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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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75 조재형 [umbrella] 스크랩 0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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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에 나갈 때 반드시 챙겨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여권’입니다. 여권에는 내가 누구인지, 어느 나라의 국민인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외국에서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여권은 단순한 신분증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내가 어느 나라에 속한 사람인지를 증명하고, 그 나라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표지가 됩니다. 그래서 해외여행을 하다가 여권을 잃어버리면 참 난감해집니다. 내가 누구인지 증명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에도 이와 비슷한 표지가 있습니다. 바로 ‘인호(印號)’입니다. 우리는 세례와 견진을 받을 때, 그리고 사제가 성품을 받을 때 영혼에 지워지지 않는 인호가 새겨진다고 배웁니다. 이것은 눈으로 볼 수 있는 도장은 아니지만, “너는 나의 것이다. 내가 너와 함께한다.”라고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표지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런 하느님의 표지는 이미 구약에서부터 나타납니다. 아벨을 죽이고 두려움에 떨던 가인에게 하느님께서는 아무도 그를 해치지 못하도록 표를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주어진 할례도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표지였습니다. 무엇보다 탈출기의 파스카 사건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발랐습니다. 그 피가 있는 집은 죽음의 재앙에서 보호받았습니다. 그 표지는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집은 나의 것이다. 이 백성은 내가 지킨다.” 하느님의 재앙이 지나간다, 하느님의 재앙이 건너간다는 의미에서 ‘파스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흘리신 피로 우리가 죽음을 넘어갈 수 있기에, 이 또한 파스카라고 이야기합니다.
신약에 와서는 이 표지가 더욱 깊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피와 성령으로 우리 마음에 새로운 인호를 새겨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단순히 재앙에서 보호받는 백성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보호를 받는 사람은 동시에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전하는 사람으로 파견됩니다. 여권을 가진 사람은 자기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인호를 받은 사람은 자신이 누구에게 속한 사람인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성공이나 재물이나 명예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해 있으면서도 정작 그리스도를 잘 모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예로니모 성인은 바로 이 점을 아주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입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평생 성경을 사랑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더욱 정확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도록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큰 일을 하였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남긴 가르침은 단순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그리스도의 말씀을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라면 하느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여권만 가지고 있다고 그 나라를 잘 아는 것은 아닙니다. 여권에 대한민국이라고 적혀 있다고 해서 대한민국의 역사와 문화와 정신을 저절로 아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세례받았다고 해서 저절로 예수님을 깊이 아는 것은 아닙니다. 견진성사 받았다고 해서 저절로 복음적인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인호가 새겨졌다면 이제 그 인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을 읽으면 예수님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병든 이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연민을 알게 됩니다. 죄인을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자비를 알게 됩니다. 가난한 이를 가까이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십자가를 지시면서도 용서하셨던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글자를 읽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삶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말씀을 읽었다면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을 한 번 더 품어보는 것입니다. “가장 작은 이에게 해 준 것이 나에게 해 준 것이다.”라는 말씀을 읽었다면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말씀을 읽었다면 걱정 속에서도 하느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인호가 “내가 너를 지켜 주겠다.”라는 하느님의 약속이었다면, 신약의 인호는 여기에 한마디를 더합니다. “내가 너를 지켜 주겠다. 그러니 이제 너는 나를 세상에 보여주어라.”
우리에게는 세상의 여권보다 더 소중한 영적인 여권이 있습니다. 세례를 통해 받은 하느님의 자녀라는 인호입니다. 그 여권의 국적은 ‘하느님 나라’이고, 그 여권에 새겨진 이름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고 그 여권을 지닌 사람의 삶의 지침은 성경입니다. 오늘 성 예로니모의 축일을 지내면서 다시 한번 성인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면 좋겠습니다.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입니다.” 매일 성경을 조금이라도 가까이하고,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알고, 그 말씀을 우리의 삶으로 드러내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말과 행동을 보면서 “저 사람은 정말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다.”라고 느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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