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순 제3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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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105 박영희 [corenelia] 스크랩 2025-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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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3주간 토요일] 루카 18,9-14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을 ‘의로움’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참된 의로움은 내가 노력한 공로로 쟁취하는게 아니라,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기도하며 그분 뜻을 헤아리고, 그 뜻에 순명하는 이들에게 선물처럼 주어지지요. 그런데 오늘 복음 속 비유에서는 그런 기도의 목적을 잘못 이해하여 엉뚱한 기도를 바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바리사이입니다. 그는 율법을 어기지 않고 철저히 지킨 자신의 공로를 통해, 죄인이나 부정한 이들과 거리를 둔 채 철저히 분리된 삶을 살아온 그동안의 노력을 통해 자신이 ‘이미’ 의로워졌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즉 그는 기도의 목적을 상실한 상태인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마음으로 하느님을 마주한 채 그분께 기도를 드리면서도, 그분 앞에서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기는 커녕 꼿꼿이 선 채로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는 하느님께 자기 자랑을 늘어놓기에 바쁜 모습을 보입니다. 자기는 일주일에 두 번이나 단식재를 지키고, 소득의 10분의 1이나 하느님 대전에 봉헌하는 거룩하고 의로운 사람이라는 겁니다.
이 바리사이는 자신이 의롭다고 여기기에, 지금 그에게는 부족하거나 아쉬운 것이 하나도 없기에, 그에게는 딱히 하느님이 필요치 않습니다. 세상에서 고통과 시련을 겪는 작고 약한 이들에게는 하느님만이 유일한 희망이자 주님이시기에 간절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으며 그분의 은총과 보호를 구하지만, 재물과 권력 모두를 가진 이 바리사이는 그것들에 기대고 의지하기에 간절하게 하느님을 찾지 않는 겁니다. 그런 그에게 하느님은 자신의 거룩함과 의로움을 드러내주는 ‘수단’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요. 즉 그 자신이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 이들이 보이는 특징은 자신의 주관적인 기준을 가지고 이웃을 함부로 판단한다는 점입니다. 그가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의 전반부에서 그런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 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기도라는 형식을 취하고는 있지만, 말로는 하느님께 ‘감사’드린다고 하고 있지만, 그의 말에서는 의롭고 거룩한 사람인 자신이 죄를 지어 부정해진 저들보다 우월하다는 마음가짐이, 그 우월의식을 바탕으로 이 세상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웃 형제들을 무시하고 깔보며 심지어 ‘죄인’ 취급하는 교만과 독선이 묻어나는 겁니다.
그런 바리사이처럼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려는 태도 자체를 버려야 합니다. 나를 다른 사람과 비교해봐야 얻을 수 있는 건 둘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나보다 못났다고 여겨지는 이들을 보며 교만에 빠지거나 혹은 나보다 잘났다고 여겨지는 이들을 보며 시기와 질투, 절망에 빠지거나… 하느님의 참된 자녀는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과 자신을 비교하며 그분을 닮기 위해, 그분을 닮은 거룩하고 의로운 존재가 되기위해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해 노력할 뿐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세리가 기도하는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는 전능하고 거룩하신 하느님에 비추어 자신이 얼마나 부족하고 연약하며 비천한 존재인지를 너무나 잘 알았기에 감히 그분 앞에서 당당하게 서 있을수도, 그분을 뵙기 위해 고개를 들 수도 없었습니다. 그저 하느님께서 은총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며 그분께 자신을 온전히 의탁할 뿐이었지요. 그 결과 하느님을 닮은 거룩하고 의로운 존재로 변화될 수 있었던 겁니다. 기도는 하느님을 설득하여 내가 원하는 걸 얻어내기 위해 하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기 위해, 그분 뜻에 철저히 순명하며 따르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그런 참된 기도만이 우리를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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