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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녹) 2026년 9월 2일 (수)연중 제22주간 수요일나는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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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우 묵상] 저항을 뚫고 들어가는 권위 _연중 제22주간 화요일을 준비하며...

191601 서하 [nansimba] 스크랩 2026-08-31

연중 제 22 주간 화요일

고린토 1서 2,10ㄴ-16 복음 루카 4,31-37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루카 4,35)


저항을 뚫고 들어가는 권위


바오로 사도는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의 영이 하느님의 깊은 것까지 통찰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복음은 말씀 한마디로 더러운 영을 몰아내시는 예수님을 보여줍니다. 오늘의 말씀은 겉모습 너머 진짜 속을 알아보는 힘을 묵상하도록 나를 초대합니다.

 

알면서 굴복하지 않는 저항

 

"나자렛 사람 예수님,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없애러 오셨습니까?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이것은 신앙고백처럼 들리지만 신앙고백이 아닙니다. 


더러운 영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안다'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며 거리를 두고, 관계 맺기를 거부합니다. 이게 바로 저항의 본질입니다. 거부는 몰라서 생기는 게 아니라, 알면서도 그 앎이 요구하는 변화를 피하려는 데서 생깁니다. 모르는 것은 순진하지만, 이 저항은 훨씬 교활합니다. 진리를 입으로는 말할 수 있으면서도, 그 진리 앞에 정작 자기 자신을 내어놓지는 않습니다. 것입니다.


때로 앎은 저항의 무기

  

더러운 영이 예수님의 이름과 정체를 먼저 소리 내어 부르는 것은, 주도권을 되찾으려는 전략일 수 있습니다. "내가 너를 안다. 그러니 네가 나를 함부로 다루지 못하게 하겠다"는 식으로 미리 쳐두는 방어선인 셈입니다.

 

이것은 우리 마음속에서도 똑같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종종 내가 누군가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 내가 두려움 속에 살고 있다는 것,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다는 것을 정확히 알면서도, 그것을 말로 또렷하게 표현해버림으로써 오히려 그 진리와 거리를 두고 무뎌집니다.

"그래, 나 그거 알아" 하고 넘어가는 순간, 앎은 나를 바꾸는 힘을 잃고 스스로를 지키는 방패가 되어버립니다.

  

저항을 뚫고 들어가는 권위

  

이 저항에 대해 예수님은 논쟁하지 않으십니다. 설명하지도 않으십니다. 단 한마디입니다.

"조용히 하고 그 자에게서 나가라!"

 

여기에 머물러 봅니다. 예수님은 그 더러운 영의 고백을 인정하거나 대화 상대로 삼지 않으십니다.

저항하는 마음은 늘 대화를 원합니다. 따지고, 정당화하고, 타협하려 합니다. 그것이 저항이 살아남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권위는 아예 그 대화 자체를 하지 않는 데서 나옵니다. 설득이 아니라 명령입니다.

 

우리 안의 저항도 대개 논쟁으로는 풀리지 않습니다. "내가 왜 두려워하는지" 아무리 세밀하게 분석해도, 그 분석 자체가 또 하나의 방패가 될 수 있습니다. 오히려 필요한 것은 그 층을 뚫고 들어오는 단순하고 힘 있는 한마디, 침묵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이 "조용히 하고 나가라."이라고 말씀하시는 순간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나에게 이렇게 물어봅니다. 내 안에서 "나는 이미 다 알아"라고 말하며 정작 변화는 피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더러운 영처럼, 나도 종종 진리를 정확히 말함으로써 오히려 그 진리에 사로잡히기를 피합니다. 오늘 전례는 그 침묵의 순간, 논쟁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가 들어올 여지를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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