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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녹) 2026년 11월 5일 (목)연중 제31주간 목요일하늘에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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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조명연 마태오신부님(빠다킹신부님) 11월 5일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192856 박양석 [pys2848] 스크랩 2026-11-04

2026년 11월 5일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영국 철학자 제러미 벤담의 공리주의를 기억할 것입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원리입니다. 이 원리에 따라, 종종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소수의 희생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수의 고통 역시 도덕적 판단에 포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대를 위해 자기를 희생한다면, 이는 사랑과 헌신입니다. 하지만 대를 위해 남을 희생시킨다면 폭력과 불의가 될 수 있습니다.

 

인사이동이 되어 새로운 신부가 본당 신부로 왔습니다. 그런데 전의 본당 신부와 다른 모습으로 사목하시는 것입니다. 전례도 달라졌고, 본당 행사에도 많은 차이를 보였습니다. 여기에 불만을 품은 신자들이 신부님께 항의했습니다. 이에 신부님께서는 웃으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가지로밖에 섬김을 받을 줄 모르는 하느님이시라면 그게 무슨 하느님이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서로 다른 길을 가는 다양한 걸음으로 하느님께 다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일을 하는데 자기 뜻만 옳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음식도 한 가지만 먹으면 질리지 않습니까? 하느님을 향해서도 다양한 섬김이 있어야 합니다.

 

어느 한쪽만 맞다는 세상의 원칙을 따르는 생각을 피해야 합니다. 그보다 하느님 뜻을 떠올리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자기의 겸손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 특히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자기의 기준으로만 판단합니다. 세리와 죄인들을 부정한 사람으로 규정하고 접촉 자체를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과 함께하는 예수님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그들을 향해 되찾은 양과 되찾은 은전의 비유 말씀을 해 주십니다. 여기서 특별히 잃어버린 양 비유를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잃어버린 양 하나 때문에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찾아 나설까요? 99%를 위험에 노출한 채, 1%를 찾아 나서는 것은 계산을 벗어난 사랑의 논리입니다. “잃을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루카 15,4)라고 하시면서, 끝까지 찾아 나서는 하느님의 주도적 열정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찾은 양을 어떻게 데리고 옵니까? 길을 잃어버렸다고 책망하거나 매질하지 않고, 자기 어깨에 얹어 데려옵니다. 이렇게 큰 사랑을 가지고 우리에게 오시는 하느님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겠습니다.”라고 하면, 그때 주님께서 다가오실까요?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직접 우리를 찾으시고 당신 어깨에 얹으십니다. 구원의 주도권이 철저히 주님께 있는 것입니다. 이 주님의 사랑을 기억한다면, 다른 이를 세상의 논리로 함부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너무나도 다양한 방법으로 하느님께 찬양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명언: 어머니의 눈물 속에는 과학이 다 헤아릴 수 없는 깊은 바다가 있다(스티븐 킹).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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