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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둥이 누님, 새해 초하룻날 회갑 잔치를 하다

93376 지요하 [jiyoha] 2006-01-04

 

          해방둥이 누님, 새해 초하룻날 회갑 잔치를 하다



<1>

새해 첫날 첫 가족 나들이를 했습니다. 해방둥이이신 누님의 회갑연에 참석하는 일로 안양을 가는 일이었지요.

누님의 생신은 양력으로는 1월 1일이고 음력으로는 11월 28일이랍니다. 올해의 음력 11월 28일이 양력으로는 지난해 12월 29일이었지요. 음력이 상용되던 시절에 태어나 호적에 음력 생일이 기재된 세대답게 누님은 그 동안 줄곧 음력으로 생신을 지내 왔지요.

회갑 생신도 원래는 지난해 12월 29일, 즉 음력 11월 28일에 지내려고 계획을 잡았답니다. 그런데 그 날은 주중인 목요일이어서 직장에 몸이 매인 가족들의 참석이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양력 생일인 1월 1일, 새해 첫날에 회갑 생신을 지내기로 계획을 바꾸었답니다.



▲ 누님의 회갑연 자리에 함께 한 누님과 어머니. 누님은 최근 둘째 며느리를 잃으신 어머니께 위로를 드리고...
ⓒ 지요하

그러니까 누님은 육십 평생을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양력 생신을 지내신 셈이었습니다. 양력을 따라 처음으로 1월 1일, 새해 첫날에 지내는 생신이 회갑 생신이었으니 이래저래 더욱 뜻이 깊은 일이었습니다.

60세까지는 음력으로 생신을 지내 오다가 61세 회갑 생신은 양력으로 지냈으니, 앞으로는 계속 양력 생신을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들더군요. 그런 내 생각을 누님과 자형께 전해 드렸는데, 누님이 내년에도 양력 생신을 지내실 지는 모르겠습니다.

지난해 12월 25일경까지도 누님의 회갑연은 음력 11월 28일에 있게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 집 달력에는 일찍부터 12월 29일에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고, '안양행'이라는 글자도 적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누님의 회갑연 계획이 새해 1월 1일 양력 생신 일로 바뀐 것이었습니다.

표면적인 이유는 양력 생신 일인 새해 1월 1일 공휴일에 회갑 생신을 지내야 직장에 매인 가족들이 아무 구애 없이 참석할 수 있다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그 표면적인 이유 외로 또 하나의 이유가 있음을 우리 가족은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누님의 친정 울타리 한 곳에 생긴 '빈자리' 때문이기도 할 터였습니다. 내 가운데 제수씨의 죽음과 관계가 없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제수씨의 장례 일인 22일로부터 불과 며칠 떨어지지 않은 29일에 회갑연을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친정 가족들에게 미안한 일일 터였습니다. 며칠이라도 더 동안을 두고, 그리고 해를 바꾸어서 회갑연을 갖는 것이 좋으리라는 생각을 누님과 자형이 했던 듯싶습니다.

나는 그것을 굳이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지레 짐작을 하는 것만으로도 누님과 자형께 고마운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누님의 회갑연 계획이 양력 생신 일인 새해 1월 1일로 연기되었다는 연락을 받는 순간 정말 기쁘고도 고마운 마음이었지요.



▲ '어린이 놀이방'을 운영하는 맏딸 채희정, 한의사로 한의원을 운영하는 맏사위 김의환 부부와 함께...
ⓒ 지요하

우리 가족은 일찍 서둘러서 오전 9시 30분쯤 출발을 했습니다. 내 12인승 승합차에 두 형제 가족은 물론이고 태안에서 사는 두 생질 형제도 합승을 했습니다. 대전에서 사는 막내동생 가족도 일찍 출발해서 안양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내 승합차를 이용하여 온 가족이 함께 나들이를 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내가 1989년부터 승합차를 소유하기 시작했으니, 내 승합차를 이용한 가족 나들이의 즐거움도 벌써 15,6년 세월을 헤아리는 일이었습니다. 그 세월은 가운데 동생 부부의 결혼 생활 15년을 상회하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새해 첫 가족 나들이이건만, 즐겁기만 한 나들이는 아니었습니다. 나는 운전을 하면서 거울을 통해 자주 차 안의 모습들을 살피며 한숨을 삼키곤 했습니다. '빈자리'가 너무도 확연하였습니다. 맨 뒷좌석의 왼쪽 자리는 세상 떠난 가운데 제수씨가 즐겨 앉던 자리였습니다. 동생 부부가 나란히 앉아서 즐거운 표정을 짓는 것을 나는 거울을 통해 보면서 흐뭇한 마음을 갖곤 했지요.

이제 그 자리에 제수씨는 없고 짝 잃은 동생 홀로 앉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동생의 모습이 더없이 외롭고 쓸쓸하게 보였습니다. 서로 마주보게 해놓은 가운데 좌석에 앉은 철없는 아이들이 신나게 노닥거리고 장난을 치고 하는데도 동생은 함께 웃지 않았습니다. 많이 초췌해진 동생의 쓸쓸한 표정을 보면서 나는 운전을 하면서도 한 순간 눈물을 짓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빈자리'는 집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그 빈자리는 우리 가족에게 노상 존재하는 것일 수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새해 첫날 첫 가족 나들이를 하는 내 승합차 안에도 그 빈자리는 존재하고, 나는 그 빈자리를 함께 싣고 가는 셈이었습니다.


▲ 첫 외손녀인 김민영 어린이의 축가를 들으며 즐거워하는 누님과 자형 채광원님(모자 쓴 이).
ⓒ 지요하

<2>

나는 중간에 매송 나들목으로 들어가서 안산시 본오동에서 사는 둘째 누이동생 모녀를 태우고 안양으로 갔습니다. 둘째 누이동생 모녀를 태우니 내 12인승 승합차는 만원인 상태가 되었는데, 그 바람에 차안의 '빈자리'는 일시 없어진 듯하면서도 더욱 확연해지는 듯도 하고….

그런 모호한 마음을 안고 일단 누님의 집으로 갔습니다. 12시가 다 된 시각이어서 누님의 가족들은 이미 회갑연 장소로 갔고, 집에는 누님 혼자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누님은 친정붙이들에게 주려고 미리 준비해 놓은 돼지 갈비 상자 등 여러 가지 물품을 내 차에 실어주었습니다. 이제는 예전처럼 두 집 구분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두 집 구분을 하지 않았노라는 누님의 말에도 아픔 같은 것이 매달려 있더군요.

누님을 내 차에 태우고 누님의 길 안내를 받으며 우리는 회갑연 장소로 갔습니다. 큰 건물의 17층에 있는 넓은 음식점이더군요. 육류와 해물을 고루 갖춘 뷔페 음식점이었습니다. 누님의 회갑연에 참석한 이들은 별로 많지 않았습니다. 누님의 두 명 시동생 가족들과 네 명 시누이 가족들, 그리고 친정붙이들이 전부였습니다.

나는 오랜만에 뵙는 누님의 시집 가족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나서 우리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홀로 된 동생 옆에 앉아 동생에게 신경을 쓰는데, 동생은 또 한 순간 눈물을 짓더군요. 큰 누님의 회갑연, 가족이 모두 모인 성대한 자리에 함께 해야 할 사람이 없는 현실에서 또 한번 막막한 슬픔과 허전함을 느낀 듯…. 동생의 그 모습을 보고 어머니도 눈물을 지으시고….


▲ 내가 지어 온 축시를 직접 낭송해 드리고...
ⓒ 지요하


식사를 마친 다음에는 양쪽 가족 모두 같은 건물 4층에 있는 누님의 맏딸이 운영하는 '어린이 놀이방'으로 갔습니다. 거기에는 적당한 공간이 있어서, 거기에서 축하식 행사를 가졌습니다.

말주변이 있는 편인 내가 사회를 보았습니다. 먼저 누님의 어린 외손녀들로 하여금 축가를 부르게 하고, 다음에는 내가 지어 온 축시를 낭송하였습니다. 내가 축시를 읽고 나서 다시 접어 봉투에 넣어 누님께 드리니 누님은 고맙다고 하는데 눈시울이 젖어 있더군요.

다음에는 양쪽 어머니들이 양쪽에서 지켜보시는 가운데 누님과 자형으로 하여금 케이크에 꽂힌 촛불들을 끄게 했고, 함께 칼을 쥐고 케이크를 자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형으로 하여금 샴페인을 터뜨리게 했습니다.


▲ 아내와 함께 케이크를 자르고 나서 축하 샴페인을 터뜨리는 자형
ⓒ 지요하

누님으로 하여금 샴페인 잔을 돌리게 한 다음 인사말을 하게 하였습니다. 누님은 먼저 하느님께 감사했고, 양쪽 어머님들께서 건강하게 오래 사시는 것에 감사했습니다. 시동생들과 동서들에게, 시누이들에게, 딸들과 사위들과 아들에게, 그리고 친정붙이들에게 고루 감사를 표했습니다. 그러자 자형은 "왜 나는 빼놓느냐"고 해서 폭소가 터졌고, 누님이 "남편은 일심동체라 말할 필요가 없었다"고 해서 박수를 받았습니다.

누님은 1989년 고혈압 뇌출혈로 사경을 헤맨 적이 있었습니다. 안양병원 중환자실에 인사불성 상태로 열흘 동안 누워 있다가 경희대 한방병원으로 옮겨 기적적으로 소생한 다음 두 달만에 퇴원을 했지요. 말만 약간 어눌할 뿐 아무런 장애도 남지 않았습니다.

누님은 그때의 일을 회고하면서 입원 기간 내내 병실을 지켜 준 친정 어머니와 매일같이 지압을 하며 간호를 해준 남편에게 다시 한번 고마운 뜻을 표했습니다. 평소 약간 어눌했던 것과는 완연히 다른, 술술 넘어가는 말에 모두들 놀라기도 하며 박수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어서 노래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조금 남은 두루마리 휴지 뭉치를 마이크 삼아서 주고받으며 어른들은 모두 노래 한 곡씩을 불렀습니다. 나는 내 애송시들 중에서 홍윤숙 님의 '장식론'을 읊어 드렸고, 가곡 '옛동산에 올라'를 불렀습니다. 그러고 보니 누님의 시집 가족들에게 내 시낭송과 가곡 선물을 드리기는 처음인 듯하였습니다.


▲ 주인공이 노래를 부를 때 남편은 옆에서 손 장단으로 응원을 하고...
ⓒ 지요하


오후 4시까지 이어진 참으로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비록 우리 가족에게는 '빈자리'의 슬픔과 허전함이 없지 않았지만, 누님의 회갑연은 우리 가족 모두에게 즐거운 새해 첫 '선물'이 되었습니다. 그 선물로 우리 가족은 새해 첫날을 멋지게 장식할 수 있었습니다.

새해 첫날 회갑 생신을 지내신 누님께 다시 한번 축하와 감사를 드리며, 내가 지어 회갑연 자리에서 낭송해 드린 축시를 여기에 소개합니다.


회갑 축시


누님에게도 이런 날이 있구려


오늘 회갑을 맞으신
누님의 생신을 놓고 보아하니
누님은 차암 복이 많구려

누님이 태어나신 1946년 1월 1일이
음력으로는 1945년 11월 28일이었지요
음력이 상용되던 그 시절
누님이 태어나신 날은
우리 민족이 저 일제로부터 해방되던 해에 속하여
누님은 당당히 해방둥이가 되었지요
그리하여 고향의 관공서에서는
해방둥이 아기에게
광목 일곱 자를 선물했지요
외할머니는 그 광목으로 누비이불을 만들어서
오로지 해방둥이 아기에게만 덮어주니
그 광목 누비이불은
그 아기가 해방둥이라는 오롯한 표시가 되었지요

음력으로는 해방둥이가 되고
양력으로는 새해 초하루를 생일로 가졌으니
누님은 차암 욕심도 많구려
게다가 순결한 기운이 감도는 새벽 3시
소복히 눈이 내리는 가운데
마치도 하얀 눈꽃처럼 태어나서
감성이 풍부하신 우리의 아버님은
평생 동안 하얀 눈처럼
순결한 마음으로 살라는 뜻으로
누님에게 '雪姬'라는 이름을 지어 주셨지요

한 남자를 만나
순결한 몸과 마음을 바치고
초지 일관 하느님 신앙으로 중심을 유지하며
여섯 꽃송이를 온몸으로 피워내며
갖가지 인생 고락
적지 않은 풍상도 겪으며
한때는 목숨이 경각에 달했던
위기의 시간들도 견디어 내고
드디어 육십 갑자 회갑 생신에 이르렀으니
이보다 더 큰 홍복이 어디 있을까요

위로는 장수를 누리시는 양쪽 어머님과
인정 많고 건강하신 반려와
착하고 반듯한 여섯 꽃송이와 짝꿍들이며
풍성한 혈연 인연 울타리들이
한가지로 경하와 축복의 박수를 보내니
오늘은 기쁨이 넘쳐
한 10년쯤 젊어지겠구려

비록 이즈음 친정 울타리 한곳에
빈자리가 생겨
상심이 전혀 없지는 않으시겠지만
오롯히 하느님 뜻에 맡기는 마음으로
오늘의 경하와 축복을 다 받아 안고
평생 동안 유지해 온
자상하고 넉넉한 품성 그대로
기쁨의 함박 웃음
흐벅지게 꽃피우소서.


(2006년 1월 1일 안양, 누님의 맏딸 채희정의 일터에서 친정 동생 지요하 봉송)


2006-01-04 10:07
ⓒ 2006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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