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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송영진 신부님_<위선자의 신앙생활은, 신앙생활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181102 최원석 [wsjesus] 스크랩 2025-03-29

“예수님께서는 또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8,9-14)”

1) 이 비유에 나오는 바리사이의 오만한 모습은,

예수님의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 마음을 아신다.

사실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루카 16,15).”

예수님께서는 비유에서 바리사이의 태도를 ‘꼿꼿이 서서’로

묘사하셨고, 그의 기도는 ‘혼잣말’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꼿꼿이 서서’는 그의 오만함을 나타내고, ‘혼잣말’은,

그의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자기의 신심을 과시하고

자랑하는 ‘잘난 체’ 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 태도는 하느님 앞에서 ‘혐오스러운 것’입니다.>

반면에,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기도하는 세리의 모습은,

그의 겸손함과 회개의 진실함을 나타냅니다.

2) 바리사이가 강도짓, 불의, 간음죄를 저지르지 않은 것은

사실일 텐데,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만 그런 것이고,

마음속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1-22ㄴ).”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마태 5,27-28).”

인간들은 다른 사람의 ‘겉만’ 보고 판단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속을’ 먼저 보십니다(루카 11,40-41).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라는 바리사이의 말은,

다음 가르침에 연결됩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 7,1-3)”

<예수님의 기준으로는, 바리사이의 죄는 ‘들보’이고,

세리의 죄는 ‘티’입니다.>

마음속에 죄가 가득 차 있는데도 자기는 죄를 짓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위선자가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그 자체가 위선이고,

그 말은 아무 의미 없는 ‘빈말’입니다.

3) 바리사이는 자기가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친다고 자랑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위선자들의

단식과 십일조를 이렇게 꾸짖으셨습니다.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마태 6,16).”

<이 말씀은, 위선자들의 단식은

단식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실제로 밥을 굶는다고 해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단식은 단식이 아니라 위선일 뿐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루카 11,42).”

<‘사랑 없이’ 바치는 것은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4)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라는 말씀에서 ‘의롭게 되다.’ 라는 말은,

‘구원받을 자격을 얻다.’ 라는 뜻입니다.

바리사이는 그 자신의 위선과 교만 때문에 구원받을 자격을

얻지 못했고, 세리는 진실하게, 진심으로 회개했기 때문에

그 자격을 얻었습니다.

“자신을 높이는 이”는 “의인이라고 자처하는 위선자”입니다.

“낮아지고”는 “구원받지 못하고”입니다.

“자신을 낮추는 이”는 “진실하게 회개하는 이”입니다.

“높아질 것이다.”는 “구원받을 것이다.”입니다.

5) 비유에 나오는 세리는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죄인이고, 바리사이는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죄인입니다.

‘회개’는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합니다.

그래서 세리는 회개를 했지만, 바리사이는 자기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이라고 생각했으니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고 해서

죄가 없어지거나 지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할 것들을

모르고 있는 것도 죄가 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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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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