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토중래(捲土重來)와 와신상담(臥薪嘗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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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020 배봉균 [baeyoakim] 2006-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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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토중래(捲土重來)와 와신상담(臥薪嘗膽)
권토중래(捲土重來)
<題烏江亭(제오강정)> 두목(杜牧, 803~852)
勝敗兵家不可期(승패병가불가기) 승패는 병가도 기약할 수 없으니,
包羞忍恥是男兒(포수인치시남아) 분함을 참고 욕됨을 이기는 것이 사나이라.
江東子弟俊才多(강동자재준재다) 강동의 자재 중에는 준재가 많으니,
捲土重來未可知(권토중래미가지) 흙먼지 날리며 돌아올 날을 알 수 없구나.
이 시(詩)에서 “흙먼지를 일으키며 다시 쳐들어온다는 뜻으로 한 번 실패(失敗)한 사람이 세력(勢力)을 회복(回復)해 다시 도전(挑戰)해 온다는 의미(意味)의 권토중래(捲土重來)라는 고사성어(故事成語)가 생겨났습니다.
오강(烏江)은 초패왕(楚覇王) 항우(項羽, B.C.232~202)가 스스로 목을 쳐서 자결(自決)한 곳입니다. 한왕(漢王) 유방(劉邦)과 해하(垓下)에서 펼친 ‘운명(運命)을 건 한판 승부(勝負)에서 패(敗)한 항우는 오강으로 도망(逃亡)가 정장(亭長)으로부터 “강동(江東, 양자강 이남의 땅)으로 돌아가 재기(再起)하라.”는 권유(勸誘)를 받았지만 항우는 “8년 전 강동의 8,000여 자제(子弟)와 함께 떠난 내가 지금 혼자 무슨 면목(面目)으로 강을 건너 강동으로 돌아가 강동의 부형(父兄)을 대할 것인가?”라며 파란만장(波瀾萬丈)한 31년의 생애(生涯)를 마쳤던 것입니다.
항우가 죽은지 1,000여년이 지난 어느 날, 두목은 오강의 객사(客舍)에서 일세(一世)의 풍운아(風雲兒), 단순(單純)하고 격(激)한 성격(性格)의 항우,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항우, 사면초가(四面楚歌)속에서 애인(愛人) 우미인(虞美人)과 헤어질 때 보여준 인간적(人間的)인 매력(魅力)도 있는 항우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강동의 부형에 대한 부끄러움을 참으면, 강동은 준재(俊才)가 많은 곳이므로 권토중래(捲土重來)할 수 있는 기회(機會)가 있었을텐데도 그렇게 하지 않고 31세의 젊은 나이로 자결(自決)한 항우를 애석(哀惜)하게 여기며 이 시(詩)를 읊었습니다. 이 시(詩)는 항우(項羽)를 읊은 시(詩)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입니다.
와신상담(臥薪嘗膽)
B.C. 496년 오왕(吳王) 합려(閤閭)는 월(越)나라로 쳐들어 갔다가 월왕(越王) 구천(句踐)에게 패(敗)하여 전사(戰死)하였습니다. 그 아들 부차(夫差)는 이 원수(怨讐)를 갚고자 본국(本國)으로 돌아와 장작 위에 자리를 펴고 자며, 방 앞에 사람을 세워두고 출입(出入)할 때 마다 “부차야, 아비의 원수를 잊었느냐 !”하고 외치게 하였습니다. 부차의 이와 같은 소식을 들은 월왕 구천이 오나라를 먼저 쳐들어갔으나 패하고 말았습니다.
싸움에 크게 패한 구천은 얼마 남지 않은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회계산(會稽山)에서 농성(籠城)을 하였으나 견디지 못하고 오나라에 항복(降服)하였습니다. 포로(捕虜)가 된 구천은 갖은 모욕(侮辱)을 겪은 끝에 영원(永遠)히 오나라의 속국(屬國)이 될 것을 맹세하고 쓸쓸히 귀국(歸國)하였습니다. 그는 돌아오자 바로 자리 옆에 항상 쓸개를 매달아 놓고 앉으나 서나 늘 이 쓸개를 핥아 쓴맛을 되씹으며 “너는 회계의 치(會稽之恥)를 잊었느냐 !”하며 자신(自身)을 채찍질 했습니다.
월왕 구천이 오나라를 쳐서 이기고 오왕 부차로 하여금 자살(自殺)하게 한 것은 그로부터 20년 후의 일입니다. 이와 같이 와신상담(臥薪嘗膽)은 오왕(吳王) 부차(夫差)의 와신(臥薪)과 월왕(越王) 구천(句踐)의 상담(嘗膽)이 합쳐서 된 고사성어(故事成語)로 원수를 갚거나 어떤 목적(目的)을 이루기 위해 괴로움을 참고 견딤을 비유(比喩)한 말입니다.
[출전] <十八史略, 史記 越世家> (네이버 백과사전을 참조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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