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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홍) 2026년 7월 5일 (일)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 신심 미사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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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190448 조재형 [umbrella] 스크랩 04:41

얼마 전에 정의와 연대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참 마음에 와닿는 말이었습니다. 정의는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힘입니다. 연대는 함께 아파하고 함께 손을 잡아 주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정의와 연대는 따로 떨어져 있으면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연대가 없는 정의는 자칫 차가운 판단이 되고, 때로는 독재와 폭력으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정의가 없는 연대는 자칫 자기들끼리의 이익을 지키는 협잡과 사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참된 공동체에는 정의와 연대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을 선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이 하느님께 선택받은 백성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선택받았다는 의식이 연대를 잃어버리면 다른 민족을 무시하고, 다른 사람의 아픔을 외면하게 됩니다. 정의롭다고 말하면서도 팔레스타인의 아픔을 보지 못하고, 이란을 공격하는 현실을 보게 됩니다. 정의를 말하지만 연대가 없으면 평화가 아니라 폭력이 됩니다.

 

반대로 정의가 없는 연대도 있습니다. 기업들이 서로 가격을 담합(談合)하면서 소비자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직 석유 가격이 오르지도 않았는데 전쟁을 이유로 주유소들이 함께 기름값을 올린다면, 그것은 연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정의가 없는 담합(談合)입니다. 서로 손을 잡았지만, 약한 사람을 위한 손 잡음이 아니라, 자기 이익을 위한 손 잡음입니다. 지난 518, 한국의 스타벅스코리아가 ‘5.18 탱크데이, 책상에 탁이라는 이벤트를 기획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518일은 광주 민주화 운동 기념일입니다. 무고한 시민들이 탱크와 총 앞에서 피를 흘린 날입니다. 불의에 맞서 민주주의를 위해 저항한 날입니다. 책상 탁이라는 말은 1987년 박종철 열사의 죽음과 관련된 아픈 표현입니다. “책상을 '' 치니, ‘하고 죽었다.”라는 거짓 발표는 국민의 분노를 일으켰고, 민주화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이런 역사적 아픔을 모르고 상업적인 이벤트로 사용했다면, 그것은 이익은 있었을지 몰라도 연대는 없었던 것입니다. 기억해야 할 아픔을 가볍게 다룬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정의와 연대를 함께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율법의 정의를 말씀하시면서도 사람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낡은 틀에 사람을 가두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자비 안에서 새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라고 하시며 세상의 질서와 하느님의 뜻을 분별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고픈 사람을 보시고 측은한 마음으로 먹이셨습니다. 아픈 사람을 보시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치유해 주셨습니다. 죄를 지은 여인을 단죄하지 않으시고 다시 살아갈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돌아온 아들을 용서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고, 하느님 나라는 어린이와 같은 마음을 지닌 사람에게 가까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정의는 사람을 죽이는 정의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정의는 사람을 살리는 정의였습니다. 예수님의 연대는 자기편만 감싸는 연대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연대는 죄인과 병자와 가난한 이와 이방인까지 품는 하느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미는 사람들의 손을 뿌리치지 않으셨습니다. 자비를 청하던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들것에 실려 온 중풍 병자를 일어나 걷게 하셨습니다. 이방인 여인의 간청도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 딸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 다가온 사람은 누구든지 위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 손을 내민 사람은 누구든지 새로운 삶을 얻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도 이 정의와 연대를 아름답게 보여 주었습니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가진 것을 자기 것이라고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배고픈 사람이 없도록, 가난한 사람이 홀로 버려지지 않도록 함께 살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초대교회를 보고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처럼 정의와 연대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혈하던 여인은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그 여인은 오랫동안 병으로 고통을 받았습니다. 몸도 아팠지만, 마음은 더 외로웠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하혈하는 여인을 부정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사람들 앞에 당당히 나서기도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인은 예수님 앞에 크게 말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마음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그리고 조용히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을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참 따뜻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을 병에서만 고쳐주신 것이 아닙니다. 외로움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부끄러움에서 일으켜 주셨습니다. 공동체 밖으로 밀려났던 여인을 다시 하느님의 딸로 세워 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정의입니다. 병든 이를 부정하다고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세워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연대입니다. 고통받는 사람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정의와 연대를 통해 한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우리도 살면서 근심과 걱정을 안고 살아갑니다. 몸이 아픈 사람도 있습니다. 마음이 아픈 사람도 있습니다. 관계 때문에 힘든 사람도 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녀 때문에 걱정하는 부모도 있고, 부모 때문에 마음 아픈 자녀도 있습니다. 그럴 때 오늘 복음의 여인처럼 주님의 옷자락을 만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큰 소리로 말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많은 말을 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조용히 주님께 마음을 드리면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작은 믿음도 귀하게 보십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누군가에게 주님의 옷자락이 되어 주면 좋겠습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손을 내밀 때, 그 손을 뿌리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정의를 말하면서도 차갑지 않고, 연대를 말하면서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신앙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아픈 사람에게는 위로가 되고, 외로운 사람에게는 친구가 되고, 억울한 사람에게는 힘이 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따뜻한 손이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화답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시네. 주님은 모두에게 좋으시며, 그 자비 모든 피조물 위에 내리시네.”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정의와 연대는 멀리 있는 말이 아닙니다. 가정에서 시작됩니다. 본당 공동체에서 시작됩니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데서 시작됩니다.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되 사람을 살리는 마음을 잃지 않는 데서 시작됩니다. 함께 손을 잡되 불의한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위해 손을 잡는 데서 시작됩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의 옷자락을 붙잡읍시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주님의 따뜻한 손이 되어 줍시다. 그때 우리 공동체는 정의가 살아 있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 공동체는 연대가 꽃피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그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다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저 사람들은 참으로 그리스도인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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