어김없이 9시만 되면 모두 집합해야 했다.


어디 가서 놀다가도 그 시간이 되면 돌아와야 했다.


모두 모여 만과(저녁기도)를 드려야 하니까


불참이란 불행한 사태를 맞는 지름길 이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수계범절을 지키지 않았을 때는


그날은 참 불행한 날이 되곤 했다.


손바닥 맞는 것은 좀 쉬운 벌이다.


종아리 맞는 것도 수월하다.


그 때는 배고픈 시절이라 끼니마저 굶고 학교엘 갈라치면


눈앞이 노랗게 보일 지경이었다.


어떻게 보면 어린아이들에겐 참으로 혹독한 벌이라고 생각이 들겠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지극히 당연한 처사였다.


농약을 치던 농부가 점심을 먹기 위하여


마루 끝에 농약 병을 잠시 놓고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아주 어린 아기가 그 농약 병을 입에 물고서 놀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하나


그 아이에게서 그것을 즉시 빼앗고


그것을 가지고 놀면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래도 안되면 때려서라도 말릴 것이다.


만약에 그 아이가 그 농약 병을 빼앗기지 않으려


울고 불고 난리를 친다고 하여


그럼 잘 가지고 놀아라 하고 줄 부모가 있겠는가?


어느 경찰관이나 군인이 작전 중에 잠시 집에 다니러 왔다가


실탄이 든 권총을 벗어 놓고 세수를 하고 있었는데


어린 아이가 그 권총을 가지고 놀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울고 불고 난리 친다고 그것도 그냥 잘 가지고 놀라고 해야 할까?


아버님은 하도 어이가 없으셨는지


이제 장성한 아들을 매질로 깨우쳐 줄 수도 없으시고


입술만 파르르 떨고 계셨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선물을 하나 주셨는데


그 선물이란 그 어떤 것들과는 비교 할 수 없는


가장 고귀하고 값진 자유와 자유의지를 주셨다.


세상의 모든 것을 모두 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특권과 함께 말이다.


그렇게 엄청난 선물인 자유를


우리는 죄악에 쓰고 말았다.


그 엄청난 선물인 자유를


옳게 쓸 수도 있고 나쁘게 쓸 수도 있는

자유의지를 부여 받았다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는 말이다.


우리는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어 여러 가지 지식을 습득케 한다.


그 지식의 습득으로 인하여 자연의 질서를 알며 수학을 알아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기도 하며


문명의 이기로 각종 편리한 생활 보조수단도 만들어


안락하고 편한 생활을 즐기며 산다.


컴퓨터가 어떻게 이 세계를 글로벌화 시켜가고 있으며


지금 세상을 광풍처럼 몰아가고 있는


강대국들의 글로벌리즘은


하느님의 창조이념에 부합된


과연 평등한 사회의 평등한 사람을 위한 발상인가?


이렇게 한 없는 의문과 또 앞으로 제시될


인간 앞에 놓인 과제들은


거의 제도화된 학교교육을 통해,


그리고 온갖 메스미디어를 통한


사회교육에서 얻은 정보의 힘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교육을 받고 거의 강요에 가까운


특정 사상들을 주입을 받은 세대들에게


종교와 하느님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그에 대한 충분한 교육과 정보를 갖고 있지 아니한 세대들이


과연 무엇을 선택하게 될까?


선택의 자유란 자기가 선택하여야 할 대상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교육을 받고


그에 대한 정보를 객관적으로


충분히 습득을 한 후에나 가능한 일이다.


선택하여야 할 대상에 대한 정보가 전무한 상태에서


선택이 자유라고 한다면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저 자연에 내리 비치는 햇볕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 따스한 햇살아래 비치는 저 산 넘어 호숫가에서


혼자 가서 수영이나 하고 오라는 말과 다름이 아니다.

선택의 자유란 쌍방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고


그 제공 받은 정보를 내 것으로 소화해 냈을 때

비로소 선택이라는 말이 성립이 된다.


그래서 오늘 날 우리 신자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전교를 하는 행위는


이 복되고 희망의 빛인 진리를 선택함에 있어서


방해가 되는 정보의 습득에 불균형을 해소하는


정보 전달자로서의 사명인 것이다.


어린아이가 농약병이 자신에게


죽음을 초래 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듯이


하느님에 대한 정보를 모르는 사람에게 선택을 강요 한다면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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