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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녹) 2026년 9월 27일 (일)연중 제26주일(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맏아들은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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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ㅣ체험
10.31.“모든 계명 가운데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 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신부.

150681 송문숙 [moon6388] 스크랩 2021-10-31

 

                                                     마르 12, 28-34(연중 31주 주일)

 

오늘은 연중 제 31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 신앙의 원천을 밝혀줍니다. 곧 우리 신앙의 근거가 되는 그 바탕이 무엇인가를 말해줍니다.

<제1독서>에서는 유대인들에게 가장 거룩한 말씀이라고 불리는 ‘셰마 이스라일’을 들려줍니다. 사실, 유다인들은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맨 먼저 배우는 것이 “들어라 이스라엘아”로 시작되는 바로 이 “셰마”라는 신앙고백문입니다. 그들은 적어도 아침과 저녁, 하루에 두 번 이 기도를 정해놓고 드립니다. 그리고 경건한 유대인들은 모세의 말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 이를 기억하고 마음에 새기기 위해 이마와 왼쪽 팔에 경구갑을 부적처럼 붙들어 매고 다녔고(신명 4,8-9 참조), 옷자락에 술을 달고 다녔습니다(민수 15,37-39).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 십계명은 6백 조항이 넘게 보태어져 실천할 수 없게 되었고, 또 어느 계명이 큰 계명인지 토론이 계속되었는데,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도 이 질문을 예수님께 합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마르 12,28)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들려주었던 계명으로 대답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마르 12, 29)

 

이 말씀은 “첫째가는 계명”인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말씀하시기에 앞서 밝히신 ‘하느님의 존재’ 와 ‘우리의 존재와의 관계’에 대한 계시입니다. 곧 행동의 원리로서의 사랑의 계명에 앞서, 먼저 왜 사랑을 해야 하는지, 그 근거와 이유를 밝혀줍니다. 그것은 ‘한 분이신 우리 주님 하느님’이신 분과 ‘그분의 것, 그분의 소유’인 우리와의 관계에서 사랑의 계명이 흘러나옴을 밝혀줍니다. 곧 우리 신앙의 원천이요 근거요 바탕이 바로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이며, 바로 이 관계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임을 밝혀줍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슬기롭게 대답하는 율법학자에게 “너는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12,34)고 할뿐 ‘하느님 나라에 들어와 있다’고는 말씀하시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왜 일까요 그것은 율법학자에게 아직 ‘사랑의 실천’이 남아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는 <구약>의 ‘사랑의 계명’은 <신약>의 ‘사랑의 새 계명’으로 완성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곧 모세가 말한 구약의 계명과 예수님의 새 계명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사랑의 계명과 <신약>의 사랑의 새 계명은 어떻게 다를까?

우선, <구약>에서의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는 둘째 계명의 ‘이웃 사랑’은 제한적입니다. 곧 여기서 말하는 ‘이웃’이란 동포로 한정하거나 함께 사는 이방인들까지를 포함시킬 뿐입니다(레위 19,3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루가 10,30-37)에서 보여주듯이 무제약적, 무차별적인 이웃에 대한 사랑일 뿐만 아니라, 원수까지도 포함하는 ‘완전한 사랑’을 말씀하십니다(마태 5,44-48).

또한 <구약>에서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여 ‘이웃 사랑’의 시금석으로 ‘자신에 대한 사랑’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를 완전히 바꾸어 새 계명으로 주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15,12)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이웃 사랑’의 시금석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제시하십니다. 더 나아가서, 오늘 <복음>에서 보여주듯이, 예수님께서는 <신명기>의 ‘하느님 사랑’(6,4-5)과 <레위기>의 ‘이웃 사랑’(19,18)을 한데 묶으시면서 근본적으로 새로운 관점을 요구하십니다. 곧 사랑의 새로운 변혁, 새로운 틀의 패러다임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는 관점입니다. 아니, 애시 당초 ‘남’이란 없다는 관점입니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이 있을 뿐! 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자매가 있을 뿐이라는 관점입니다. 사실, 우리가 ‘한 몸’이라는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이웃도 내 몸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은 흔히 생각하는 남에게 베푸는 시혜나 자선이 아니라, 바로 ‘한 몸’으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같아집니다.

물론, 이 때 ‘한 몸’이란 ‘너의 몸이 내의 몸이고 나의 몸이 너의 몸’이라는 혼합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요한 바오로 2세 교종께서 [새 천년기](24항)에서 표현한 대로, “나의 일부”인 형제들이란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곧 ‘한 몸의 지체’로서, 나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나의 일부이기에, 나의 일부인 형제의 아픔이 바로 나 자신의 아픔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형제가 나의 일부이듯 하느님의 일부가 되고, 형제 사랑이 곧 하느님 사랑이 되며, 그러기에 하느님 사랑이 곧 형제 사랑이 됩니다. 좀 더 확장해서 표현해본다면, 형제가 곧 하느님이라는 표현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랑의 이중계명’은 새로운 관점, 새로운 틀을 요구합니다. 곧 ‘남’인 이웃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의 전환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소명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1)

주님! 당신 사랑으로 새로 나게 하소서!

내 자신을 통째로 바꾸어 새로워지게 하소서!

이웃을 타인이 아니라, 내 자신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그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그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게 하소서.

이웃 안에서, 주님이신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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