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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자) 2025년 12월 5일 (금)대림 제1주간 금요일예수님을 믿는 눈먼 두 사람의 눈이 열렸다.

가톨릭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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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ㅣ체험
12월 4일 신부님 묵상 및 병자를 위한 기도

186653 최원석 [wsjesus] 스크랩 2025-12-04

김건태 신부님_듣고 실천에 옮기는 삶

 

오늘 우리는 마태오 복음저자가 ‘그리스도인 삶의 헌장(憲章)’으로 자리한 예수님의 고귀한 가르침들을 모아 놓은 산상설교라는 대단원의 결어 부분을 들었습니다. 마태오는 예수님의 이 가르침에 “군중은 몹시 놀랐다.” 하는 반응과 함께, “그분께서 자기들의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라고 부언합니다(7,28-29).

 

오늘 예수님은 바위 위에 집을 지으라고 이르십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 복음에서 우리는 들음과 실천에 옮김이라는 주제를 자주 접합니다. 들음, 곧 해야 할 일을 아는 것과, 그렇게 안 것을 실천에 옮기는 삶이 곧 바위 위에 집을 짓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해야 할 일을 분명하게 알지 못할 때, 우리는 자신감을 잃고 망설이거나 헤매는 삶, 보람과 거리가 먼 삶을 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이 어떠하고, 살아가는 방법이 어떠하든, 어찌 보면 우리의 삶은 크고 작은 결심의 연속이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이 결심이 깊은 기도를 통해 찾아낸, 다시 말해서 주님의 뜻에 맞는 숙고의 결실이 아니라면, 결국 우리는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한편, 이 결심이 숙고의 결과라 하더라도, 결심한 바를 실천에 옮기지 못한다면, 이 또한 모래 위에서 만족하는 삶에 불과할 것입니다. 사실은 바로 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 실존의 가장 취약한 부분이 숨어 있습니다. 결심의 내용은 꽤 괜찮아 보이는데, 남들이 인정하고 성원하는 결심인데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결심 그 자체로 머무는 삶을 말합니다.

 

물론, 결심했다고 해서 그대로 바로 실천에 옮길 수 없는 경우가 있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아무리 좋은 결심이라도,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대로,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 악표양이 되는 것은 아닌지 꼭 따져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결심이라면 포기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의 또 다른 위대한 행위임을 사도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는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새로운 한 해를 열면서, 무엇보다 먼저 오시는 주님 맞이에 나서면서, 세운 작은 결심들을 하나씩 이루어나가는 가운데, 아기 예수님과 함께 성탄하는 기쁨과 영광을 향해 힘껏 달려 나가는, 보람 있는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복음: 마태 7,21.24-27: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21절) 말씀하신다. 곧 입술로만 주님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을 우리의 삶 안에서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이를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에 비유하신다. 반면 말씀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이는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에 비유된다. 비와 강물과 바람은 인생의 수많은 시련과 유혹을 상징한다. 그러나 반석이신 그리스도 위에 사는 이는 어떠한 어려움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초대 교부들은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신앙생활의 핵심으로 삼았다. 오리게네스는 반석을 “그리스도 자신이며, 그 위에 세워진 집은 인간 영혼”(Comment. in Matthaeum XII, 11)이라고 설명한다. 그리스도라는 기초 위에 세워진 삶은 어떤 풍랑에도 무너지지 않는다. 아우구스티노는 단순히 ‘주님’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삶 속에서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분의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 이는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자와 같다.”(Sermo 179,7)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누구도 흔들 수 없는 요새와 같다.”(Hom. in Matth. XXIV, 2) 가르친다. 치프리아노는 교회의 차원에서 이 말씀을 해석하며, “교회가 그리스도라는 반석 위에 세워졌기에 박해에도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De unitate ecclesiae 4) 말한다. 

 

교회는 일관되게 말씀의 실천을 구원에 이르는 길로 가르쳐 왔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믿음은 행위와 결합하여야 하며, 살아있는 믿음은 사랑으로 활동한다고 선언한다(D 1532). 계시 헌장도 신자들에게 “말씀을 삶 속에서 실천하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삶의 기초를 세우라.”(21항) 가르친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듣는 신앙’에서 ‘사는 신앙’으로 나아가라고 초대한다. 반석 위에 집을 짓는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 위에 우리의 삶을 세우는 것이다. 반대로 모래 위에 집을 짓는다는 것은 자기 욕망과 세상의 기준 위에 삶을 세우는 것이다. 신앙은 단지 “주님, 주님”이라고 외치는 입술의 고백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오늘 지금 이 자리에서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고 실천할 때, 곧 행동으로 옮겨질 때 완성된다. 그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닮아가며, 주님을 우리 안에 모시고, 대림 시기의 은총 안에서 주님을 새롭게 탄생시키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삶 속에서 실천할 때,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반석 위에 세워진 집처럼 된다. 그리스도라는 기초 위에 굳건히 서 있는 삶, 바로 이것이 하늘나라를 향한 참된 길이다. 대림 시기를 지내며, 우리 삶의 기초를 다시금 점검하고, 주님의 말씀 위에 굳건히 세우는 은총을 청하여야 할 것이다. 아멘! 

 

전삼용 신부님_성경 공부법: 말씀이 감정이 되게 

 

 

포탄이 빗발치는 전쟁터, 흙구덩이 참호 속에 한 병사가 웅크리고 있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공포 속에서 그는 떨리는 손으로 아내에게 편지를 씁니다.

종이에는 흙탕물과 피가 묻어 있고, 글씨는 삐뚤빼뚤합니다.

"여보... 나능 당싱을 사랑하오.

꼭 살아서 도라가겟소." 

 

이 편지를 받은 아내가 책상에 앉아 빨간 펜을 꺼내 듭니다.

그리고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어머, '사랑'이 아니라 '사랑'이지.

그리고 '돌아가겠소'의 받침도 틀렸네.

남편은 국어 공부를 좀 더 해야겠어." 만약 이런 아내가 있다면, 그녀는 제정신입니까?

아니면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까?

진짜 사랑하는 아내라면 맞춤법이 아니라, 그 글자에 묻은 남편의 눈물과 핏자국을 보며 오열했을 것입니다. 

 

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성경을 분석만 하는 신학자들을 향해 이렇게 일갈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연애편지(성경)를 받고서, 그 문법과 문장 구조만 분석하고 있는 사람은 바보다." 

 

우리는 성경을 공부한다고 하면서, 정작 그 말씀을 쓰신 하느님의 마음은 외면한 채 지식의 유희만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텍스트를 분석하는 차가운 머리로는 결코 하느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말씀이 내 삶을 바꾸려면, 그 말씀이 내 머리를 지나 '가슴(감정)'을 때려야 합니다.

루카 복음에 나오는 자캐오와 부자 청년을 비교해 보십시오.

부자 청년은 예수님과 영원한 생명에 대해 신학적인 토론을 했습니다.

그는 계명을 다 지켰다는 자부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진 것을 팔아라"는 말씀 앞에서 그는 계산기를 두드렸습니다.

손익을 따지느라 슬퍼하며 떠났습니다.

머리는 알았지만 가슴이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자캐오를 보십시오.

그는 토론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시고 집에 머무시겠다는 그 파격적인 사랑에 '감동(Emotion)'했습니다.

그 기쁨이 가슴을 치고 올라오자 계산기가 고장 나버렸습니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재산을 내놓습니다. 이것이 감정의 힘입니다.

사랑에 빠진 감정만이 계산을 뛰어넘어 우리를 행동하게 만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한다고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주님, 주님' 하고 부르는 것은 입술의 고백이요, 지적인 동의입니다.

그러나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은 '실행'입니다. 그렇다면 지식에서 실행으로 건너가는 다리는 무엇입니까? 바로 '감정'입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주인공 오스카 쉰들러를 기억하십니까?

그는 나치 당원이자 냉철한 사업가였습니다. 그에게 유대인은 공장을 돌리는 부속품, 즉 '비용과 이익'의 대상일 뿐이었습니다.

그가 변한 것은 어느 날 언덕 위에서 학살 현장을 내려다보았을 때였습니다.

흑백의 참혹한 현장 속에서, 그는 유독 눈에 띄는 '빨간 코트를 입은 어린 소녀'를 봅니다. 소녀가 시체 더미 속에 숨는 것을 본 순간, 쉰들러의 마음속에서 '노동력'이라는 계산이 사라지고 '인간에 대한 연민'이라는 뜨거운 감정이 폭발합니다.

"저 아이는 내 딸일 수도 있다." 그 슬픔과 아픔이 그를 움직였고, 그는 전 재산을 뇌물로 써가며 1,200명의 유대인을 구해냈습니다.

지식은 사람을 평가하지만, 감정은 사람을 살립니다. 

 

천재 수학자 블레즈 파스칼은 평생을 논리와 이성으로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결정적으로 하느님을 만난 것은 1654년 11월 23일 밤, 2시간 동안의 강렬한 신비 체험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는 그날 밤의 전율을 양피지에 적어 옷깃에 꿰매고 다녔습니다.

"철학자와 학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의 하느님. 확신, 감격, 기쁨, 평화." 그는 자신의 저서 『팡세』에서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심정(Cœur)은 이성이 알지 못하는 그들만의 이유를 가지고 있다."

하느님은 철학적 사유의 대상이 아니라, 심장이 뛰는 감각으로 만나는 분입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신앙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그들의 뇌가 커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나중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루카 24,32). 

 

마음이 타오르자, 그들은 피곤함도 잊고 밤길을 달려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가슴이 뜨거워져야 손발이 움직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지식으로 저장하지 마십시오.

"이 말씀이 나를 향한 하느님의 피 묻은 연애편지구나!"라고 느끼십시오.

그 사랑에 감동하여 울컥할 때, 그 감정이 여러분을 실천의 자리로, 반석 위의 집으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아멘. 

 

이병우 신부님-"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하나인 믿음과 실천(삶)!' 

 

오늘 복음(마태7,21.24-27)은 '주님의 뜻을 실천하여라.'는 말씀과 '내 말을 실행하여라.'는 말씀입니다. 

 

'마태오복음 7장 21절의 말씀'은 지금의 나의 성소를 있게 해 준 말씀입니다. 저의 신앙은 증조부로부터 시작된 '모태신앙'입니다. 신앙생활을 해 오면서 제일 먼저 뜨겁게 다가온 말씀이었고, 이 말씀을 실행하는 것이 저에게 큰 기쁨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일반 대학교를 졸업하고 늦은 나이(32살)인 1995년에 수도자의 길, 사제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복음을 그대로 사는 것이 전부였던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걸어갔던 길을. 

 

그러다가 2019년에 마산교구로 이적해서 지금은 교구 사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구로 이적하려는 마음을 갖게 해 준 말씀도 '마태오복음 7장 21절의 말씀'입니다. 보다 더 복음적 자유 안에서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 걸어가고 싶었고, 예수님의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 저의 마음을 주님께서 들어 주셨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 이렇게 서 있다고 생각합니다. 

 

쉽지 않은 사제의 길, 말씀 안에서, 끝까지 '마태오복음 7장 21절의 말씀'을 실행하려고 애쓰는 사제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도 '단순하게 그리고 겸손하게'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려고 애쓰는 하느님의 자녀들, 그래서 지금부터 하느님의 나라 안에 들어가는 복된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야고2,14.17.26) 

 

(~ 2역대28,15) 

 

송영진 신부님_<‘믿음’이란, ‘믿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마태 7,24-27).”

 

 

 

1)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실 때,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마태 23,3).

 

그들은 자기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믿음이 더 깊고,

 

하느님을 더 잘 섬긴다고 주장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실제 삶이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을 꾸짖으셨습니다.

 

실천 없는 말은 ‘빈말’이고, ‘거짓말’입니다.

 

‘낙타와 바늘구멍 이야기’에 나오는 젊은이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젊은이가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하고 다시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마태 19,20-22).”

 

그 젊은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원했고, 그 생명을 얻는

 

방법을 알고 싶어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마태 19,16).

 

예수님께서는 친절하게 그 방법을 알려 주셨는데,

 

그 젊은이에게는 그것을 실행할 의지도, 간절함도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을 알고 있어도 그 길을 실제로

 

걸어가지 않으면, 또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알고

 

있어도 그 방법을 실제로 실행하지 않으면,

 

알고 있다는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구원의 진리’는 ‘아는 것’보다 ‘행하는 것’이

 

더 중요한 진리입니다.

 

<행하지 않는 것은, 진리를 ‘모르는 것’입니다.>

 

여기서 ‘실행하다.’를 ‘삶으로 실천하다.’,

 

또는 ‘실제로 그렇게 산다.’로 바꿔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믿음’이란, ‘믿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신앙과 생활이 하나로 일치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만일에 생활이 신앙과 완전히 다르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이 아니고, 신앙도 아닙니다.

 

신앙인은 ‘믿는 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2) ‘회개’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세례를 받으러 오는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을 이렇게 꾸짖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마태 3,7-8).”

 

이 말은, “하느님의 심판이 무서워서 억지로 하는 회개는,

 

또 형식적으로 하는 회개는 회개가 아니다.

 

진심으로 회개하여라. 또 ‘겉으로만’ 회개하는 척 하지 말고,

 

삶으로 실천하는 진짜 회개를 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루카복음에는 그 ‘실천’이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루카 3,11.13.14).”

 

‘회개’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한 후의 삶’은 ‘회개 전의 삶’과

 

분명히 달라야 합니다.

 

회개하고 있다고 말하는데도 그 삶에 아무런 변화가 없으면,

 

그것은 ‘거짓 회개’입니다.

 

<우리 교회는 성탄절 전과 부활절 전에 고해성사를 보는

 

‘판공성사’를 시행합니다.

 

그런데 만일에 ‘고백’이라는 형식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고백 전의 통회와 정개를 잊어버리거나 무시하거나

 

소홀히 한다면, 그 고해성사는 거짓 회개가 되어버리고,

 

성사모독죄를 짓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형식이 아니라, 마음과 삶의 변화가 중요합니다.>

 

 

 

3)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에 관한

 

말씀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나오는

 

‘돌밭’에 관한 말씀에 연결됩니다(마태 13,5-6.20-21).

 

‘주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것’은, 신앙생활의 ‘뿌리’입니다.

 

집을 모래 위에 지어서 기초가 없는 것과

 

씨가 뿌리를 내리지 않는 것은 ‘같은 상황’이고,

 

집이 무너지는 것과 씨가 말라죽는 것은 ‘같은 일’입니다.

 

평소에 ‘실천’은 하지 않고 믿는다는 말만 한 사람은,

 

환난이나 박해를 만나면 금방 신앙을 버립니다.

 

외부의 압박에 대한 저항력과 인내심은

 

실천하는 신앙생활에서 생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 강물, 바람을 ‘주님의 심판’으로 생각할 수도 있고,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을 하느님 나라의 ‘안에’ 자기 집을

 

마련하는 것으로, 또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을 하느님

 

나라의 ‘밖에’ 집을 짓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크고 멋있고 좋은 집을 지어도, 하느님 나라의

 

‘밖에’ 집을 짓는 것은 ‘헛되고 허무한 일’이 될 뿐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는 ‘그날’이 오면, 하느님 나라의

 

‘밖에 있는 것들’은 모두 영원히

 

소멸될 것이기 때문입니다(묵시 21,1).>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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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림 제1주간 목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병자를 위한 기도 

 

○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앓는 사람에게 강복하시고

 

    갖가지 은혜로 지켜 주시니

 

    주님께 애원하는 저희 기도를 들으시어

 

    성직자분들, 모든 병고로 시달리시는 분들, 돈이 없어서 병원을 찾기 어려운 우리 주변의 불쌍한 환우들의 병을 낫게 하시며

 

    건강을 도로 주소서.

 

● 주님의 손으로 일으켜 주시고

 

    주님의 팔로 감싸 주시며

 

    주님의 힘으로 굳세게 하시어

 

    더욱 힘차게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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