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 정치의 원리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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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546 조병식 [goodactor] 스크랩 2025-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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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우리의 손을 잡지만
악은 늘 우리를 어렵게 유혹한다
세상속에서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위의 두 가지 작용과 작동이 그 삶에 함께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위의 두 가지 작용과 직동 속에서의 삶을 통해 사람은 성화되고 의화되고 양화된다는 것도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하느님의 손은 언제나, 어디에서나 깨끗하고 단순하며, 투명하고 진실하기에 사람이 그 작용과 작동을 못알아 본다는 것은 그 사람 자신에게 무엇보다 큰 삶의 문제이다
사람들은 악의 작용과 작동에 기우는 성향을 지니고 있는데, 그런 성향은 언제나 사람들 속에서 일어나고 벌어지는 모든 문제들의 실제 근원이며 뿌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만큼 하느님의 나라를 바라지 않고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지 않는다
사람들을 올바르게 다스린다는 것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는 언제나 정치를 필요로 한다
그러한 정치는 일정한 구조와 체계를 가지고 있는 피조물의 성격에 바탕을 두고서 유사한 제도적, 관습적 시스템으로 확장되도록 하는 것을 그 플랜트로 삼는다
유기적인 조화가 지속가능한 관리와 통제, 그렇게 살아있는 이데올로기의 확립과 실현이 그 수단과 방법, 도구와 장치들을 필요한 만큼 만들게 된다
그게 지금까지 이 지구상에서, 세상을 살아온 사람들이 보고 겪고 살았던 삶의 질서와 양식이며 앞으로도 살아갈 이데올로기의 원형성이며 그에 따른 전형들이다
정치는 그러한 이데올로기를 프레임으로 삼는다
그래서 그러한 이데올로기의 구현이 정당한지, 합리적인지에 대한 판단과 이해는 변증적인 과정과 절차 속에서 반영되는 식으로 계속되는 것이 역사적 진행을 삶으로도 사는 사람들에게 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궁극이나 이상향이 정해질 수도 없고(실제로 분명히 그렇다) 그 지향점을 두어야 할 완성의 단계를 정립할 수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막연한 실증?같은 역사를 산다는 것, 그 진행 속에 두어져 있다는 것, 그것만큼 불확실성과 불완전성을 더하게 만드는 요인은 없을 것이다
그러한 삶의 사실들 속에서 보다 분명한 원천을, 보다 정당한 원리를, 보다 합리적인 원칙을 찾는 일은 사람들의 오래된 역사적 과업과도 같은 일들이다
그런 작용과 작동을 추구한다는 것, 그런 작용과 작동을 실현한다는 것은, 그런 작용과 작동이 가능하게 하도록 하는 의미와 가치가 있기에 그 지향성과 방향성을 성립시키는 것이다
생명과 진리가 동일시되고, 그 바탕에서 길이 합치된다는 것은 삶의 신비이기도 하다
영혼이 떠난(분리된) 사람은 시체로 죽어있고, 육체가 없는(분리된) 사람은 유령으로 사라진다
영혼과 육체가 통합된 사람에게 그 삶이 부합되어 있기에, 언제나 그 삶의 진실과 사실이 무엇보다 중요성을 지니고, 그 중대한 국면에 포괄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머무는 이데올로기와 그 이데올로기를 저변으로 하고 기반한 모든 삶의 질서와 양식, 그 수단과 방법들, 그 도구와 장치들이 삶의 정당성과 합리성에 충분히 부합하고 충족되도록 모든 이의 삶에서 마땅히 실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실현이 역사적 과정 속에서 변증적이기에 그 작용과 반작용은 서서히도, 격렬하게도 언제나 끊임없이 어제도, 오늘도 계속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변증의 합으로 도출된 결과들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피할 수 없고, 그 모두가 직면해야 할 현실임을, 다 받아들여야 할 사실이라는 것 또한 변함없는 역사의 실증이다
작용의 연속성, 작용과 반작용
작용의 연속성은 쉽게 말해 순리적으로, 순차적으로 이어지도록, 되도록 한 일들이다
선행하는 모든 일이 그 선행에 부합하는 후과(결과들)로 자연스레 계속되어 결실을 맺는 식이다
씨앗은 싹이 트고, 자라나, 나무가 되어, 열매를 맺는다 는 식이다
그래서, 비전, 전망, 설계, 계획이라는 말들이 그 작용의 연속성을 청사진처럼 제시하는 원천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렇게 일이 잘 되는 것은 창조처럼 전능으로 된 일의 차원을 나름대로 보여주는 성격에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많은 것들의 협력 속에, 나무 한 그루가 자라나는 데에도, 보이지 않는 많은 작용들이 있었고, 그렇게 창조라는 위대한 일의 차원에 있는 그 피조물의 성격이 구현되어 실제하는 것이다
그러면 작용과 반작용은 그런 작용의 연속성과는 다른 것인가
보통은 변증적인 차원이나 성격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어떤 상태인가, 어떤 경우인가 등에 따라서도 달리 보일 수도 있겠지만, 결국은 한 가지 사실만이 지배적으로 보인다는 피사체의 성격상을 가지고 있는 세계에서는 결국 그 작용과 반작용으로 인한 한 가지 사실의 실현, 한 가지 결과의 도출에서 보자면 큰 카테고리 속에서는 서로가 뭔가의 관련성을 두고 접점을 이루는 가운데, 작용하고 반작용하며 결국은 그 합이 되는 지점으로 가는 과정상에서 그 연속성이 연계될 수 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떻든, 전망과 계획이 실현되는 과정 속에서의 작용들이라면 그 연속성에서 일어나고 벌어지는 것으로, 그러나 전망과 계획의 실현과는 무관하게 하는 성질과 상태로 작용되는 것이라면 달리 여겨지는 어떤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의 신비는 언제나 하느님의 영역이다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 하는 논리상의 아이러니는 전망과 계획을 지닌 설계 단계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어떻든 그 창조질서의 보존상에서는 닭은 알을 낳을 것이며, 달걀은 병아리로 부화되어 닭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둘을 끊어진 지점으로 보면, 문제가 되겠지만, 동일한 한 지점으로 보면 별 문제가 아닌 것이다
분명히 모든 사실들은 하느님의 그 영역을 벗어나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나비 한 마리도 가장 적합한 생태를 기반으로 결국 번데기에서 탈피하는 과정을 거쳐 그 큰 두 날개를 활짝 펼친 제 모습으로 자연에 출현하는 것이다
그런 삶의 과정을 둘 수 있는 것은 창조질서라는 큰 뜻에 포괄되어 수렴되도록 할 수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생명체란 겱국 그 과정에서 파괴나 손상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삶을 지닌 것들이다
자연이 그런 환경이 되어주고 배경이 되어주고 기반이 되어주고 토대가 되어준다는 것에도 그 큰 신비가 있는 것이다
결국 인간삶의 궁극과 이상향은 하느님 나라이고 하느님의 의로움이지만 사람들이 그 신비를 모르고 사는 이상, 세상 속에서 지금처럼 악화와 불행을 계속해서 살 수 밖에는 없을 것이다
악은 예수님에게도 찾아와 그 시비와 유혹을 일삼는 성격을 지닌 차원이다
멀리서 친구가 찾아오면 반갑겠지만 그 정체도 모를 악이 찾아와 그 시비와 유혹을 일삼을 때에는 다 깊은 뜻이 있을 줄 안다
사람에게는 주어진 삶의 몫도 있지만, 치러야 할 삶의 값도 있다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하느님 나라는 피상적이고 막연한 세계가 아니다
무엇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있는 곳이 하느님 나라일 것이다
민주주의는 시민들 각자의 삶이 그 자유와 평등과 정의 속에 살아있도록 정치를 필요로 한다
정치가 그런 일을 잘 해 주도록 요청하고 요구한다
정치가 그 일을 잘 못할 때, 언제나 그 요청과 요구가 그 민주주의 광장에서 그 비판과 성토의 목소리로, 그 시위와 집회의 참여로 달아오르고 뜨거워진다는 사실을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라면 알아야 할 일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