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건태 신부님_조욱현 신부님 묵상
-
191863 최원석 [wsjesus] 스크랩 08:49
-
김건태 신부님_용서는 용서의 잣대
[말씀]
■ 제1독서(집회 27,30-28,7)
예전에 유다인들은 주님께서 자기의 적들을 멸망시켜 복수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랐었으나, 시간의 흐름과 함께 복수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으며, 기원전 2세기경 집회서의 저자 벤 시라라는 현자는 복수가 아니라 용서의 필요성을 역설하기에 이릅니다. 이 현자는 하느님의 자비가 어떠한 것인지, 하느님께서 사람을 위하여 지니고 계신 연민으로 가득 찬 이해심이 어떠한 것인지 터득했고 가르쳤습니다.
■ 제2독서(로마 14,7-9)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삶을 포기하고 오로지 주님을 위해 살고 주님을 위해 죽는 삶을 살도록 호소합니다. 이는 영적인 참 죽음을 통해서 가능한 일이며, 아울러 이는 참 생명의 샘에 다가서는 일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관대할 수 있으며, 남을 판단함이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 복음(마태 18,21-35)
용서에 관한 비유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은, 우리가 남의 권리를 얼마나 자주 그리고 얼마나 넓게 침해하고 있는지를 일깨워 주십니다. 사악한 종이 자기의 동료에게 탕감해 주기를 거절하고 있는 빚은, 주인이 그에게 탕감해 준 어마어마한 액수에 비하면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것입니다. 100데나리온 대(對) 10,000탈렌트! 1탈렌트가 6,000데나리온에 해당하니, 100對 60,000,000인 셈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엄청난 빚을 탕감받고 살면서도 이웃에게는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우리의 모습이 너무나 한심하고 초라하게 보입니다.
[새김]
예부터 복수는 누구에게든 당연한 것으로 인식됐으며, 물질적인 피해만이 아니라 인격이나 존엄성이 침해될 때는 그 정도가 더욱 심각해졌던 것이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누구로부터 구타를 당했을 경우, 육체에 가해진 타격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손상이 더 심한 문제가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개인적인 삶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역사 또한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복수의 굴레 속에 갇혀 왔으며, 각종 법규가 이러한 혼돈 속에서 어느 정도의 질서 유지를 위해 힘써 왔으나, 만족할만한 결과를 이루어내지 못했다는 것이 바로 그 역사가 주는 교훈이기도 합니다.
사람을 자기 자신의 세계 속에 가두어놓는 죄로부터 자유로워진 그리스도교 신자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이에게 드러난 하느님의 자비를 의식하고 있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복수의 역사를 종식하도록 초대받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그대로 본받아 용서하는 사람으로 거듭난 사람들, 다른 이들에게 베푼 용서가 하느님으로부터 바라고 있는 용서의 잣대가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용서는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여 실천에 옮기고 있는 사람들, 아니면 최소한 그 길이 바른길임을 깨닫고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하느님은 늘 우리에게 자비로우신 분으로 머무시기를 바라시지만, 정작 이웃에게 너그럽지 못한 우리의 모습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또한, 하루에도 여러 번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하는 ‘주님의 기도’를 올리면서 죄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합니다.
이번 한 주간만이라도, 용서라는 화두를 늘 마음에 새기며, 만나는 사람들에게 좀 더 너그러운 모습으로 다가설 수 있는, 신앙인다운 한 주간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1. 하느님의 자비와 인간의 용서
오늘 전례의 주제는 하느님의 자비와 인간의 용서다. 집회서는 이렇게 권고한다. “네 이웃의 불의를 용서하여라. 그러면 네가 간청할 때 네 죄도 없어지리라.”(집회 28,2) 구약에서조차 이미 용서와 자비의 상호성이 드러나 있다. 용서란 단순히 도덕적 행위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신적 행위이다. 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용서는 하느님의 사랑이 가장 위대하게 드러나는 행위이며,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받은 자비를 이웃에게 나눔으로써 하느님 자비의 도구가 된다.”(2842항 요약)
2. 베드로의 질문: 인간적 한계와 신적 사랑의 초대
복음에서 베드로는 묻는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21절) 베드로는 ‘일곱 번’이라는 상징적인 숫자를 사용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배 이상의, “일흔일곱 번까지라도”(22절) 용서하라고 하신다. 즉, 용서는 횟수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 ‘계산되는 의로움’이 아니라, ‘무한한 사랑’의 문제라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구절을 해석하며 말한다. “무한히 용서하라는 말씀은 단순히 인내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용서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닮으라는 초대이다.”(Sermo 83,3 요약) 용서는 인간의 감정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에 참여하는 행위이다.
3. 무자비한 종의 비유: 자비를 거부한 자의 파멸
예수님은 이 말씀을 구체화하기 위해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드신다. 이 비유는 세 단계로 전개된다. 1) 왕의 자비: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일만 탈렌트)을 탕감받은 종; 2) 종의 냉혹함: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감옥에 가둠; 3) 왕의 심판: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33절) 여기서 핵심은 비교할 수 없는 은혜의 불균형이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크기는 인간 사이의 잘못과는 비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은 받은 은총을 거부하는 행위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장면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 종이 동료를 붙잡았을 때, 그는 이미 자신이 받은 자비를 잊은 것이다. 용서받은 이가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는 다시 빚의 사슬에 묶인다.”(Homilia in Matthaeum, 61,4 의역) 하느님께 받은 은총은 ‘나만의 소유’가 아니라, 다른 이에게 흘러가야 할 자비의 강물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4. 자비는 정의를 넘어선 사랑의 법
비유에서 왕은 정의의 기준을 넘어서는 사랑의 법을 보여 준다. 그런데 종은 여전히 “받은 만큼 돌려주어야 한다.”는 율법적 사고에 머물고 있다. 교리서는 이렇게 말한다. “자비는 정의를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완성한다. 하느님의 자비는 정의를 초월하여 새로운 질서를 세운다.”(210, 2840항 참조) 하느님의 자비는 정의의 절정이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하느님의 정의에 닫힌 마음이며, 결국 그 자신이 사랑의 질서에서 제외되는 결과를 낳는다.
5. 용서의 영성: 십자가에서 드러난 자비의 절정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도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이것이 바로 용서의 절정, 하느님 사랑의 완전한 표현이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 “자비로우신 하느님”(Dives in Misericordia, 1980)에서 이렇게 말한다. “십자가는 자비의 절정이며, 용서는 정의보다 더 강한 사랑의 힘이다.”(DM, 7항 요약) 따라서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은 무리한 요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여하라는 초대이다.
6. 용서를 통해 이루어지는 교회의 일치
용서는 단지 개인적 덕목이 아니라, 교회의 본질적 조건이다. 교회는 끊임없이 용서받는 공동체이자, 용서하는 공동체이다. 교리서는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교회는 언제나 죄인들의 화해를 통하여 자신을 새롭게 한다. 용서 없이는 교회의 친교도 존재할 수 없다.”(1425항 요약) 교회 헌장은 성사적 삶을 통해 “신자들이 서로 화해하며 공동체를 새롭게 한다.”(11항)라고 말한다. 용서가 멈추는 곳에서 교회는 깨어지고, 용서가 이어지는 곳에서 교회는 살아난다.
7. 바오로의 가르침: 용서의 근원은 그리스도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신 것은,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로마 14,9)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하느님 용서의 역사다. 우리는 그분의 용서 안에서 새 생명을 얻었고, 그 용서의 사명을 세상에 전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성 이레네오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의 피는 하느님 자비의 언어다. 그 피로 씻김을 받은 이들은 서로 용서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Adversus Haereses, V, Pref. 의역)
8. 결론: 자비의 교회, 용서의 제자
오늘 복음은 경고처럼 들린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하실 것이다.”(35절)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하느님의 자비에 닫힌 마음이다. 우리가 서로를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도 더 이상 하느님의 자비 안에 머물 수 없다. 그러나 용서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처럼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것이 바로 제자의 길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흘러나온 구원의 생명에 동참하는 길이다. “용서는 상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더 큰 힘으로 드러나도록 하는 믿음의 행위이다.”(성 요한 바오로 2세, 일반알현, 1983.9.14. 의역)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
- 함승수 신부님 [ 연중 제24주일 가해]
-
191868
박영희
10:56
-
반대 0신고 0
-
- 양승국 신부님_눈만 뜨면 용서하십시오! 밥먹듯이 용서하십시오!
-
191867
최원석
08:49
-
반대 0신고 0
-
- 전삼용 신부님_용서? 아침에 고행하라!
-
191866
최원석
08:49
-
반대 0신고 0
-
- 이영근 신부님_“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
191865
최원석
08:49
-
반대 0신고 0
-
-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
191864
최원석
08:49
-
반대 1신고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