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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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81 조재형 [umbrella] 스크랩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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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성(覺醒)’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곧 잠에서 깨어나고, 삶의 참된 의미를 깨닫는다는 뜻입니다. 아침 산책길에 만나는 오리와 다람쥐와 토끼를 보면서 생명의 신비를 깨닫습니다. 흐르는 물소리를 듣고, 곱게 핀 꽃향기를 맡으며, 하늘을 나는 새를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도 천국의 모습을 느낄 수 있습니다. 때로는 원하지 않는 깨어남도 있습니다. 모기 때문에 잠에서 깨기도 하고, 오래 걸은 뒤 무릎의 통증 때문에 몸의 한계를 깨닫기도 합니다. 질병과 고통, 사랑하는 이의 죽음도 우리를 깨웁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수 없으며, 지금 살아 있는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일깨워 줍니다. 오늘 위령의 날은 죽은 이들을 기억하는 날인 동시에, 살아 있는 우리를 영적으로 깨우는 날입니다.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라는 성가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 노래가 마음에 깊이 다가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 오직 신앙 때문에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때로는 눈물이 흐릅니다. 우리의 삶은 불가에서 말하는 ‘인드라망’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내가 바치는 작은 기도가 고통받는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오늘 우리가 바치는 미사와 기도는 연옥 영혼에 큰 도움이 됩니다. 세상을 떠난 가족과 친지뿐 아니라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영혼, 전쟁과 재난으로 세상을 떠난 이들,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모든 이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비록 우리는 그들을 알지 못하지만, 하느님 안에서는 모두가 한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서산대사는 이런 시를 남겼습니다.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걷지 마라. 오늘 내가 남긴 발자국이 뒤에 오는 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오늘 위령의 날을 지내면서 우리의 발걸음을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서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해 욕망의 바벨탑을 쌓으며 살았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가족과 이웃을 위해 묵묵히 희생하며 부활의 십자가를 지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벨탑은 아무리 높아도 언젠가는 무너지고, 사랑으로 짊어진 십자가는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집니다. 지나온 나의 발걸음이 욕망의 바벨탑을 향하고 있었다면 이제 그곳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오늘 내가 남기는 발자국이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천국을 향한 이정표가 되도록 살아야 합니다.
교회는 모든 성인 대축일인 11월 1일부터 8일까지 정성껏 묘지를 방문하여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할 것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허락하는 분들은 묘지를 찾아가 가족과 친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는 그들에게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성화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죽음을 묵상하면 오늘 하루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기 때문입니다. 오늘 감사했던 일은 무엇인지,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였는지, 나 자신과 이웃에게 미안했던 일은 무엇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받은 것은 많으면서도 나누는 데 인색했고,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왔습니다. 죽음은 우리에게 사랑을 다음으로 미루지 말고, 용서와 감사를 오늘 시작하라고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언젠가 허물어질 지상의 집을 세우기 위해 너무 많은 것을 빼앗고 빼앗기며 살아갑니다. 더 많은 재산, 더 높은 자리, 더 큰 명예를 얻으려고 서로 경쟁하지만 죽음 앞에서는 그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늘나라로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소유한 재산이 아니라 나누어 준 사랑이며, 높은 지위가 아니라 낮은 곳에서 행한 봉사이고, 사람들에게 받은 칭찬이 아니라 남몰래 흘린 눈물과 기도입니다. 지금 내가 추구하는 것이 영원한 생명에 도움이 되는지, 오히려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을 막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허물어질 지상의 집을 화려하게 꾸미는 데에만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가난한 이에게 나누고 아픈 이를 위로하며 용서하지 못한 사람을 용서함으로써 하늘에 보화를 쌓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위령 감사송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복된 부활의 희망을 주셨기에 저희는 죽어야 할 운명을 슬퍼하면서도 다가오는 영생의 약속으로 위로를 받나이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은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세상을 떠난 모든 영혼이 하느님의 자비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도록 기도합니다. 우리도 욕망의 바벨탑이 아니라 사랑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며, 언젠가 주님께서 마련하신 영원한 집에 들어갈 수 있기를 청합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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