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주님 부활 대축일 파스카 성야: 마태오 28, 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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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99 이기승 [bona24] 스크랩 2026-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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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밤은 부활절의 시작인 파스카의 밤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 부활 성야는 모든 전야제(=밤샘 기도)의 어머니로 존경받는다. 』 라고 설교하였습니다. 이 밤은 오랜 관습(탈 12, 42)에 따라 주님을 위하여 밤을 새우며, 복음의 권고에 따라(루 12, 35) 신자들은 손에 등불을 밝혀 들고 주인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깨어 있다가, 돌아오는 주인과 함께 식탁에 앉을 수 있도록 마음을 가다듬는 밤입니다.
이 거룩한 밤을 맞기까지 성삼일의 마지막 날인 성토요일에 교회는 길고도 무거운 침묵의 시간을 보냅니다. 그 까닭은 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혀 계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애도하고 기억하기 위한다는 차원에서, 교회는 오늘 해 떨어지기 전까지는 아무 전례도 거행하지 않습니다. 죽음은 우주의 침묵이며, 침묵의 자리가 바로 무덤입니다. 침묵은 블랙홀 Black hole처럼 생명의 숨과 얼을 삼켜버립니다. 그러나 침묵은 사람이 되신 말씀을 삼키지는 못합니다. 침묵은 말씀이 더 큰 의미로 되살아나는 자리입니다. 왜냐하면 침묵이 있기에 소리는 잦아들고, 침묵에서 말씀은 본래의 의미로 되살아납니다. 이와 동시에, 무덤은 부활(復活-Pascha-過越-건너감)의 자리이며 조건입니다. 침묵을 통해 소리가 제 본성대로 되살아나듯, 죽어 무덤에 묻힐 때만이 부활도 있습니다. 무덤은 살아있는 모든 것을 삼키는 블랙홀입니다. 무덤은 살아온 모든 시간과 머물렀던 모든 공간에서 배우고 행한 모든 것을 삼킵니다. 그러나 무덤이 삼키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영원한 사랑과 영원한 생명은 삼키지 못합니다. 오히려 무덤은 사랑과 생명의 씨앗이 되살아나는 자리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 12, 24) 모든 것을 삼키는 무덤도 사랑과 생명을 간직한 씨앗을 삼키지 못합니다. 사랑과 생명의 신비를 알려주기 위해 오늘 밤 예수님은 침묵 속에 잠긴 말씀처럼, 땅에 떨어진 씨앗처럼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천사는 “그분께서는 여기에(=무덤) 계시지 않는다.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28, 6) 알렐루야!
파스카 성야 전례의 움직임은 밤에서 새벽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이집트에서 약속된 땅으로, 종살이에서 자유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역동적 움직임입니다. 이 움직임은 빛의 예식과 행렬을 통해서, 그리고 창세기로부터 에젤키엘 예언서로 흐르는 구약의 7독서, 로마서와 복음으로 이어지는 장엄한 말씀을 통해 그리고 세례 의식과 성찬 전례의 모든 부분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움직임이 파스카의 신비를 선포하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런 거대한 배경에서 오늘 복음은 우리의 시선과 행위가 어디에서 시작하여 어디로 귀결해야 할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부활의 첫 목격자인 막달레나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는 “주간 첫날이 밝아 올 무렵에” (28,1) 그러니까 아직 어둠이 채 가기 전에 무덤을 보러, 일상의 자리에서 경계인 무덤으로 향했던 것입니다. 떠나는 자만이 보이고 떠나는 자만이 찾게 됩니다. 슬픔과 절망에서 일어선 자만이 환희와 희망을 맞게 됩니다. 물론 그들에게 아직 뚜렷하지 않은 부활 대신에 텅 빈 무덤과 마주하였습니다. 비어 있는 무덤의 의미를 비록 알아차리지 못했었지만, 빈 무덤은 허무와 죽음에 대한 승리의 암시暗示였습니다. 그들의 그런 내적 상태를 알아차린 그녀들에게 천사는,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찾는 줄을 나는 안다.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28, 5~6)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부활 신앙은 감성적이고 이성적인 차원이 아니라 실질적인 사실 Fact이며 현실적인 사건입니다. 하지만 부활을 감각적으로 확인하려는 이들에게는 사실Nonfiction이 아니며 한낱 상상 Fiction의 허구虛構라고 단정할 것입니다. 천사의 말을 듣고서 그녀들은 육신의 눈과 귀가 아닌 마음의 눈과 귀로 받아들임으로써 차츰 부활을 향해 영적으로 달려가기 시작했었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열고, 의심을 내려놓고 비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천사의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너희에게 알리는 말이다. 그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다.”(28, 7~8) 이로써 믿는 이들은 보이는 것만으로 보고 믿는 사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믿음으로 믿고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바탕에는 이미 예수님으로부터 죽으셨다,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예고 말씀을 들었지만, 들어 본 적도 없었으며 상상조차 할 수도 없는 부활 사건을 직면하면서 이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즉각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습니다.
영성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막달레나 성녀는 예수님의 죽으심처럼 그녀 또한 영적으로 죽었으며, 주님께서 무덤에 머무셨다가 일어서신 것처럼 그녀 또한 절망과 상실에 머물다가 그 모든 것을 영적 무덤에 내려놓고 믿음과 사랑으로 일어났던 것입니다. 내려놓고 비울 때만이 다시 붙잡고 채울 수 있습니다. 이런 영적 죽음을 통해서 우리 또한 부활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최인호 베드로 작가의 유고집인 「눈물」을 읽고 공감했던 부분이 다름 아닌 부활에 대한 그의 체험적 묘사였습니다. 그는 자신 나름대로 부활의 신비를 깨닫고 이렇게 기술했습니다. 『 우리의 주님도 돌아가신 후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그러나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부활하시기 전에 주님께서 묻히셨던 무덤이 먼저 텅 비었음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의 두 손이 텅 비었을 때야 비로소 우리의 두 손을 오롯이 합장하여 기도할 수 있는 것처럼 무덤이 비지 않으면 주님도 부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죽어야 합니다. 죽어서 무덤 속에 묻혀야 합니다. 그런 후 마음의 무덤은 성녀의 빈손처럼 무無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살아 계신 주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처럼 새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 묻힌 자만이 무덤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으며, 죽은 자만이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오늘 독서 로마에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리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시어 다시는 돌아가시지 않으리라는 점을 압니다. 죽음은 더 이상 그분 위에 군림하지 못합니다. 그분께서 돌아가신 것은 죄와 관련하여 단 한 번 돌아가신 것이고, 그분께서 사시는 것은 하느님을 위하여 사시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여러분 자신도 죄에서는 죽었지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6, 8~11)
“두려워하지 마라.”(28, 5)라는 천사의 격려의 말씀은 과거 사랑했던 사람의 상실에 대한 슬픈 현실 상태이고, “평안하냐?”(28, 9)라는 예수님 위로의 말씀은 사랑해야 할 사람을 되찾은 기쁜 미래로 변화의 초대입니다. 천사의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 나셨습니다.”(28, 6. 7)라는 말씀에서 시작된 변화의 조짐은, 마침내 예수님께서,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28, 10)라는 말씀을 들음으로써 그 변화의 정점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 기쁜 소식입니다. 인간이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무상으로, 거저 공짜로 받은 구원입니다. 단지 그곳, 갈릴레아에 가고, 그곳에 감으로써 새로운 날, 모든 것이 새롭게 펼쳐진 첫날을 만끽할 것입니다. 그곳, 갈릴레아는 바로 그리스도인에게는 파스카의 아침이 시작되는 구원의 땅입니다. 그곳, 갈릴레아에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새로운 날을 시작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시어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실 것입니다.”(28, 20)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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