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GOOD NEWS 게시판

검색
메뉴

검색

검색 닫기

검색

오늘의미사 (자) 2025년 12월 4일 (목)대림 제1주간 목요일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하늘 나라에 들어간다.

가톨릭마당

sub_menu

우리들의 묵상ㅣ체험
12월 3일 수원교구 묵상기도_ 송영진 신부님

186638 최원석 [wsjesus] 스크랩 2025-12-03

송영진 신부님_<메시아 예수님은 ‘착한 목자’이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거기에서 갈릴래아 호숫가로 옮겨

 

가셨다. 그리고 산에 오르시어 거기에 자리를 잡고

 

앉으셨다. 그러자 많은 군중이 다리 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 못하는 이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가왔다.

 

그들을 그분 발치에 데려다 놓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그리하여 말 못하는 이들이 말을

 

하고 불구자들이 온전해지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눈먼 이들이 보게 되자, 군중이 이를 보고

 

놀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 광야에서 이렇게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일 만한 빵을 어디서 구하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하시자, 그들이 ‘일곱 개가 있고 물고기도 조금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땅에

 

앉으라고 분부하셨다. 그리고 빵 일곱 개와 물고기들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에

 

가득 찼다(마태 15,29-37).”

 

 

 

1) 29절-31절의 이야기는, 11장의 이야기에 연결됩니다.

 

“요한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마태 11,2-6)”

 

예수님께서 병자들과 장애자들을 고쳐 주신

 

일은, ‘예수님은 메시아’ 라는 것을 드러내는 표징입니다.

 

 

 

2) 예수님께서 병자들과 장애자들을 고쳐 주신 이야기는,

 

실제로 그들을 고쳐 주셨음을 증언하는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메시아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나타내는

 

하나의 ‘상징’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이야기입니다.

 

‘병자들과 장애자들’은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소외되어

 

있는 사람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또 ‘눈먼 이들’은 하느님 나라와 구원을 희망하지만 어디로

 

가야할지를 몰라서 방황하는 사람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다리 저는 이들’은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가고 싶어 해도

 

여러 가지 이유로 힘이 부족해서 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어떤 특정 계층이나 특정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메시아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인류 전체가

 

어디를 향해서 가야 할지 모르고 있었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다 ‘눈먼

 

이들’이었고, ‘다리 저는 이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이 말에 대해서 “너무 지나친 말이다.” 라고

 

반박할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하느님 나라와 구원을

 

모르거나 찾지 못하는 것은 눈이 먼 것과 같고, 그 나라를

 

향해서 못 가거나 안 가는 것은 다리를 저는 것과 같습니다.

 

 

 

3) ‘빵의 기적 이야기’도 실제로 일어난 기적을

 

증언하는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상징’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이야기입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들이 ‘힘이 부족해서’ 하느님 나라까지 가지

 

못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신 말씀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에 잘 도착할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먹고사는 일이 너무 힘들거나, 몸의 병이 너무 심하면,

 

믿음과 희망이 흔들리다가 힘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에게 가서 믿음이 부족하다고

 

꾸짖기만 하거나, 더욱 굳게 믿으라는 ‘말’만 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형제애 실천은 ‘말’로만 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실질적인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야고 2,15-16).

 

그런 점에서 36절의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라는 말은,

 

그냥 지나치면 안 되는 중요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적의 빵’을 사람들에게 직접

 

주시지 않고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그 빵을 받아서 사람들에게 주었는데,

 

그 일은 교회가(신앙인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가르침이 됩니다.

 

신앙인은 이웃을 위해 주님께 청하는 사람이고,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사람입니다.

 

 

 

4) 앞의 9장에,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마태 9,36).” 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가엾게 여기셔서, 목자가 되어 주려고

 

오신 분이고,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일과 병자들과

 

장애자들을 고쳐 주신 일은 ‘목자로서’ 하신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냥 목자가 아니라,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는 ‘착한 목자’이신 분입니다(요한 10,11).

 

우리는 그것을 믿어야 하고, ‘착한 목자’에게 순종하는

 

‘착한 양’이 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출처] 대림 제1주간 수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이병우 신부님_"저 군중이 가엾구나."(마태15,32ㄱ) 

 

'우리도 다시 살아나자!' 

 

오늘 복음(마태15,29-37)은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사천 명을 먹이시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많은 병자들을 예수님께 데려다 놓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모두 고쳐주십니다. 이를 보고 많은 군중이 놀라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당신을 따르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을 드러내십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마태15,32) 예수님께서는 빵 일곱 개와 물고기로 사람들을 모두 배불리 먹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 이분의 구원으로 우리 기뻐하고 즐거워하자."(이사25,8.9ㄷ) 

 

오늘 독서와 복음!

이것이 바로, '메시아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는 이유이며, 우리가 예수님을 기다리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이며, 예수님을 따라가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복음이신 예수님을 이 세상에 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오늘은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와 함께 선교의 수호자로 선포되신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은 이 복음적 기쁨과 즐거움을 온 세상에 전하고자, 고향 스페인을 떠나 인도와 일본을 향해 오셨고, 중국을 향해 가시다가 선종하셨습니다. 

 

대림시기는 우리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시기 위해 오시는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가슴 벅찬 시기입니다. 

 

늘 함께하는 우리의 나약함을 자비로우신 하느님 자비에 내맡겨드리고, 죄인들의 구원과 상처 입은 이들의 구원을 위해 오시는 예수님께로 나아가 다시 살아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 2역대24,27) 

 

 

 

전삼용 신부님_은총을 원한다면, 주님께 당신을 ‘공들일 시간’을 드리십시오 

 

미하엘 엔데의 명작 소설 『모모』에는 사람들의 시간을 훔쳐가는 '회색 신사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시가를 피우며 바쁘게 사는 현대인들에게 속삭입니다.

"시간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멍하니 있는 시간, 부모님을 돌보는 시간, 친구와 수다 떠는 시간을 줄여 시간저축은행에 맡기십시오.

그러면 부자가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말에 속아 미친 듯이 바쁘게 살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 부자는 되었지만, 그들의 삶은 회색빛으로 변해갑니다.

삭막하고, 짜증이 늘고, 눈빛은 죽어갑니다.

시간을 아꼈는데, 정작 '삶'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반면 고아 소녀 모모는 가진 것이라고는 '시간'뿐입니다.

그녀는 사람들이 찾아오면 시계를 보지 않고

하염없이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줍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함께 머물러 주는(Stay)' 그 시간 속에서, 다투던 사람들은 화해하고, 지친 사람들은 용기를 얻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기적은 바쁜 효율성 속에 있지 않습니다.

모모처럼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낭비하는 시간 속에 숨어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날 우리는 모두 회색 신사들에게 영혼을 저당 잡힌 채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숏폼(Short-form) 영상의 15초도 지루해서 넘겨버리는 '초가속의 시대'입니다.

뇌는 끊임없는 자극에 중독되어, 잠시도 멈추지 못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최근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도파민 디톡스'나 '멍때리기 대회', 심지어 돈을 내고 독방에 갇히는 '감옥 호텔'과 '템플 스테이'가

유행입니다.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자유를 얻기 위해 돈을 내고 자신을 가두어야 하다니요.

이것은 우리 영혼이 비명을 지르며 "제발 좀 멈춰라, 비우고 싶다"고 호소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오늘 복음의 장면은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예수님을 따라나선 군중들은 광야에서 무려 '사흘'을 머물렀습니다.

먹을 것이 떨어진 줄도 모르고, 집으로 돌아갈 생각도 잊은 채,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 안에 푹 잠겨 있었습니다.

그들은 육체의 배고픔보다 영혼의 허기가 더 컸기에, 예수님 곁에 머무는 그 시간을 낭비라 여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들을 보시고 마음이 움직이셨습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마태 15,32).

여기서 "가엾다(Splanchnizomai)"는 말은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애끓는 사랑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지나가는 구경꾼이 아니라, 당신 곁에 머물며 시간을 내어드린 이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십니다.

빵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군중들이 예수님께 바친 '사흘'이라는 시간의 열매였습니다. 

 

구약 성경 열왕기 하권에는 이 원리를 명확히 보여주는 예화가 있습니다.

남편을 잃고 빚더미에 앉은 한 과부가 엘리사 예언자에게 호소합니다.

엘리사는 그녀에게 묻습니다.

"집에 무엇이 있느냐?" "기름 한 병뿐입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묘한 지시를 내립니다.

"이웃들에게 가서 '빈 그릇'을 빌려 오시오.

조금 빌리지 말고 되도록 많이 빌려 오시오.

그리고 문을 걸어 잠그고 그 빈 그릇들에 기름을 부으시오."(2열왕 4,3-4). 

 

여인이 빈 그릇을 빌려와 기름을 붓자, 작은 병에서 기름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와 모든 그릇을

채웠습니다.

그런데 아들에게 "그릇을 더 가져오너라"고 했을 때 아들이 "더 이상 빈 그릇이 없습니다" 라고 하자, 그 순간 기름은 멈추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기름)은 무한하지만, 그것을 담을 우리의 '빈 그릇(시간/공간)'이 없으면 흐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바빠서 마음의 빈 그릇을 준비하지 않으면, 하느님은 주실 수가 없습니다.

기적은 하느님의 능력이 부족해서 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께 내어드릴 '빈 시간'이 없어서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신비는 역설적입니다.

채우려고 애쓰면 비게 되고, 비우려고 애쓰면 채워집니다. 

 

우리가 나를 고독으로 내어드릴 때, 그분은 '친구'로 다가오십니다.

나를 침묵으로 내어드릴 때, 그분은 생명의 '말씀'으로 다가오십니다.

나를 단식(배고픔)으로 내어드릴 때, 그분은 영원한 '양식'으로 오십니다.

그리고 나를 철저한 무(Nothing)로 내어드릴 때, 그분은 나의 전부(Everything)가 되어 오십니다. 

 

우리가 그분이 오실 자리를 마련해드리고 싶다면, 그분께서 우리를 가꾸시고 공들일 수 있는 '시간의 빈 그릇'을 마련해드려야 합니다.

꽉 찬 그릇에는 아무것도 담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 여우는 이 비밀을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네 장미꽃을 그토록 소중하게 만든 건, 네가 그 꽃을 위해 공들인(낭비한) 그 시간 때문이야."

우리가 성체 조배실에 앉아 있는 시간, 묵주기도를 바치는 그 시간은 세상의 눈으로 보면 낭비입니다.

생산성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빈 시간'을 주님께 봉헌할 때, 주님께서는 바로 그 시간에 우리 영혼의 밭을 가꾸십니다.

잡초를 뽑고, 물을 주며, 우리를 당신의 '소중한 장미'로 만들어 가십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위해 시간을 '낭비'할 때, 주님께서는 그 시간을 재료 삼아 여러분의 인생을 기적으로 바꾸실 것입니다.

밥보다 말씀이 고파 사흘을 견딘 군중처럼, 우리도 주님 곁에 빈 마음으로 머무릅시다.

주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굶겨서 돌려보내지 않으실 것입니다. 아멘. 

 

 

 

 

 

조욱현 신부님_복음: 마태 15,29-37: 많은 병자를 낫게 하시고, 빵의 기적을 베푸심. 

 

 

오늘 복음은 두 가지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하나는 병든 이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치유를 받는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군중이 굶주렸을 때 예수님께서 빵을 나누어 먹이시는 기적이다. 이 두 사건은 단순한 기적의 나열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계시하는 표징이다. 병자들은 단순히 예수님의 능력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산에까지 힘겹게 올라가 그분 발치에 머문다. 이것은 신앙의 행위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믿음은 발이다. 믿음으로 우리는 예수님께 나아간다.”(In Ioannis Evangelium Tract 21,1) 말했다. 그들의 신체적 장애에도 불구하고 발치에 다다른 것은 바로 믿음으로 걸어온 길이었다. 

 

예수님은 군중을 보시며 “저 군중이 가엾구나.”(32절) 말씀하신다. 여기서 쓰인 동사는 헬라어 σπλαγχνίζομαι인데, 이는 내장이 끊어질 듯한 깊은 연민을 뜻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를 두고 “그리스도의 동정심은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어머니가 자식을 품듯 가슴 깊은 사랑”(Homiliae in Matthaeum 52,2)이라고 설명했다. 

 

군중에게 빵을 나누어 주신 사건은 모세 시대의 만나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빵은 그보다 더 크고 영원한 은총의 표징이다. 성 예로니모는 “광야에서의 빵은 육신을 살렸지만,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신 빵은 영혼을 살리는 것이다.”(Commentarii in Matthaeum 15,33.) 말한다. 또한 성 암브로시오는 이 기적을 성체성사와 연결하며 “주님께서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린 후 제자들에게 주신 것은 교회가 오늘날 성체성사 안에서 행하는 바로 그 신비의 원형”(De Sacramentis IV,5,23)이라고 가르쳤다. 

 

교회는 이 기적을 단순히 역사적 사건으로만 이해하지 않고, 성체성사의 예표로 보아 왔다. 교리서도 이렇게 가르친다.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신 이 사건은 성체성사를 예표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 주셨다.”(1335항) 예수님의 자비는 차별이 없었다. 병자이든, 가난한 이든, 배고픈 이든, 모두를 품으셨다. 대림 시기를 사는 우리는 주님의 자비를 단순히 묵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분의 자비를 삶 안에서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말처럼 “성찬례에서 받은 그리스도의 몸을 모독하지 않으려면, 먼저 길거리에서 굶주린 이들의 몸을 돌보라.”(Homiliae in Matthaeum 50,3).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치유하시는 분, 먹이시는 분, 자비로우신 분임을 드러낸다. 대림은 그분을 기다리는 시간이다. 우리가 그분을 진정으로 맞이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도 병든 이웃을 돌보고, 굶주린 사람을 먹이며, 자비를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때 비로소 우리도 주님과 함께 산 위에 머물며, 그분이 주시는 참된 생명의 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아멘!

 

 

 

김건태 신부님_기도를 위한 마음의 자세

 

대림시기 1-2주간에는 제1독서로 예언자 이사야의 말씀을 접하게 되는데, 온통 희망을 주제로 하는 말씀들입니다. 오늘 독서 말씀은 죽음의 경계선을 뛰어넘고자 하는 우리의 바람, 비탄과 고통으로 손상되지 않는 삶을 살고자 하는 우리의 소망을 밝혀 줍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또한 모든 치욕이 사라지고 난 다음, 온전한 품위를 지니고 살아가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접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희망과 약속이라는 주제를, 예언자적인 예고 방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현실적인 구현 방식을 통해서 되풀이합니다. 예언 말씀이 예수님 안에서 완성되고 있음을 선포하는 듯합니다: “그들을 그분 발치에 데려다 놓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주셨다”, “예수님께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한편, 우리는 군중들과 제자들 사이에서 대조적인 모습을 발견합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를 고쳐 주시는 기적을 행하시는 데에는 군중들의 몸짓이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들이 병자들을 주님 앞에 데려다 놓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복음서 다른 곳에서도,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치유하실 때마다, 이 사람들은 자주 등장합니다. 안타까운 처지에 있던 병자들도 병자들이지만, 분명 예수님께서는 이 선한 사람들의 마음을 보시고 흔쾌히 치유의 은사를 허락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계산에 빠져, “빵을 어디서 구하겠습니까?” 하는 이의 제기로 응수합니다. 병자들을 치유하시는 그분의 능력을 방금 목격했으면서도, 아직도 믿음이 부족했거나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 하신 주님의 마음을 제대로 읽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병을 치유할 능력도, 빵을 많게 할 능력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모든 책임을 면제해 주는 근거가 될 수 없음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병자들을 위해,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최소한 주님께 기도하고 함께하려는 모습, 가진 것만이라도 내놓고 나누려는 자세만큼은 양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대림시기는 주님 구원 약속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이루어지리라 희망하는 시기입니다. 그러나 그 희망이 우리만의 것이 아니라, 보편적 희망이 되도록, 우리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살피고, 가지고 있는 것들을 나누는 자세를 앞세워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분명, 이러한 우리의 어여쁜 모습을 보시고, 다 고쳐 주시고, 다 배불리 먹게 해주실 것입니다.

오늘 하루, 기도를 올리기에 앞서 주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시리라는 믿음으로 병자들을 데려오고 가지고 있는 것을 우선 내놓는 자세를 앞세우며, 다 고쳐 주시고 다 배불리 먹게 해주기 위해 오시는 주님을 준비하는, 복된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1 62 1

추천  1 반대  1 신고  

TAG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로그인후 등록 가능합니다.

0 / 500

이미지첨부 등록

더보기
리스트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