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묵상ㅣ체험
- 전삼용 신부님_성체가 신앙의 본질이 되게 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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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02 최원석 [wsjesus] 스크랩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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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 예수님!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 신앙의 가장 핵심적이고도 무서운 진리를 선포하십니다.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생명' 자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 가톨릭교회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참으로 뼈아픈 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분명 "성체가 아니면 구원이 없다, 생명이 없다"라고 목숨을 걸고 말씀하셨는데, 수많은 신앙인에게 성체성사는 그저 미사 중간에 치르는 하나의 거룩한 예식, 혹은 내 신앙생활을 치장하는 '액세서리' 정도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성체를 안 모신다고 해서 당장 내 삶이 죽을 것처럼 애통해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도대체 왜 성체성사의 의미가 이토록 축소되고 힘을 잃어버린 것일까요? 왜 우리는 생명의 양식을 먹으면서도 영적으로 굶어 죽어가고 있을까요? 오늘 우리는 이 치명적인 영적 질병의 원인을 파헤치고, 성체가 어떻게 우리를 완벽한 행복으로 이끄는지 깊이 묵상해 보겠습니다.
1940년대, 오스트리아 출신의 정신과 의사 르네 스피츠(Rene Spitz) 박사는 당시 고아원과 보육원에 수용된 아기들을 대상으로 생존과 발달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당시 시설의 환경은 위생적으로 완벽했습니다. 아기들에게는 매일 정확한 시간에 칼로리와 영양소가 완벽하게 계산된 최고급 우유와 이유식이 공급되었습니다. 병균이 옮을까 봐 간호사들은 아기들을 안아주지 않고, 요람 옆에 우유병을 고정해두어 아기들이 스스로 빨아먹게 했습니다. 육체적인 생존에 필요한 '양식'은 100퍼센트 완벽하게 제공된 것입니다.
그런데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이 완벽한 양식을 먹고 자란 아기들의 무려 37퍼센트가 2년 안에 원인 모를 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사망한 것입니다. 살아남은 아기들조차 신체 발달과 지능이 심각하게 지연되었고, 허공을 보며 무의미한 몸짓만 반복하는 정서적 마비 상태에 빠졌습니다. 의학계는 이 병을 '호스피탈리즘(Hospitalism, 시설병)'이라고 불렀습니다.
스피츠 박사는 원인을 찾기 위해 또 다른 집단을 관찰했습니다. 바로 여성 교도소에서 엄마와 함께 지내는 아기들이었습니다. 환경은 고아원보다 훨씬 비위생적이었고, 영양분도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하지만 그곳의 아기들은 단 한 명도 죽지 않고 튼튼하고 명랑하게 자라났습니다.
차이가 무엇이었을까요? 고아원의 아기들은 차가운 유리병에서 '음식(칼로리)'만 먹었지만, 교도소의 아기들은 엄마의 품에 안겨 엄마의 심장 박동을 들으며, 눈을 맞추고 체온을 나누며 양식을 먹었다는 것입니다.
이 위대한 실험은 인류에게 아주 명확한 진리를 선포합니다. 어머니가 아기에게 주는 양식은 단순한 영양분이 아니라 '어머니의 생명' 그 자체입니다. 아기가 엄마의 젖을 갈구하는 진짜 이유는 단순히 배가 고파서가 아닙니다. 그 젖을 통해 엄마의 따뜻한 품을 느끼고, '엄마와 완벽하게 하나가 되는 관계'를 확인하며 그 사랑 안에 '머물고 싶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입으로 들어오는 칼로리가 아니라, 나를 품어주는 거대한 사랑과의 '연결(머무름)'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성체성사의 효과를 느끼지 못하는지,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어느 가정에 중학생 아들이 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사랑해서 매일 저녁 정성껏 따뜻한 밥상을 차립니다. 어머니의 유일한 바람은 아들이 밥을 먹으며 오늘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재잘거리며 이야기하고, 엄마와 눈을 맞추며 함께 '머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들의 머릿속에는 온통 엄마가 내일 사주기로 약속한 '최신형 스마트폰' 생각뿐입니다. 아들은 식탁에 앉자마자 스마트폰 모델을 검색하며 밥을 마시듯 욱여넣습니다. 엄마가 "밥 맛있니?" 하고 물어도 건성으로 고개만 끄덕일 뿐, 마음은 온통 대리점에 가 있습니다. 밥투정까지 부립니다.
이 아들에게 엄마가 차려준 정성스러운 밥상이 무슨 생명의 의미가 있겠습니까? 밥은 그저 스마트폰을 얻어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견뎌야 하는 통과 의례요, 엄마의 식탁은 지루한 대기실에 불과합니다. 사랑이 빠져버린 양식은 의미를 상실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 교회의 민낯입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미사에 나와 성체를 모시면서도, 정작 예수님이라는 분 자체를 사랑하고 그분과 머무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온통 주님이 주실 수 있는 '스마트폰', 즉 내 사업의 성공, 내 자녀의 명문대 합격, 아프지 않고 오래 사는 건강, 벼락부자가 되는 로또에만 집중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내가 세상에서 얻어낼 세속적인 축복이 더 우선순위가 되었을 때, 성체성사는 자연스럽게 귀찮은 액세서리로 전락하고 맙니다. 빵을 주시는 하느님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내 탐욕의 배를 채워줄 기적만을 구걸하니 우리 영혼이 시설에 수용된 고아들처럼 영적 아사(餓死) 상태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이렇게 주님 자신을 바라보지 못하고 세상의 썩어 없어질 것들에만 미친 듯이 매달리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단 하나, '나는 누구인가?'라는 영혼의 본질적인 정체성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면 인간은 절대 행복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모든 욕구는 자신의 정체성에서 출발합니다.
거리를 떠도는 고아를 생각해 보십시오. 고아는 늘 불안합니다. 오늘 밤에 잘 곳이 있을지, 내일 먹을 빵이 있을지 스스로 책임져야 합니다. 그래서 고아의 본능은 항상 주변의 것을 '긁어모으고 소유하는 것'을 향합니다. 내가 많이 가져야만 안전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반면 우주를 창조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상속자, 곧 '하느님의 친자녀'라는 정체성을 완벽하게 깨달은 사람을 상상해 보십시오. 내 아버지가 우주의 주인이신데, 내가 내일 먹을 빵 걱정을 하겠습니까? 하느님이 내 아버지임을 진짜로 믿는다면, 그는 더 이상 세상의 얄팍한 돈이나 성공, 타인의 평가에 목매달지 않습니다.
우리가 엉뚱한 스마트폰(세상의 욕망)에만 집착하며 성체성사를 무시하는 이유는, 내가 '하느님의 자녀'요 '또 다른 그리스도'라는 이 압도적인 정체성을 아직 믿지 못하고, 여전히 내 힘으로 살아남아야 하는 '세상의 고아'라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누구인가'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구하는 모든 은총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시키시며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만나는 그들이 하느님의 특별한 돌봄을 받는 '선택된 자녀'임을 증명하는 거룩한 하늘의 양식이었습니다. 엄마의 젖과 같은 것이었지요.
그런데 민수기 11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끔찍한 불평을 쏟아냅니다. "아, 고기 좀 먹어 보았으면! 우리가 이집트 땅에서 공짜로 먹던 생선이며 오이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이 눈앞에 아른거리는데, 지금 우리 눈에는 이 만나밖에 없으니 기운이 다 빠져버렸구나." (민수 11,4-6 참조). 그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만나)을 먹으면서도, 그들의 영혼은 여전히 '이집트의 노예'라는 비참한 정체성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거부하니, 하느님이 주신 거룩한 양식이 입에 맞을 리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유인의 양식인 만나를 버리고, 노예 시절에 채찍을 맞으며 주워 먹던 파와 마늘(세상의 자극적인 욕망)을 달라고 울부짖었습니다. 결국 그 영적 이식증에 걸린 자들은 약속의 땅에 단 한 명도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의 모래 무덤 속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출처: 『주석 성경』 민수기 11장)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세상의 쓰레기 같은 욕망을 끊어내고, 내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완벽한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그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해답이 바로 '올바른 성체성사'입니다. 올바른 성체성사를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나는 누구인가?’를 해결하기 위해 다가가야 합니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요? ‘머물고 싶은 마음’입니다. 성체가 좋다면, 성체조배는 더 좋습니다. 하느님 자녀 됨의 마음을 더 오래, 깊이 간직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교부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요한 복음 강해』에서 이렇게 일갈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그리스도의 빵을 먹는 자는, 빵을 먹는 것이 아니라 심판을 먹는 것입니다. 빵을 주신 분을 영혼의 안방에 모시지 않고 빵의 단맛만 빨아먹고 도망치는 자는, 결코 생명의 식탁에 영원히 앉을 수 없습니다." (출처: 성 아우구스티누스, 『요한 복음 강해』).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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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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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승국 신부님_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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