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묵상ㅣ체험
- 전삼용 신부님_주님 부활은 파견에 기쁨을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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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49 최원석 [wsjesus] 스크랩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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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요한 20,15)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목격한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 장면을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는 요한 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두 여인의 만남은 '인식의 변화'라는 측면에서 놀라울 정도로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처음에는 예수님을 그저 '유다 남자'로 보았습니다. 그러다 '선생님'이라 부르고, 자신의 과거를 꿰뚫어 보시자 '예언자'로 인식합니다. 마지막에는 '메시아'임을 깨닫고 물동이를 버린 채 마을로 뛰어갑니다. 오늘 복음의 마리아 막달레나 역시 처음에는 주님을 '정원지기'로 오해했다가, 존재와 인식의 거대한 부활을 경험하며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라고 외치는 사도로 거듭납니다. 존재의 부활: "마리아야!", 이름을 부르는 곳에서 시작되는 정체성 부활의 첫 번째 단계는 내가 누구인지 깨닫는 '존재의 부활'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을 정원지기로 보았을 때는 세상이 여전히 무덤이었지만, 예수님이 "마리아야!" 하고 부르시는 그 음성을 듣는 순간 그녀의 존재는 죽음의 갈증에서 생명의 축제로 건너갑니다. 하느님이 내 이름을 아시고 나를 부르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인간은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납니다. 「거울 속의 이방인에서 하느님의 자녀로 - 조반니 세간티니의 고백」 이탈리아의 위대한 화가 조반니 세간티니(Giovanni Segantini)는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고 고아로 자라며 지독한 고독과 정체성 혼란을 겪었습니다. 그는 거울을 볼 때마다 거울 속의 남자가 누구인지 몰라 두려워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이 차가운 세상에 버려졌는가?"라는 질문은 평생을 따라다닌 무거운 쇠사슬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알프스의 높은 산 위에서 그림을 그리며 대자연의 눈부신 아름다움과 그 뒤에 계신 창조주 하느님의 숨결을 만났을 때, 그는 비로소 거울 속의 자신과 화해하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길 잃은 고아가 아니다. 나의 어머니는 죽어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살아계시며, 나는 지금 그분의 자비로운 눈앞에서 이 아름다운 창조물을 그리고 있다." 세간티니는 하느님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계심을 느꼈을 때, '길 잃은 고아'라는 낡은 정체성을 벗고 '하느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존재로 부활했습니다. 이 정체성의 회복이 부활의 시작입니다. (출처: 애니-폴 콰란타, 『조반니 세간티니: 빛의 화가』) 인식의 부활: 정체성이 변하면 보이는 것이 달라집니다 존재가 부활하니 이제 '인식의 부활'이 일어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이름을 불리기 전까지 부활하신 주님을 보면서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자녀라는 정체성을 회복하자, 눈앞의 '정원지기'가 사실은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깨닫습니다. 그녀는 즉시 "라뿌니!" (요한 20,16) 즉 '스승님'이라 외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갈 것을 요구하십니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요한 20,17). 이 말씀은 차가운 거절이 아니라, 더 깊은 결합을 위한 초대입니다. 그리스어 원문을 보면 "Μή μου ἅπτου" (Mē mou haptou)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붙들다'는 뜻의 'ἅπτου' (haptou)는 '현재 명령형'입니다. 그리스어 문법에서 현재 명령형에 부정어 'Μή'가 붙으면 '이미 하고 있는 동작을 중단하라'는 뜻이 됩니다. 즉, "나에게 손대지 마라"가 아니라 "지금 나를 붙들고 있는 그 손을 이제 놓아주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부활 이전의 방식, 즉 '육신으로 곁에 계시는 예수님'으로만 당신을 소유하려는 것을 멈추게 하십니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다"는 말씀은 역설적으로 "내가 올라가야만 너희와 영원히 함께 있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육신으로 지상에 계시면 오직 그 장소에서만 마리아와 함께하실 수 있지만, 아버지께 올라가 성령을 보내주시면 시공간을 초월해 우리 모두와 영원히 결합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붙들지 마라"는 말씀은 "나를 여기 좁은 자리에 가두지 마라. 내가 올라가야 너희 모두와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사랑의 요청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요한 복음 강해』에서 이 대목을 이렇게 풀어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만지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만지라고 하신 것입니다. 육신으로 만지는 것은 땅에 머무는 것이지만, 믿음으로 만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만지는 것과 같습니다." (출처: St. Augustine, In Iohannis Evangelium Tractatus, 121, 3). 기쁨의 부활: 지켜보시는 분이 계시기에 샘솟는 환희 주님이 내 곁을 떠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안에서 영원히 함께 살기 위해 승천하신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 마음에는 '기쁨의 부활'이 일어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 성체 안에, 그리고 우리 영혼 안에 살아계셔서 우리를 지켜보시는 분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고 복음을 전할 때, 그 과정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며 미소 짓는 분이 계신다면 그 일은 더 이상 '고된 노동'이 아니라 '기쁜 보답'이 됩니다. 가끔 본당에는 사제가 알아주기만을 원하고, 사제의 칭찬이 없으면 봉사하는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그들이 '인간 사제'에게만 상을 받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즉,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상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하는 모든 봉사는 자기 영광을 위한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느님이시고, 지금도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십니다. 봉사자들의 영원한 상은 바로 '나를 지켜보시는 부활하신 주님의 시선' 그 자체입니다. 아직 아버지께 완전히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우리 곁에 머무시는 주님을 느낄 때, 우리는 더 이상 사제의 눈치를 보거나 사람의 박수에 목매지 않게 됩니다. 주님이 보고 계시는데 무슨 상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이 확신이 있을 때 복음을 전하는 파견의 현장에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이 추가되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으면 복음을 전하는 데도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저 죽은 스승의 유언을 지키는 피곤한 의무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선교사의 절망을 삼킨 부활의 미소 - 페드로 아루페 신부의 실화」 전 예수회 총장 페드로 아루페(Pedro Arrupe) 신부님은 1945년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때 그 아비규환의 폐허 한복판에 있었습니다. 그는 의사 출신 사제로서 부상자들을 돌보며 밤낮없이 뛰었습니다. 하지만 눈앞에서 수천 명이 썩어가는 살점과 함께 죽어가는 것을 보며, 신부님은 깊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주님, 이 지옥 같은 잿더미 위에서 당신의 복음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러던 어느 날 새벽, 신부님은 성체 조배 중에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말씀하시는 부활하신 주님의 실재를 강렬하게 체험했습니다. 그는 훗날 자서전적 회고록 『에네르기아 데 로스 포브레스(가난한 이들의 에너지)』에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 순간 저는 깨달았습니다. 제가 시체를 닦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주님의 몸을 닦고 있다는 것을요. 주님은 무덤에 계신 것이 아니라, 이 고통받는 이들의 고통 속에서 부활하여 저와 함께 계셨습니다. 주님이 보고 계신다는 확신이 들자, 잿더미는 더 이상 무덤이 아니라 하느님의 정원이 되었습니다." 주님이 살아계셔서 나를 보고 계신다는 그 '기쁨'이 회복되었을 때, 신부님은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기쁨은 부활의 가장 강력한 에너지입니다. (출처: Pedro Arrupe, 『En el Nombre del Señor』 - 주님의 이름으로) 파견의 부활: 기쁘니까 달려갑니다 부활의 마지막 단계는 '파견의 부활'입니다. 기쁨이 충만하면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여인들이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달려갔듯이, 우리도 세상을 향해 달려가게 됩니다. 붙들고 있는 손을 놓아야만 달려갈 수 있습니다. 성 이냐시오 로욜라는 이 '연쇄적 부활'을 몸소 체험한 성인입니다. 그는 만레사 동굴에서 '인식의 부활'을 거쳐 존재가 뒤바뀌었습니다. "모든 사물이 내 눈에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났으며, 나는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출처: 성 이냐시오 로욜라, 『자서전』 30항). 인식이 바뀌니 기쁨이 터졌고, 그 기쁨은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Ad Maiorem Dei Gloriam)"라는 거대한 파견의 부활로 이어졌습니다. 이냐시오가 세운 예수회가 전 세계로 퍼져나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의무'가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걷는 압도적인 기쁨'이었습니다. 결론: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오늘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는 우리에게 부활의 본질을 가르쳐줍니다. 부활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내 곁에 살아계신 주님과의 '인격적 조우'입니다. 주님은 죽지 않셨습니다! 그분은 승천하시어 우리와 더 온전하게 결합하셨고, 지금도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교부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시편 상해』에서 이렇게 증언했습니다."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 곁을 떠나지 않으신다는 뜻이다. 그분은 우리 안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선한 일을 지켜보시며, 우리가 그 일을 마칠 때까지 우리를 대신해 숨 쉬어 주신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여, 그대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으며, 그대의 사명은 이미 축제이다." (출처: St. Augustine, Enarrationes in Psalmos, 120, 4).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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