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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녹) 2026년 1월 19일 (월)연중 제2주간 월요일신랑이 혼인 잔치 손님들과 함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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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ㅣ체험
1월 18일 수원 교구 묵상

187480 최원석 [wsjesus] 스크랩 2026-01-18

김건태 신부님_하느님의 어린양

[말씀]

 

■ 제1독서(이사 49.3.5-6)

 

바빌론 유배시기(기원전 597/587-538년) 동안 유다인들은 늘 해방과 조국으로의 귀환을 꿈꿨으며, 이때 기원전 8세기에 활동했던 예언자 이사야의 정신을 계승한 한 예언자, 흔히 제2이사야라 불리는 예언자가 나타나 고대하던 해방을 예고합니다. 그러나 예언자는 이 해방이 강력한 임금에 의해서가 아니라, ‘종’이라 불리는 존재에 의해 이루어질 것임을 선언하며, 그 종의 모습을 소개합니다. 이 종은 주님의 은총을 충만히 받아 온 세상에 구원을 이루실 분입니다.

 

■ 제2독서(1코린 1,1-3)

 

바오로는 57년경 파스카 축제에 즈음하여 코린토 신자들에게 편지를 써 보낼 때,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로 소개하며,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었음을 밝힙니다. 사도 바오로는 오로지 이 직함을 통하여 그리스도교 공동체, 그리스도 예수를 구세주로 고백하며 받들어 섬기는 공동체에 개입합니다. 교회의 모든 생활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중심으로 펼쳐질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교회를, 교회를 통해 세상을 “하느님 우리의 아버지”께로 인도하실 분이기 때문입니다.

 

■ 복음(요한 1,29-34)

 

1세기 말경 복음저자 요한은, 세례자 요한을 기억 속에 담고 있던 유다교 공동체에 세례자 요한의 모든 삶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있었음을 상기시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 곧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기” 위해 희생되실 분으로 알아보았으며, 끝내 그분에게 세례를 베푸는 가운데 성령의 인도를 받아 그분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고백합니다.

 

[새김]

 

대통령, 국회의원, 도지사, 시장 등등 국가와 사회를 책임지고 이끌어갈 지도자를 투표로 선택할 때, 우리는 그들의 정책이나 능력을 잘 모르거나 이해를 하지 못해 혼란스러울 때가 참 많습니다. 시대가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사회는 그만큼 더 복잡해질 것이기에, 이 문제는 앞으로도 우리를 더욱 힘들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계획하시고 마련하신 새 세상에는 더는 이런 문제가 없습니다. 이 세상을 책임질 사람을 당신이 몸소 선택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첫 사람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며, 다음으로는 그리스도께서 직접 선택하실 사람들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메시아로 선포했던 예수님은 그때까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분은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사람들에 의해 뽑힌 인물이 아닙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계획을 실현에 옮길 진정한 종, 누구도 체험하지 못한 경험을 가진 분으로 알아봅니다. 그분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느님의 뜻을 이 땅에 완벽하게 구현하실 분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나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분만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해야 할지 아시며, 그곳은 바로 하느님의 뜻이 있는 곳, 곧 구원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으며, 끝내 당신 자신을 십자가상 희생제물로 바쳐 그 뜻을 이루신 ‘하느님의 어린양’을 마음 깊이 모시며, 우리도 하느님의 뜻을 따라 세상의 구원을 위해 조금 더 기도하고 조금 더 희생하며 봉사하는, 거룩한 한 주간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복음: 요한 1,29-34: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1. 하느님의 어린양: 순명과 희생의 신비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어떠한 분이신지를 가장 간결하면서도 깊이 있게 드러낸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라고 증언한다. 이 한마디는 구약의 모든 희생 제사와 예언, 그리고 구원의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음을 드러낸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구절을 묵상하며 이렇게 말한다. “요한이 ‘하느님의 어린양’이라 부른 것은, 그분이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쳐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을 이기셨다.”(In Ioannis Evangelium Tractatus 4,8) 그리스도는 단순히 죄를 ‘용서’하신 분이 아니라, 죄 그 자체를 없애시는 분이시다. 이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존재의 변화를 의미한다. 하느님의 어린양은 단 한 번의 희생으로 인류 전체의 죄를 없애셨고,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시키셨다(히브 9,26-28). 

 

2. 어린양의 의미: 구약의 성취

 

‘어린양’의 표상은 구약성경 전반을 관통한다. 과월절 어린양(탈출 12장): 이스라엘 백성이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은 것처럼, 그리스도의 피로 인류는 죄와 죽음의 종살이에서 해방된다. 매일의 희생 제사로 봉헌되던 어린양처럼(탈출 29,38-46), 그리스도는 단 한 번의 희생으로 영원한 제사를 이루셨다(히브 10,10). 고통받는 야훼의 종으로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이사 53,7.12) 이사야의 예언은 예수님의 순명과 고난 속에서 완전히 실현되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희생제사의 그림자들을 하나로 모으시어, 단 한 번의 제사로 모든 제사를 완성하셨다.”(Homiliae in Ioannem 17,1) 즉, 과월절의 희생, 매일의 제사, 고난받는 종의 순명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결합된 것이다. 

 

3. 죄를 짊어지신 그리스도: 사랑의 봉헌

 

요한복음에서 “없애다.”는 단순히 제거한다는 뜻을 넘어, ‘짊어지다.’, ‘감당하다.’라는 의미가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그것을 없애셨다. 나지안즈의 성 그레고리오는 이 신비를 이렇게 해석한다. “그분은 나의 죄를 당신의 몸에 옮기셨다. 나의 불순함을 당신의 순수함으로 삼키셨다. 그리고 나를 새롭게 창조하셨다.”(Oratio 45,22) 이 희생의 절정은 요한복음 19장에 나타난다. “그 옆구리를 찌르니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34절) 이는 교회의 성사, 특히 세례와 성체의 근원을 상징합니다. 피와 물은 하느님의 은총이 세상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통로이며, 어린양의 죽음이 생명의 샘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4. 성령의 세례: 어린양의 선물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요한 1,33)으로 소개한다. 이 말씀은 단순한 예언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께서 교회에 성령을 보내심으로써 완성된 약속입니다(요한 20,22 참조). 성 암브로시오는 이렇게 가르친다. “성령은 어린양의 피로부터 나온다. 그 피로 씻겨진 자는 다시는 죄의 종이 아니다. 그는 자유인의 영을 받는다.”(De Spiritu Sancto II,5,41) 성령은 어린양의 희생을 현재 안에 실현하는 능력이다. 우리는 이 성령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로 변화되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 하나로 결합된다. 

 

5. 그리스도의 모상으로 살아가는 삶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의 모범을 우리에게 남기셨다. 그분을 닮는다는 것은 단순한 도덕적 본받음이 아니라, 그분의 희생적 사랑과 순명에 동참하는 것이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한다. “어린양이신 그리스도는 자신을 제물로 바침으로써 우리에게 사랑의 완전한 법을 가르쳐 주셨다. 우리도 그분 안에서 하느님께 향하는 희생 제물이 되어야 한다.”(S.Th. III, q.48, a.2 ad 3) ‘어린양’의 표상은 단순히 경건한 상징이 아니라, 우리 삶의 형식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구원은 자기 봉헌을 통한 사랑의 실천으로 드러나야 한다. 

 

6. 결론: 세상의 빛이 되신 어린양

 

야훼의 종이 “땅끝까지 구원이 미치게 하리라”(이사 49,6)는 말씀처럼,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민족을 위한 구원의 빛이 되셨다. 그리고 이제 그분의 제자들인 우리에게 그 빛을 비추어 세상 속에서 증언하라고 부르신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의 어린양은 세상에 평화를 주시는 분이다. 그분의 희생을 받아들이는 이는, 세상 안에서 평화를 짓는 사람으로 변화된다.”(Ecclesia de Eucharistia, 19) 우리는 이 어린양의 희생에 참여함으로써 세상의 죄와 어둠 속에서도 하느님의 자비와 구원을 드러내는 빛이 되어야 한다. 

 

전삼용 신부님_요한 1,29-34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어린양’이 되신 이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이게! 

 

찬미 예수님!

 

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아주 놀라운 증언을 합니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고 말입니다. 

당시 요르단 강가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오직 세례자 요한만이 예수님 위에 내린 성령을 보았습니다.

 

다른 이들은 그냥 지나가는 청년 예수, 혹은 목수 아들 예수를 보았을 뿐입니다.

 

왜 요한의 눈에만 보였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요한 안에 이미 성령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이 엘리사벳을 방문하셨을 때, 태중에 있던 요한은 성령으로 가득 차 기뻐 뛰놀았지요.

 

내 안에 있는 것이 밖에서도 보이는 법입니다. 

 

성령이란 무엇일까요? 신학적으로 복잡하게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오늘 아주 직관적으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성령은 바로 ‘하느님의 피’입니다.

 

피는 생명이고, 사랑이며, 희생의 결정체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피를 물려받기에 부모를 알아보고, 부모의 사랑을 본능적으로 느낍니다.

 

이 ‘피의 알아봄’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영화가 바로 『레인맨』입니다. 

 

주인공 찰리는 빚에 쪼들리는 자동차 딜러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유산을 독차지한 자폐증 형 레이먼드를 납치해 돈을 뜯어내려 합니다. 찰리에게 형은 그저 돈줄이자 짐짝, 말도 안 통하는 고장 난 인간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여행 도중, 호텔에서 찰리가 욕조에 뜨거운 물을 틀자 형 레이먼드가 발작을 일으키며 소리칩니다.

 

“뜨거운 물은 안 돼! 아기 찰리가 데어! 앗 뜨거, 앗 뜨거!”

 

찰리는 그 순간 얼어붙습니다. 어릴 적 자신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뜨거운 물에 데지 않도록 지켜주었던 상상 속의 친구 ‘레인맨’이 바로 이 형 레이먼드였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형은 바보가 아니었습니다.

 

기억 속에 묻혀있던 나의 수호천사였고, 나를 지켜준 핏줄이었습니다.

 

찰리가 형의 내면에서 ‘부모의 사랑’과 ‘형제의 피’를 발견한 순간, 그의 눈빛이 변합니다.

 

이제 형은 이용할 도구가 아니라, 내가 지켜줘야 할 소중한 형제가 됩니다.

 

형의 웅얼거림은 소음이 아니라 사랑의 언어가 됩니다. 

 

 

 

부모의 피가 내 안에 흐르고 있음을 자각해야 형제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게 하기 위해 당신 아버지의 피, 곧 성령을 쏟으러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 옛이야기 중에 무학대사와 태조 이성계의 일화가 있습니다.

 

하루는 이성계가 무학대사에게 농담을 던집니다. “오늘 대사를 보니 꼭 뚱뚱한 돼지 같소.”

 

그러자 무학대사는 웃으며 답합니다.

 

“제 눈에 임금님은 부처님처럼 보입니다.”

 

이성계가 의아해하자 대사가 말합니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이는 법입니다.” 

 

내 안에 부처의 마음이 있으면 세상이 부처로 보이고, 내 안에 욕심이 가득하면 세상이 돼지우리로 보인다는 뜻입니다.

 

우리 안에 ‘하느님의 피’인 성령이 흐르면, 세상 모든 사람 안에서 하느님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파스카의 신비입니다.

 

이집트 탈출 때,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가 발린 집은 죽음의 천사도 건드리지 못하고 지나갔습니다.

 

주인의 피가 묻어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 그분의 피가 우리 안에 흐르면, 우리는 서로를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상대방 이마에 묻은 하느님의 피를 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인간의 사랑과 피를 받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우크라이나의 ‘옥사나 말라야’ 사례를 봅시다. 1991년 발견 당시 8살이었던 옥사나는 알코올 중독자 부모에게 버림받아 3살 때부터 개집에서 개들과 함께 자랐습니다.

 

추운 겨울밤, 그녀를 안아준 것은 부모가 아니라 떠돌이 개들이었습니다.

 

그녀는 네 발로 기어 다니며 짖었고, 혀로 물을 마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녀의 시선입니다.

 

그녀는 자신을 개라고 생각했습니다.

 

‘개의 피(사랑)’를 받고 자랐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개라고 믿는 존재가 인간의 아기를 보면 어떻게 반응할까요?

 

사랑스러운 존재가 아니라, 그저 밥그릇을 두고 싸워야 할 서열 경쟁자로만 봅니다.

 

인간 본성의 피, 인간의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기에 타인에게서 존엄함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피인 성령을 수혈받지 못하면, 우리 눈에 세상 사람들은 그저 나를 밟고 올라서려는 경쟁자나 귀찮은 존재로만 보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모든 인간, 모든 피조물을 위해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분의 피를 받은 이들은 인간은 물론이요,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됩니다.

 

구겨진 지폐도 돈이듯, 죄로 구겨진 인간도 하느님의 자녀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마음을 가장 절절하게 보여주는 예화가 있습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린 ‘사무라이가 되고 싶었던 천민 아이’ 이야기입니다.

 

어느 천민 아이가 사무라이가 되기 위해 영주의 성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귀족들의 괴롭힘과 고된 훈련을 견딜 수 없어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그에게 그 화려한 성은 감옥일 뿐이었습니다.

 

그때 늙은 시종이 아이를 붙잡고 충격적인 비밀을 말해줍니다. 

 

“이 성이 무너지지 않는 이유는, 네 어머니가 너를 사무라이로 만들기 위해 스스로 이 성의 기둥 속에 묻히는 ‘인주(人柱)’가 되셨기 때문이다.”

 

그 순간, 아이의 눈에 비친 성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차가운 기둥과 벽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어머니의 뼈요, 어머니의 살이었습니다. 아이는 그 기둥을 부여잡고 통곡합니다.

 

그리고 결심합니다.

 

어머니의 피가 서린 이곳을 버리고 도망칠 수 없다고. 

 

더 놀라운 것은 그 다음입니다.

 

아이는 자신을 괴롭히던 귀족 아이들까지도 받아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내 어머니의 희생 덕분에 안전하게 지내고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피가 묻은 성 안에 사는 모든 존재를 품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당에 와서 십자가를 볼 때, 이웃을 볼 때, 그저 나무 조각이나 남으로 보인다면 아직 내 안에 성령의 감각이 무딘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을 보려는 우리의 노력도 필요합니다.

 

우리는 욕망에 의해 성령을 많이도 잃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간절히 보려고 하는 이들에게 내리십니다. 

 

안나의 집 김하종 신부님이 씻지 않은 노숙자를 껴안았을 때 “두려워하지 마라, 나다.”라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셨던 것, 마더 데레사 수녀님이 냄새나는 거지에게서 예수님의 목마름을 보셨던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분들이 끊임없이 기도하며 가난한 이들 안에서 ‘하느님의 피’를 발견하려 치열하게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더 사랑하려고 노력할 때 더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데, 그때 오시는 것이 성령이십니다.

 

성령으로만 성령을 볼 수 있습니다. 피로만 피를 볼 수 있습니다. 

 

희대의 살인마 유영철에게 가족을 잃은 고정원 씨가 그 살인마를 양아들로 삼으려 했던 그 피눈물 나는 노력은, 그 괴물 같은 인간 안에서도 희미하게 남아있는 ‘하느님의 모상’을 보려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눈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내 안에 하느님의 피, 성령이 흐를 때만 가능한 시선입니다.

 

그녀가 그토록 원했고 기도했기에 성령이 주어졌고, 그래서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하느님의 눈’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단순한 생물학적 인간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피, 곧 성령을 받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개는 꽃이 예쁜 줄 모릅니다. 개 안에는 아름다움을 느끼는 본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성인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죄 안에는 거룩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볼 수 있습니다. 내 안에 하느님의 피가 흐르기 때문입니다.

 

이번 한 주간, 성령의 안약을 넣고 세상을 보십시오.

 

나를 괴롭히는 이웃 안에서, 부족해 보이는 가족 안에서 상처 입은 나의 ‘레인맨’을 발견하십시오.

 

그들 안에 묻어있는 하느님의 땀과 피를 보려고 노력하십시오.

 

그때 우리는 세례자 요한처럼 당당하게 외칠 수 있을 것입니다. 

 

“과연 나는 보았다.

 

저 사람 안에 하느님의 피가 묻어있음을!”

 

아멘! 

 

 

 

이병우 신부님_"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1,29) 

 

'우리도 예수님을 증언하자!' 

 

오늘 복음(요한1,29-34)의 제목은 '하느님의 어린양'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세례자 요한의 증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1,29) 그리고 또 예수님을 두고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요한1,33ㄹ),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요한1,34ㄴ) 증언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증언하고 있듯이,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고,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어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도 증언합시다!

 

우리도 세례자 요한처럼 예수님을 증언합시다!

 

우리가 믿고 있는 분, 따라가는 분은 이런 분이라고 세상을 향해 증언합시다! 

 

이런 증언을 하려면, 그리고 나의 증언이 참되려면, 내가 먼저 나의 죄가 없애져야 합니다. 성령의 세례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날마다 성령의 힘으로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예수님의 생각과 말과 행위로 바뀌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증언의 시작'이며,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 이유이며,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는 신앙생활의 본질'입니다.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이사49,6ㄴ)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1코린1,3) 

 

일치주간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오늘(1.18)부터 사도 바오로의 회심 축일(1.25)까지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를 위해 기도하는 주간'입니다. 

 

하나인 교회에서 갈라져 나간 '동방교회(1054년), 개신교(1517년), 영국성공회(1534년)' 신자들을 포함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 1마카2,14) 

 

 

송영진 신부님_<“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이튿날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요한은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 1,29-34)”

 

 

 

1)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말은,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내주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그렇게 증언할 수 있었던 것은, 직접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알려 주셨기 때문입니다(33절).

 

<세례자 요한의 증언은 사실상 하느님의 선포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구원 활동도,

 

십자가 수난과 죽음도, 부활과 승천도 못 보았습니다.

 

그는 성령이 어떤 분 위에 머무르실 텐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을

 

뿐이고,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대로 성령이 예수님 위에

 

머무르시는 것만 직접 보았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믿고, 자신의 믿음을 증언한 것은,

 

하느님의 계시를 믿었기 때문이고, 또 하느님께서

 

그렇게 증언하라고 시키셨기 때문입니다.

 

 

 

2)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말은, 과월절의 어린양과

 

이사야서 53장에 나오는 어린양이 합해져 있는 상징입니다.

 

그런데 ‘죄를 없애시는’이라는 말에 초점을 맞추면,

 

이 말은 레위기의 ‘속죄 제물’에 관한 말씀에 연결됩니다.

 

“... 숫염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주님 앞, 만남의 천막

 

어귀에 세워 놓는다. 아론은 그 숫염소 두 마리를 놓고

 

제비를 뽑는데, 제비 하나는 주님을 위한 것이고

 

다른 제비는 아자젤을 위한 것이다. 아론은 주님을 위한

 

제비가 뽑힌 숫염소를 속죄 제물로 바친다(레위 16,7-9).”

 

“아론은 살려 둔 그 숫염소 머리에 두 손을 얹고,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죄, 곧 그들의 허물과

 

잘못을 고백하여 그것들을 그 염소 머리에 씌우고서는,

 

기다리고 있는 사람의 손에 맡겨 광야로 내보낸다. 그러면

 

그 염소는 그들의 모든 죄를 불모지로 날라 간다.

 

이렇게 그 숫염소를 광야로 내보낸다(레위 16,21-22).”

 

속죄 제물로 바쳐지는 염소 입장에서는 정말로 억울한

 

일인데, 인류 구원을 위한 속죄 제물로 당신의 목숨을

 

내주신 예수님께서는 억울해 하시지 않고, 인간에 대한

 

사랑과 자비로 ‘기꺼이’ 그 일을 하셨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 그리고 더러워진 사람들에게 뿌리는

 

암송아지의 재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그 몸을 깨끗하게

 

한다면, 하물며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 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죽음의

 

행실에서 얼마나 더 깨끗하게 하여 살아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할 수 있겠습니까?(히브 9,13-14)”

 

 

 

3) 그런데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으면서도 속죄 제물만 바치면

 

죄가 없어지고 용서를 받게 될까?”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에 대해서도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아도 십자가의 은총이 내릴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주시는 용서와 구원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는 사람은,

 

용서와 구원을 받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은 용서와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또 “우리가 구원받는 일에, 도대체 속죄 제물이 왜

 

필요할까?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이니, 그냥 구원하실 수도

 

있지 않은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할 수도 있습니다.

 

마태오복음 18장에 있는 ‘매정한 종의 비유’를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용서와 구원은 우리의 모든 부채를 탕감해 주시는

 

일인데, 그냥 ‘탕감’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 대신

 

빚을 갚아 주심으로써, 그 빚을 없애 주신 일입니다.

 

채권자이신 분이, 스스로 우리 대신 채무자가 되셔서,

 

우리의 빚을 대신 갚아 주신 일...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입니다.

 

어떻게 설명하든지 간에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신앙의 완성 단계에 도달하게 된 과정을

 

따라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 과정은 잘 짜놓은 시나리오대로 진행된 일이 아닙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 전까지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랬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야 비로소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속죄 제물로 당신의 목숨을

 

내주신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예수님이 바로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우리가 지금은 ‘어렴풋이’

 

느낄 뿐이지만, 언젠가 때가 되면 모든 것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1코린 13,12).

 

지금 우리가 할 일은, 믿고, 회개하면서, 사랑 실천으로

 

주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생활을 하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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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중 제2주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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