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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자) 2025년 3월 14일 (금)사순 제1주간 금요일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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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연중 제6주간 수요일]

180183 박영희 [corenelia] 스크랩 2025-02-19

[연중 제6주간 수요일] 마르 8,22-26 “그분께서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다.“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대어주십사고 청합니다. 그에게 손을 대기만 하면 그가 시력을 회복하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들이 기대하는대로 그를 ‘한 번에’ 고쳐주시지 않고 여러 단계를 거쳐 고쳐 주십니다. 말씀 만으로 병자를 고치시고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며 죽은 사람까지 살리시는 분께서 능력이 부족해서 그렇게 하신 건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는 그의 눈을 보게 하시는 과정을 지켜보는 이들에게 제대로 본다는 게 무엇인지를 알려주시기 위함이라고 봐야겠지요.

 

이 세상에는 보고 싶은 것도 많고 봐야할 것들도 많지만, ‘제대로 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성이 없는 동물들처럼 그저 대상을 보이는대로, 내 망막에 대상이 맺히는 그대로 보는 게 아니라, 대상에 대해 아는만큼, 즉 내가 이해하고 깨달은만큼 보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마르코 복음에서 ‘보다’라는 의미로 주로 사용하는 그리스어 동사도 단순히 ‘시력’을 뜻하기보다, ‘이해와 깨달음’을 동반한 참된 앎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눈먼 이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십니다. 이에 그 사람은 사람들이 보이긴 하는데 ‘걸어다니는 나무’처럼 보인다고 답하지요. 사람은 마음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에 따라 보이는 게 다른 법입니다. 그가 앞을 못 보던 시절에 자기 말고 다른 사람들은 길가에 서 있는 나무들처럼 이리저리 부딪히며 그가 가는 길을 방해하는 ‘장애물’ 같은 존재였기에, 시력을 회복한 뒤에도 자기가 보는 사람의 내면이나 본질을 보지 못하고 겉모습만 보았던 겁니다.

 

이에 주님께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자 그는 비로소 ‘똑똑히’ 보게 됩니다. 주님의 안수를 통해 겉모습을 넘어 내면을, 현상을 꿰뚫어 본질을 알아보는 ‘영안’을 갖게 되었기에, 비로소 대상을 희뿌옇게 보지 않고, 즉 겉모습만 대충 훑어보고 미루어 짐작하지 않고 그 내면과 본질을 알아보려는 노력을 시작하게 된 겁니다. 그러나 참된 봄은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지요. 주님과 함께 그분께서 이끌어주시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고 나태함과 안일함에 빠져 다시 예전의 잘못을 반복하면 언제든 다시 눈먼 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고 말씀하십니다. ‘저 마을’이란 ‘벳사이다’, 즉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따름으로써 회개하지 않고 잘못된 길을 고집함으로써 “불행하여라”라는 엄중한 경고의 메시지를 들었던 공동체를 가리키지요. 결국 “그 마을로 들어가지 마라”는 말씀은 욕망에 휘둘려 예전의 잘못들을 되풀이함으로써 주님께 받은 은총을 ‘도루묵’으로 만들지 말라는 경고의 뜻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두 눈 부릅뜨고 늘 깨어있는 자세로 기도하며 주님의 뜻을 헤아리고 실천해야겠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똑바로 사는 길입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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