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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녹) 2026년 6월 21일 (일)연중 제12주일육신을 죽이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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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연중 제12주일 가해]

190223 박영희 [cornelia2] 스크랩 10:05

[연중 제12주일 가해] 마태 10,26-33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우리 삶은 두려움의 연속입니다. 예기치 않았던 일들이 갑작스레 터지고, 알 수 없는 미래는 막연하게만 느껴집니다. 불의의 사건 사고로 다치거나 죽는 사람들이 계속 생기고, 어느 순간 닥쳐온 슬픔과 아픔이 삶을 휘감습니다. 문제는 그런 일들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점이지요. 그래서 수많은 근심 걱정이 나를 무겁게 짓누르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두려움에 빠지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부족하고 약한 우리는 불안정성과 불확실성 앞에 이리저리 휘둘릴 수 밖에 없는 걸까요? ‘두려움’의 근본적인 이유는 에덴동산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하느님 뜻을 거스르고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는 자기들을 찾으시는 하느님께 이렇게 말하지요.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창세 2,10) 그러나 그들이 숨은 이유는 알몸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벌 주시는 무서운 분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곧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이 무너진 것입니다. 즉 그들은 하느님을 베푸시는 분이 아니라 빼앗는 분, 자유를 주시지 않고 속박하시는 분, 용서하기보다 처벌하시는 분으로 왜곡해서 보게 된 겁니다. 그렇기에 두려움의 반대말은 용기가 아니라 ‘믿음’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온전히 믿고 신뢰하는 예레미야 예언자의 모습을 봅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도성 예루살렘이 멸망하게 될 것이고, 백성들은 바빌로니아로 귀양가게 되리라는 슬픈 소식을 선포해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예레미야 예언자가 선포하는 메시지를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들에게 ‘악담’을 퍼붓는 것으로 여겨 그를 ‘매국노’로 낙인찍고 핍박했지요. 하지만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깊이 신뢰했던 예레미야는 그들의 폭력에 폭력으로 맞대응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괴롭히는 그들을 미워하거나 저주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살아계신 하느님’의 정의와 자비를 굳게 믿으며 모든 것을 그분께 의탁할 뿐입니다. 그래서 ‘송사’, 즉 옳고 그름의 심판과 단죄를 모두 하느님 손에 맡깁니다. 자기 기준에 따라 제 손으로 하면 더 큰 폭력을 부르는 ‘복수’가 될 뿐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느님 뜻에 충실하게 살아간다면 하느님께서 당신 뜻과 원칙에 따라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시리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복잡하고 힘겨운 삶을 살다보면 예레미야처럼 하지 못할 때가 참 많습니다. 당장 얻을 수 있는 큰 이익에 눈이 멀어 하느님의 뜻을 외면하고 부정에 동조하는 우리들입니다. 나에게도 불똥이 튀거나 후환이 닥칠까 두려워 다른 이가 불의를 겪거나 억울한 일을 당해도 그냥 묵인해버리는 우리들입니다. 당장의 피해나 희생을 두려워하여, 선(善)을 선으로 갚아주시고 악(惡)을 벌하시는 ‘하느님의 살아계심’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과 그 사람이 주는 피해는 두려워하면서 하느님과 그분이 내리시는 판결은 두려워하지 않는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묻으려고 애를 써도 숨겨진 부정은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겁을 주고 윽박질러도 감춰진 불의는 알려지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사필귀정’(事必歸正), 즉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결국 그분 뜻에 맞는 올바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그분 뜻을 따르는 이들은 결국엔 그 따름에 대한 보상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느님을 참으로 두려워한다는 건 그분께 벌을 받을 게 무서워 마지못해 그분 뜻을 따르는 ‘노예적 복종’이 아니라, 그분께서 이루실 정의와 공정을 희망하며 사랑으로 기꺼이, 그리고 기쁘게 그분 뜻을 따르는 ‘자발적 순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정의와 공정을 굳게 믿는다 해도 그것이 지금 당장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기에, 그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주어지는 불이익과 희생은 내가 온전히 감당해야 합니다. 또한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께서 결국엔 나를 가장 좋은 곳으로 이끄심을 신뢰한다 해도 하느님께서 내 앞에 놓인 십자가를 치워주시지는 않기에, 주님을 따르는 과정에서 만나는 고통과 시련은 나 스스로 극복해야 합니다. 그러다보니 우리 마음 속에서 ‘망하면 어쩌나’, ‘잘못되면 어쩌나’하는 두려움이 가시지 않는 게 사실이지요. 그런 우리 마음을 잘 아시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참새의 예를 들어 설명하십니다.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참새 한 마리도 하느님의 허락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첫째, 이 세상에서는 하느님께서 그러길 원하지 않으셔도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으로 인해 슬픔과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이들이 생기지만, 하느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하늘나라에서는 그분께서 심판하시지 않는 한 누구도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감당해야 할 고통과 시련은 그 ‘최대치’가 '땅에 떨어지는 것’, 즉 실패와 좌절로 괴로워하고, 죽거나 다치는 수준을 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그 정도 수준이 아니라 ‘육신과 영혼 모두가 지옥에서 멸망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를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 뿐이시니, 사람도 세상도 두려워할 필요 없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혼과 육신 모두를 멸망시킬 권한을 지니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머리카락 수까지 다 세어두셨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당장 멸망시켜야 할 그분의 ‘원수’였다면 굳이 그러지 않으셨겠지요. 그만큼 하느님께서 큰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언제나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보잘 것 없고 허물 투성이인 나라도 하느님께는 너무나 소중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무심코 지나치는 사소하고 평범한 것 하나도 절대 허투루 흘려버리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이토록 나를 사랑하시며 귀하게 여기시는데, 정작 나는 나 자신을, 그리고 하루 하루의 삶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고 있는지요? 앞으로는 말 한 마디 행동 하나도 그것이 하느님 뜻에 맞는지를 생각하며 삼가야겠습니다. 사소하고 평범한 하루, 한 시간도 허투루 흘려보내지 말아야겠습니다. 깊은 슬픔과 절망 속에서 도저히 솟아날 구멍이 보이지 않더라도 자포자기하지 말고 하느님 뜻을 찾아야겠습니다. 그렇게 삶의 모든 순간을 하느님 뜻에 충실히 사는 기쁨과 보람으로 채우는 것이, 그렇게 하여 나를 보시는 하느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 우리가 마음 속에 지녀야 할 참된 두려움, 즉 ‘경외심’입니다. 

 

* 함 승수 신부님 강론 말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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