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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녹) 2026년 6월 21일 (일)연중 제12주일육신을 죽이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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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연중 제12주일:마태오 10, 26 - 33

190206 이기승 [bona24] 스크랩 2026-06-20

가끔 아주 오랜 전에 찍었던 제 사진을 보고 놀라는 분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사실 제 머리의 탈모는 제 어머니 돌아가시기 전까지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그때까지는 하느님도 제 머리카락 숫자를 분명히 세어 두셨을지 모릅니다. 그러던 제 머리카락 숫자는 어머니를 잃고 난 뒤 스트레스로, 물론 유전적인 요인도 강했지만 더 이상 셀 필요가 없을 만큼 빠지기 시작했고 이젠 거의 포기 상태입니다. 저야 이젠 제 머리카락 숫자에 별 관심도 신경도 쓰지 않은데 설마 무척 분주하실 하느님께서 아직도 제 머리카락 숫자에 관심을 두시리라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설마! 아직도 제 머리카락 숫자에 관심을 쏟고 계실까요?  

오늘 복음을 읽다 보면,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구절이 무려 3번씩이나 반복해서 나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들에게 닥쳐올 온갖 위험을 예고하시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이는 분명 제자들을 보낼 세상의 현실을 진단하신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또한 제자들의 내적 상태를 꿰뚫어 보셨기에 반복해서 두려워하지 말라, 고 당부하시면서 위로와 용기를 심어주기 위함이었다고 봅니다.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할 것이고, 어떤 처지에서든지 무엇을 말할까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약속한 성령이 오면 너희를 대신해서 모든 상황에 적절하게 말씀하시고 이끌어 줄 것이다.”라고 다짐하셨습니다. 

주님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심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두려움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어린 시절에는 천둥이나 번개, 태풍만 불어와도 놀라고 두려움에 떨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초등학교 4학년 때, 저희 고향 전남 순천엔 한낮부터 엄청난 집중 폭우로 제방이 무너지고, 물이 범람해서 갯가에 있던 집을 피해 높은 빌딩(=국민은행, 당시엔 가장 높은 건물로 기억하지만)으로 피신해서 밤새 내내 두려움으로 떨었던 기억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 모든 두려움의 밑바닥에는 죽음이 도사리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사람들이 여러분을 두렵게 하여도 두려워하지 말고 무서워하지 마십시오.”(1베3,14)라는 말씀은 체험으로 깨달은 권고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한 의도는 사람이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느님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사도 요한 역시,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1요 4,8)라는 말씀의 요지도 거의 유사합니다. 시편의 노래를 들어 봅시다. “주께서 나의 빛 내 구원이시거늘 내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께서 내 생명의 바위시거늘 내 누구를 무서워하랴.”(시27,1) 이처럼 어제나 오늘이나 인간 내면의 밑바닥에는 두려움이 짙게 내재해 있다가, 일어난 사건과 생생한 실제 상황에 의해서 우리 의식으로 솟구쳐 오른다고 봅니다. 사람이나 자연재해에 대한 두려움, 질병(=건강)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결혼과 일에 대한 두려움, 취업과 실직에 대한 두려움, 미래와 노후에 대한 두려움 등 어쩌면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는 여정에서 숱한 두려움을 직면하면서 살아가는 게 인간의 실존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렇게 인간은 나약하고 미약한 존재이며 이런 한계상황을 체험하면서 우리는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현재는 하느님의 사랑에, 미래는 하느님의 섭리에 내어 맡기라”라는 성 아오스딩의 표현으로 위로받습니다. 그러기에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존재는 “육신을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마태10, 28) 하느님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게 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 곧 진리를 아는 것이고 그 앎은 우리를 두려움에서부터 자유롭게 하리라 믿습니다. 인간의 깊은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어둠을 이 진리의 빛으로 비춤으로 환상에서 깨어나게 되고, 상대적으로 인간 존재에 비해 하찮은 참새마저 지켜주시고 돌보시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두려움은 더 이상 인간을 짓누르지 못하리라 믿습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아니 잊으시나이까. 그 종락 무엇이기에 따뜻이 돌보시나이까.”(시8, 5) 두려움은 오직 하느님과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때 겨울 눈이 따뜻한 봄의 햇살로 녹듯이 사라지라 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거룩하신 만군의 주님’은 두려워할 분이 아니라 더러운 우리의 입술과 마음을 씻어 주시는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이시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타는 숯으로 우리의 더러운 입에 대시면서 “자,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죄는 없어지고 너의 죄악은 사라졌다.”(6, 7)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 심판의 두려움에서 일으켜 세워주셨기에,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기에 위해 두려워하지 않고 기꺼이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6,8)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되었다고 봅니다. 기도를 대신해서 가톨릭 성가 472번 「주님 저 하늘 펼치시고」 가사를 마음으로 조용히 불러 보도록 합시다. 『온갖 두려움과 모든 근심 저 멀리에 던져 버리오며 주님 아름다움 생각할 때 내 마음엔 큰 기쁨이 넘치네. 주님은 저 하늘 펼치시고 태양과 바다 꼿 만드셨네. 그러나 주님의 가장 귀한 선물은 생명과 사랑의 은혜 찬미하리. 아~~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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