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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녹) 2026년 6월 19일 (금)연중 제11주간 금요일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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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전삼용 신부님_칭찬이 독이 되는 사람들

190190 최원석 [wsjesus] 스크랩 09:45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고 하신다.
보물이 있는 그곳에 마음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마음의 빛이 눈을 통해 새어 나온다고 하시며 이렇게 물으신다.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깊겠느냐?"(마태 6,23)
그런데 빛이 어둠이 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빛이 어떻게 어둠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여기서 마음의 빛이란 내가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 곧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을 가리킨다. 
 
사람은 자기가 바라보는 것을 닮아 간다.
그래서 무엇을 빛으로 삼아 바라보느냐가 그 사람의 전부를 결정한다.
하늘을 빛으로 삼으면 그 사람 안이 환해지고, 세상 것을 빛으로 삼으면 빛이라 여기던 그것이
도리어 어둠이 된다.
빛이 어둠이라는 것은, 내가 빛인 줄 알고 좇는 그것이 실은 나를 삼키는 탐욕이라는 뜻이다.
옛 영성가들은 이를 세속과 육신과 마귀라 불렀고, 풀어 말하면 소유욕과 육욕과 지배욕이다. 
 
이 어둠이 얼마나 교묘한지를 보여 주는 장면이 있다.
어느 반려견 훈련 프로그램에 순하기로 소문난
레트리버 한 마리가 나왔다.
낯선 사람을 만나면 겁을 먹고 드러누워 배를 보일 만큼 소심한 개였다.
그런데 그 착한 개가 유독 가족만은 물었다.
물고 나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무릎에 올라 재롱을 떨었다.
가족은 이 개가 본래 착한데 어떤 상처 때문에 그런다고 믿으며, 개가 화내지 않도록 행동을 조심했다.
심지어 개가 좋아하는 화분은 개가 없을 때만 몰래 닦았다.
보다 못한 훈련사가 말했다.
그것은 아이가 담배를 피우는데 "얼마나 힘들면 그러겠어" 하며 내버려 두는 것과 같다고. 
 
이 개의 정체는 무엇인가.
사랑도 받고 싶고 지배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물어서 가족을 두렵게 만들어 지배하고, 다시 애교로 사랑을 받아 냈다.
화분을 제 것으로 여겨 손대지 못하게 으르렁대다가, 자기 뜻대로 따라 주면 다시 예뻐했다.
이만큼만 받들어 주면 착한 개가 되어 주겠다는
것이다.
가족은 개를 키운 것이 아니라 개를 섬기고 있었다.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훈련사가 이런 개에게는 순종하기 전까지 결코 잘해 주지 말라고 한 까닭이 여기 있다.
어설픈 애정이 도리어 독이 되기 때문이다.
그 개에게 "앉아"를 시키면 한참을 버틴다. 자기보다 낮다고 여기는 사람 앞에 앉아 칭찬을 들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칭찬이란 자기보다 높은 이에게 들어야 기분 좋은 법이니까. 
 
성경은 이 어둠을 일찍부터 고발한다.
여호수아 시대에 아간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하느님께서 봉헌물로 바치라 명하신 전리품 가운데, 그는 값진 외투 한 벌과 은과 금덩이를 보고 탐이 나 몰래 자기 천막 땅속에 묻어 두었다. "탐이 나서 가졌습니다"(여호 7,21 참조)라는 그의 고백이 모든 것을 말해 준다.
그 작은 어둠 하나 때문에 온 이스라엘이 아이 성 앞에서 무너졌다.
빛인 줄 알고 끌어안은 금덩이가, 실은 그를 삼킨 어둠이었던 것이다.
게하지도 그러하다.
스승 엘리사가 한사코 거절한 나아만의 선물을, 게하지는 몰래 뒤쫓아 가 받아 챙겼다.
그러자 나아만에게서 떠난 나병이 게하지에게 옮겨붙었다(2열왕 5장 참조).
소유욕이라는 어둠은 결국 제 몸에 병을 새긴다. 
 
삼구의 욕망에 사로잡힌 이들은 절대 칭찬하면 안 된다.
예수님도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마태 7,6)라고 하셨다.
세속과 육신과 마귀를 끝내 빛으로 고집하는 사람에게는 거룩한 진주가 들어가도 짓밟힐 뿐이다.
그런 이를 어설피 잘해 주어 성당으로 끌어들이면, 그는 하느님까지 가스라이팅한다. 자기가 잘나서 받는 줄 알지, 결코 순종하지 않는다.
세례를 받아도 합당하지 않게 성체를 모시는 자리에 머물고 만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사람에게까지 당신을 내어 주셨다는 사실이다.
돈주머니를 쥐고 있던 유다에게도 당신 살과 피를 떼어 주시고 그 발을 씻어 주셨다.
그 유다는 끝내 스승을 발로 짓밟았다. 예수님께서는 왜 그러셨는가.
그가 원하였기 때문이다.
원하는 자에게 주지 않을 수 없으셨기 때문이다. 마지막 한 조각까지 다 내어 주셨기에, 이제 그의 멸망은 온전히 그의 몫이 되었다.
우리가 본받을 자리도 여기다.
어둠을 빛이라 우기는 사람을 억지로 끌어와 잘해 줄 필요는 없으되, 그가 진정 원할 때는 끝까지 내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칭찬해야 하는가.
한 대학에서 이런 실험을 했다.
학생들에게, 다른 사람이 자기를 두고 평하는 말을 엿듣게 했다.
한 사람은 줄곧 헐뜯기만 했고, 한 사람은 줄곧 칭찬만 했다.
또 한 사람은 헐뜯다가 끝에 가서 칭찬으로 맺었고, 마지막 사람은 칭찬하다가 끝에 가서 헐뜯음으로 맺었다.
사람들이 가장 호감을 느낀 상대는 누구였겠는가.
줄곧 칭찬만 한 사람이 아니었다.
처음엔 헐뜯다가 마지막에 칭찬해 준 사람이었다.
가장 미운 사람은 누구였는가.
줄곧 헐뜯은 사람이 아니라, 좋게 말하다가 마지막에 헐뜯은 사람이었다. 
 
까닭은 이렇다.
마지막 말은 그 사람을 향한 기대를 담는다.
시종 좋은 말만 하거나 나쁜 말만 하는 사람은
아무런 희망을 주지 못한다.
그러나 부족함을 짚은 뒤에 건네는 칭찬은 "너는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기대를 안겨 준다. 다만 여기에도 분별이 필요하다.
소유욕과 육욕과 지배욕을 살찌우는 칭찬은 결코 해서는 안 된다.
그런 칭찬은 상대를 나를 부리는 가스라이터로 키울 뿐이다.
우리가 칭찬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 그 사람이 참 빛을 향해 한 걸음 내딛는 그 모습이다. 
 
여기 합당한 칭찬의 본보기가 있다.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한 장면이다.
까다롭고 오만한 강박증 환자가 한 여인에게 사랑을 고백하려다 칭찬을 한 가지 해 보라는 청을 받는다.
그가 머뭇거리다 꺼낸 말은 뜻밖이었다.
의사 말도 듣지 않던 자기가 약을 먹기로 했다는 것이다.
여인이 그게 무슨 칭찬이냐 되묻자 그가 답한다. "당신은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들어요."
여인은 그것이 생애 최고의 칭찬이라 한다.
돈과 교만에 갇혀 있던 두 사람이, 서로를 탐욕에서 끌어내 주었다는 그 한마디에 마음을 연 것이다.
누군가를 소유욕과 지배욕에서 벗어나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드는 것, 그보다 큰 칭찬은 없다. 
 
그러니 공부를 잘한다, 돈을 잘 번다, 얼굴이 곱다, 머리가 좋다는 칭찬을 조심하여라.
그런 말은 나를 길들이려는 계략이거나, 나를 세속과 육신과 마귀에 더 깊이 빠뜨려 어둠으로
끌고 가려는 속삭임일 때가 많다.
우리가 주고받아야 할 참된 칭찬은, 어둠을 빛이라 여기던 사람이 참 빛을 향하도록 돌이켜 세우는 칭찬이다.

그러할 때 비로소 우리 안의 빛은 어둠이 아니라 빛으로 빛나고, 그 빛이 눈을 통해 흘러나와 또 다른 누군가의 어둠을 밝히게 될 것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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