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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녹) 2026년 1월 19일 (월)연중 제2주간 월요일신랑이 혼인 잔치 손님들과 함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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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ㅣ체험
1월19일 수원교구 묵상

187491 최원석 [wsjesus] 스크랩 09:18

이병우 신부님_"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마르2,19ㄷ) 

 

'단식의 참의미!' 

 

오늘 복음(마르2,19-22)은'단식 논쟁과 새것과 헌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이 단식하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이렇게 묻습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마르2,1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이르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느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르2,19)

 

그리고 이어서 새것과 헌것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2,22ㄷ)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신 예수님께서는 그 나라를 종종 혼인잔치에 비유하여 설명하셨습니다. 이 비유에서 신랑은 예수님이시고, 신부는 교회 곧 우리입니다. 신랑이신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은 큰 기쁨이며, 신부인 우리의 큰 목적이요 희망입니다. 

 

'단식의 참의미!' 

 

신앙행위 안에서 단식은 속죄의 의미가 있습니다.

 

속죄는 내 안에 있는 모든 죄와 허물을 씻어내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 깨끗해진 상태에서 하느님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단식은 주님을 만나기 위한, 새로워지기 위한, 다시 태어나기 위한 간절하고도 거룩한 행위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의미의 단식을 매일해야 합니다.

 

유다인들에게는 단식이 삶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루카18,12) 라고 말하는 바리사이처럼 유다인들은 주기적으로 단식을 했습니다. 

 

단순히 음식을 먹지 않는 단식에 그치지 말고, 나의 몸과 마음이 함께 깨끗해지는 단식, 죄와 허물을 씻어내는 단식을 자주 하도록 합시다! 

 

(~ 1마카2,28) 

 

전삼용 신부님_내가 하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고 있다면? 

 

바오로가 베드로를 나무란 적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초석이었고

 

바오로는 교회를 박해하다가 회개한 사람이었는데도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저도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었지만 감히 저의 논문지도 신부님께 그분의 태도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저의 논문지도 신부님은 가난한 성자처럼 사십니다. 

 

본당신부님이시지만 직접 시장을 보셔서 음식을 하시고 가난한 사람들과 사제관을 나누어 사용하시며 옷도 남이 버린 것들을 주워 입으시는 성인 신부님이십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논문지도 신부님은 당신이 논문을 지도하시는 학생들과 함께 다른 신부님을 만나려 간 적이 있었습니다.

 

미사를 함께 드렸는데 성작과 성합이 매우 아름답고 값어치 있게 보였습니다.

 

저와 함께 간 그 신부님은 미사 도중에도 그 아름다운 성작의 문양을 손으로 만져보는 등

 

그 화려함에 경탄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차를 타고 돌아오는 도중 그 신부님은 저에게 “오늘 좋았지?

 

근데 내가 오늘 그 신부에게 사는 게 너무 사치스러운 것이 아니냐고 충고를 해 주었어.”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가난하게 사시는 그 신부님을 존경하면서도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신부님, 각자 삶의 방식이 있으니 당신이 가난하게 사신다고 남에게 뭐라고 하시면 안 돼요.

 

성인들이 다 가난했던 것은 아니잖아요.” 

 

 

 

그랬더니 그 신부님이 “그럼 부자가 성인이 되냐?”라고 되묻기에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교황님들을 생각해 보세요.

 

많은 성인 교황님들이 계십니다.

 

그 분들은 가난하게 살려고 해도 그럴 수 없는 분들이셨잖아요.” 

 

 

 

그 신부님은 더 이상 저에게 말을 하지 못하셨습니다. 

 

저는 누군가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납니다.

 

“가난한 것을 자랑하는 사람은 부자이기를 원하는 것이다.” 

 

 

 

가난한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이 좋다고 하여 가난하지 않은 것이

 

죄인 양 모든 사람에게 가난을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중학교 때 청소를 남들보다 더 열심히 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얼굴을 붉혀가면서까지 열심히 하지만 동시에 게으름 피우는 친구들을 나무랐습니다.

 

저는 그 때 자신이 하는 일을 남에게 강요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만족을 위해 하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물론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 주위에 가난한 사람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분을 재정적으로 도와주었던 여인들도 나오고 베타니아에는 부자 친구들도 있으셨고,

 

그 중 어떤 여인은 수백만 원이 되는 향수를 예수님께 발라드리기 위해 옥합을 깨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그 여인을 나무라는 제자들보다는 그 여인을 오히려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덕을 실천하시되 남에게 강요하시지 않으시고 그 실천하는 것에서 만족하셨고 그런 삶을 강요하기보다는 ‘초대’하셨습니다. 

 

 

 

오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라고 묻습니다.

 

단식은 참 좋은 것입니다. 

 

육체의 욕망을 제어함으로써 영적인 능력을 극대화하게 만듭니다.

 

성경에 보더라도 ‘단식과 기도’를 자주 함께 사용함으로써 단식이 기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자신들만 단식하면 되지 예수님과 제자들에게까지 그것을 강요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심리 근저에는 자신들이 단식하기 때문에 더 올바르게 산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은 것은 아닐까요?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것은 행동양식이 경직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상황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어야 함에도 자신이 하니까 남들도 해야 한다는 식은 스스로 그렇게 행동하면서 자기만족을 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분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병원에 입원해 계신 어떤 분을 수술을 하려고 하는데

 

간수치가 너무 높아서 수술을 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시간이 지나도 수치는 떨어질 줄 몰랐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약을 먹으면 몸에 좋을 것 같아서 병원에서 몰래 먹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약이라고 다 좋은 것이 아닌 것처럼, 나에게 적용되는 것이 다른 이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저도 전에 마치 성인이 된 것처럼 저의 신앙생활을 강요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산을 오르는 길은 다양하고도 많습니다. 

 

아무리 좋아도 강요하지 맙시다.

 

내가 강요한다는 것은 내가 하고 있는 그것으로 충분한 행복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강요하지 않습니다.

 

초대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복음: 마르 2,18-22: “신랑을 빼앗길 날 단식하리라.”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철저히 지켰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단식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예수님이 곁에 계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신랑”에 비유하신다.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로 묘사했던 구약(호세 2,16; 이사 54,5)을 기억하게 한다. 신랑이 함께할 때는 잔치와 기쁨의 시간이지, 금욕의 시간이 아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곳에는 잔치가 있고, 구원이 있으며, 기쁨이 있다. 그러나 그분이 떠나시면 단식과 눈물이 뒤따른다.”(Hom. in Matth. 30,3)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빼앗기셨다가” 부활로 다시 오신 분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부활의 기쁨 속에 살지만, 동시에 재림을 기다리며 단식과 기도를 계속하는 나그네 공동체이다. 

 

예수님은 단식을 부정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단식의 참된 의미를 일깨우신다. 참된 단식은 단순히 음식을 거르는 것이 아니라, 악습과 죄를 끊는 것이다. 성 바실리오는 이렇게 권고한다. “진정한 단식은 음식만이 아니라, 분노에서 단식하고, 욕망에서 단식하고, 악행에서 단식하는 것이다.”(De Jejunio, Hom. 1,7) 교리서도 같은 맥락을 강조합니다. “회개와 단식은 내적 회개의 표현이며, 영혼의 강도를 높이는 수단이다.”(1434 참조) 따라서 우리가 단식할 때, 그것은 단순한 몸의 절제가 아니라, 죄를 끊고 주님을 향한 마음을 열기 위한 영적 행위가 된다. 

 

예수님은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21.22절) 하신다. 여기서 “헌 옷과 헌 부대”는 옛 생활방식, 자기중심적 태도, 율법주의적 사고를 상징한다. “새 포도주”는 예수님이 가져오신 복음과 은총, 곧 믿음·희망·사랑의 생명을 가리킨다. 성 이레네오는 이를 이렇게 풀이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새롭게 창조되었다. 그러므로 옛사람의 옷을 벗어 던지고 새 사람의 옷을 입어야 한다.”(Adversus Haereses IV,36,5 참조) 복음은 단순히 우리의 옛 생활에 덧붙이는 장식이 아니다. 완전히 새로운 삶의 방식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묵은 나”를 버리지 않으면 “새로운 은총”을 담아낼 수 없다. 

나는 단식을 단순히 음식 절제로만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내 삶에서 끊어내야 할 ‘악습의 습관’은 무엇인가? 복음을 내 삶의 주변부에 덧대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 부대로 살아가도록 주님께 나를 맡기고 있는가? 신랑이신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며, 기쁨과 희망 안에서 단식을 살고 있는가? 

 

단식은 잃어버린 신랑을 애도하는 행위가 아니라, 그분의 재림을 기다리는 희망의 행위이다. 새 포도주인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묵은 나를 버리고 새로워지는 삶을 매일 살아가야 할 것이다. 

 

 

 

김건태 신부님_새 가죽 부대

 

경직된 옛 율법과 전통을 담고 있는 ‘헌 가죽 부대’를 대표하는 사람들과,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을 담을 ‘새 가죽 부대’로 상징되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은 예나 지금이나 그칠 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철저한 율법주의에 얽매여 있던 바리사이들에게, 이제 막 태어난 그리스도교는 전통과 율법을 무시하거나 파괴하는 사람들의 모임 정도로 비쳤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논쟁 주제인 단식은 사실 모든 종교에서 중요하게 취급되는 종교의식 또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단식을 하느님 앞에서 인간의 비천함과 희망과 사랑을 드러내는 하나의 신앙 행위로 가르칩니다. 단식의 기회와 동기는 실로 다양할 수 있으나, 하느님의 업적을 받아들이고 그분에게 모든 것을 맡기려는 겸손한 마음으로 신앙인의 자세를 확립하려는 마음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하느님께 기쁨이 되는 참된 단식은 따라서 이웃 사랑과 연결되어야 하며, 기도와 자선에서 분리될 수 없습니다. 기도와 자선처럼 단식도 남에게 드러내 보여서는 안 됩니다(마태 6,5-18). 단식은 하나의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던지는 “어찌하여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는 질문에서,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어버린 단식, 보여주기 위한 단식이 엿보입니다. 이러한 질문 앞에서, 예수님은 ‘신랑이 함께 있는 지금’은 단식이 아니라 축제의 시기임을 분명히 밝히시지만, 아울러 형식적이며 위선적인 단식 행위를 단죄하고 계십니다. 하나의 전통 또는 규정으로서가 아니라, 또는 남들이 하니까 그냥 따라 하는 단식이 아니라, ‘신랑을 빼앗길 날’과 같은 때, 곧 내 마음이 헛된 것으로 가득 차 주님을 모실 공간이 사라져버린 결정적인 때, 몸과 마음을 바꾸는 회개의 몸짓, 오로지 하느님과 이웃을 향하는 사랑의 몸짓으로 단식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주님이 들려주시는 가르침과 보여주시는 행적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 모든 가르침과 행적이 사랑이라는 두 글자 안에 집약된다는 자발적인 결론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새 포도주를 마음에 담고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는, 새 가죽 부대가 꼭 필요합니다. 옛것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다짐과 용기를 앞세워, 가족이나 이웃과의 관계 형성이 오로지 사랑을 중심으로 펼쳐질 수 있도록 힘쓰는 가운데, 기분 좋은 하루, 그리고 한 주간 되기를 기도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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