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GOOD NEWS 게시판

검색
메뉴

검색

검색 닫기

검색

오늘의미사 (녹) 2026년 9월 10일 (목)연중 제23주간 목요일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가톨릭마당

sub_menu

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안다'에서 '존재한다'로_연중 제23주간 목요일을 준비하며

191784 서하 [nansimba] 스크랩 2026-09-09

 

연중 제 23주간 목요일

1고린토 8,1ㄷ-7.11-13 / 루카 6,27-38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성장하게 합니다." (1고린토 8.1)

 

'안다'에서 '존재한다'로

 

오늘 복음과 독서는 "내가 무엇을 아는가, 무엇을 행하는가"에서 "나는 어떤 존재인가"로의 전환하도록 초대하는 것으로 들립니다.

 

지식에서 사랑으로

 

바오로 사도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지만, 사랑은 사람을 성장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종종 "이건 괜찮아, 저건 안 돼"를 정확히 아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옳은 것을 알고 그대로 행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기는 것이죠. 하지만 바오로는 다르게 말합니다. 내가 아무리 옳아도, 그 옳음 때문에 옆에 있는 약한 형제가 마음 아파한다면, 나는 차라리 내가 가진 자유를 내려놓겠다고요.

이건 사실 손해 보는 선택입니다. 내가 옳은데도 참는 거니까요. 그런데 바오로는 그게 바로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내가 옳다는 걸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옆 사람을 지켜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신앙의 완성은 "내가 무엇을 아는가"에 있지 않고, "내가 누구와 함께, 어떻게 존재하는가"에 있다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존재의 근원으로 돌아는 것

 

루카복음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자에게 잘해 주어라는 솔직히 인간적인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됩니다. 누가 나를 때리면 맞서는 게 자연스럽고, 누가 나를 미워하면 나도 멀어지는 게 정상이니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루카 6.35)

그렇습니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 착한 사람이니까"가 아닙니다. 우리가 이미 그런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해는 착한 사람에게만 뜨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뜹니다. 하느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특별히 훌륭한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있는 하느님 자녀로서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쉽지 않지만, 우리가 그 사랑을 이미 받은 존재라면, 그 사랑대로 사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됩니다.

 

행위가 아니라 존재 방식의 문제

 

독서와 복음 말씀을 함께 읽다보면 하나의 흐름이 보입니다.

바오로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보다 "내가 누구와 함께 존재하는가"를 물고, 예수님은 "원수에게 어떻게 잘해줄까"라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나는 본래 누구인가"라는 존재의 문제로 우리를 이끄셨습니다.

 

참된 신앙은 옳은 행동을 골라내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존재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닐까요. 지식이 교만해질 수 있듯, 도덕적으로 옳은 행동도 여전히 계산적인 자아에 머물 수 있습니다. 진짜 성숙은 관계 안에서 나를 내어주는 존재 방식, 곧 하느님의 자비에 온전히 참여하는 삶을 통해서만 완성됩니다.image.png출처: pixabay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0 35 3

추천  0 반대  0 신고  

TAG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로그인후 등록 가능합니다.

0 / 500

이미지첨부 등록

더보기
리스트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