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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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25 조재형 [umbrella] 스크랩 0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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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신부님과 함께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여행하면서 신부님의 지난 5년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시작부터 쉽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원래 미국에 오기로 했던 신부님이 사정이 생겨 올 수 없었고, 코로나 팬데믹이 한창이던 때에 주교님께서 신부님에게 미국에 갈 수 있는지 물으셨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주교님의 말씀에 순명하며 미국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공항에는 교우들이 환영을 나왔고, 그렇게 교포 사목이 시작되었습니다. 다행히 신부님은 일본에서도 5년간 교포 사목을 하였고, 독일에서도 3년간 지낸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외국 생활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은 비교적 적었다고 합니다.
저는 5년간의 사목을 마치면서 어떤 마음이 드는지 물었습니다. 신부님은 세 가지를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공동체에 큰 분란이 없어서 감사했고, 신자들도 조금 늘어서 기뻤고, 재정도 조금 여유가 생겨서 안심되었다고 했습니다. 또 후임 신부님을 위해서 성당의 제대와 독서대를 새롭게 만들었고, 소성당도 깨끗하게 단장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 했습니다. 시골 마을 어귀에서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이해주는 커다란 느티나무처럼, 저는 신부님의 사목 안에서 따뜻함과 사랑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또 물었습니다. “5년 동안 지내면서 아쉬움과 서운함은 없었습니까” 신부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람이 불면 나뭇잎이 흔들리듯이, 감정의 바람이 불면 마음도 흔들릴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큰바람은 없었습니다.”
그 말을 들으며 저도 뉴욕에서 5년간 ‘가톨릭 평화 신문사’에 있었던 시간이 떠올랐습니다. 그때 가장 큰 바람은 코로나 팬데믹이었습니다. 많은 것이 멈추었지만 신문 제작은 멈출 수 없었습니다. 다만 이동이 제한되어 신문 홍보를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그 큰바람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직원들의 헌신과 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시간에 또 하나의 은총도 있었습니다. 동료 사제들과의 친교와 우정입니다. 코로나 시대를 지내면서 사제들과 함께 캠핑하러 다닐 수 있었습니다. 사제는 사제와 함께 있을 때 위로를 받고 힘을 얻는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또 브루클린 한인 성당 주일미사를 4년 가까이 도와줄 수 있었습니다. 신문 홍보를 다닐 수 없던 때에 브루클린 한인 성당에서 주일미사를 도와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저는 기쁜 마음으로 도와주었습니다. 물고기는 물에 있을 때 행복한 것처럼, 사제는 교우들과 함께할 때 행복하다는 것을 다시 느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인호’를 이야기합니다. 이마에 표가 있는 사람은 하느님의 벌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인호와 같은 표징을 전했습니다. 이집트에 재앙이 내릴 때,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르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재앙은 양의 피를 바른 집을 건너갔습니다. 구약의 인호는 재앙을 피하는 표시였습니다.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표시였습니다. 신약에도 인호가 있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으면서 성령의 인호를 받습니다. 구약의 인호가 재앙을 피하는 표시였다면, 신약의 인호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표시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로 초대받았다는 표시입니다. 그러나 이 인호는 단순한 특권이 아닙니다. 이 인호는 사명입니다.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용서하고, 섬기고, 사랑하며, 공동체를 살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인호를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잘못한 형제가 있으면 먼저 조용히 찾아가서 말하라고 하십니다. 그가 말을 들으면 형제를 얻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잘못한 사람을 벌주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잃어버린 형제를 다시 얻는 데 있었습니다. 공동체에서 누군가 잘못했을 때, 그 사람을 밀어내고, 낙인찍고, 격리하는 것이 먼저가 아닙니다. 먼저 형제를 살리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방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공동체의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공동체가 누구의 이름으로 모였는지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두세 사람이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면, 그곳에는 주님께서 함께하십니다. 작은 성당이어도, 작은 공동체이어도, 작은 모임이어도, 그 안에 용서와 사랑과 기도가 있으면 주님께서 함께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돌아온 탕자를 용서하셨습니다.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셨습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자신을 배반한 제자들도 다시 품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보여 주신 길은 정죄의 길이 아니라 용서의 길이었습니다. 배척의 길이 아니라 포용의 길이었습니다. 힘으로 누르는 길이 아니라 십자가로 품는 길이었습니다. 용서와 포용이야말로 진정한 승리의 길입니다. 5년의 사목을 마치고 돌아가는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저는 사목의 결실이 무엇인지 생각했습니다. 큰 업적만이 결실은 아닙니다. 공동체에 큰 분란이 없었던 것, 신자들이 조금 늘어난 것, 재정이 조금 안정된 것, 후임자를 위해 제대와 독서대를 새롭게 마련한 것, 소성당을 깨끗하게 단장한 것, 이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의 열매입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열매는 서로를 품고, 서로를 이해하며, 공동체를 평화롭게 지켜 온 사랑입니다.
우리도 모두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인호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인호는 우리를 보호하는 은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를 세상으로 파견하는 사명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매듭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매듭을 푸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상처를 깊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상처를 감싸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갈등을 키우는 사람이 아니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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