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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연중 제12주간 화요일]

190251 박영희 [cornelia2] 스크랩 2026-06-23

[연중 제12주간 화요일] 마태 7,6.12-14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의 규칙을 세상 사람들은 ‘황금률’이라고 부릅니다. 기원후 3세기경 로마 황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가 이 말씀을 중요하게 여긴 나머지, 금으로 글씨를 써서 자기 거실 벽에 붙여둔 데에서 유래했다고 하지요. 그만큼 특별하고 대단한 말씀인가 싶지만, 사실 이와 비슷한 내용을 동서양의 여러 현인들도 이미 말한 바 있습니다. 즉 예수님 시대에 살던 유다인들에게도 이 말씀이 이미 익히 들어서 잘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는 얘깁니다.

 

하지만 그 내용을 잘 알고 있다고 해서 그 내용을 실천하기가 쉬운 것은 아니지요. 삼척동자도 다 아는 진리라고 해도 막상 그 진리대로 사는 게 그만큼 어렵고 힘든 겁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주님 말씀을 따라야 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소명이니 어떻게든 노력해봐야겠지요. 그러기 위해 이 말씀이 구체적으로 어떤 뜻인지를 살펴봅니다. ‘남이 나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바’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너무나 싫어해서 남이 나에게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하는 부정적인 것인지, 아니면 내가 너무나 좋아해서 다른 사람이 나에게 그렇게 해 주었으면 하는 긍정적인 것인지로 말이지요.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해주어야 할 때에는 그가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는 소극적인 수준에 머무르면서, 다른 사람이 나에게 무언가를 해주어야 할 때에는 그런 소극적인 수준은 당연히 포함이고 이에 더하여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해주기까지 바란다는 점입니다. 이런 ‘이중잣대’를 적용하다보니 우리는 늘 다른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실망하고 상처받게 되지요. 나는 ‘최소’만 하려고 들면서 상대방에게는 ‘최대’를 바라니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최소의 사랑에 머무르지 말고 최대의 사랑을 베풀라고 하십니다. 자기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정도로는 사랑을 완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껏해야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뿐이며, 그건 상대방을 배려하기 위함이라기보다 나 스스로가 상대에게 민폐를 끼쳐 그와 불편한 관계로 엮이고 싶지 않아서이니, 어찌보면 사랑의 반대개념인 ‘무관심’에 해당하는 모습인 겁니다. 그리고 오늘날 대부분의 세상사람들이 이런 모습으로 살지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남들이 사는 것처럼 사는 정도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세상 사람들보다는 뭐가 나아도 나은 사람이 되어야, 더 나아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며 하느님 보시기 좋은 모습으로 살아야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쉽고 편한 길 놔두고 굳이 ‘고생길’로 가는 것이 ‘좁은 문’을 통과하는 것처럼 어렵고 힘든 일이지만, 아무렇게나 살아도 다 통과할 수 있는 ‘널찍한 대문’은 우리를 멸망으로 이끈다고 예수님이 분명히 말씀하셨으니, 사랑의 실천에 있어서 ‘최고’는 못되더라도 ‘최선’은 다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 함 승수 신부님 강론 말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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