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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ㅣ체험
도란도란글방 / 우리는 아사(餓死)할 수밖에 없는 존재 (사도 7.17-18)

148673 김종업 [rlawhddjq] 스크랩 2021-07-30

(공동번역성서) 2021. 7. 30. 도란도란글방

 

48) 우리는 아사(餓死)할 수밖에 없는 존재 (사도 7.17-18)

 

(사도7,17-18)

17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어 주실 때가 가까와 오자 우리 백성은 번성해서 온 에집트 땅에 퍼져 나갔습니다. 18 그런데 요셉의 내력을 알지 못하는 다른 왕이 에집트를 다스리게되었습니다. 아맨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살펴볼 어구가 때가 가까와 오자라는 단어와 또 알지 못하는이라는 고런 어구에요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역사는 절대 인간에게 무엇을 가르칠 수 없다라는 것이 헤겔에 대명제인데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뭐를 배울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에요. 역사, 굉장히 거창한데 인생이라고 생각해도 되죠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통하여 뭔가를 배울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못된다는 거에요

분명히 에집트왕 파라오라면 그 에집트에 일어났던 일 정도는 한번이라도 들었을 겁니다. 그렇죠 400년이 지났어도 어떻게 에집트가 그 기근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지금 에집트왕 파라오가 그냥 이스라엘 사람들 히브리 사람들이 거기서 이렇게 번성하는 것을 보았다라고 했으니까 그들이 왜 거기에 들어와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을 분명히 들었을거에요

왜냐면 왕 옆에는 책사들이 굉장히 많이 있었기 때문에 역사를 줄줄 꽤고 있었던 선생들이 굉장히 많았단 말입니다 그들이 그걸 몰랐을리 만무거든요 그런데 인간은 그러한 역사가 왜 일어났는지 그리고 그 역사를 뒤에서 일으키신 분이 누구이신지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어요.

 

시편에 보면 어리석은 자들은 하느님이 없다고 한다라고 하죠 그런데 신약성경으로 넘어와 보면 모든 인간이 다 우매하고 어리석어요 그래서 하느님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고 생각이 없어요.

그래서 자기에 인생에 일어난 일 조차도 어떻게 왜 일어난 것인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도 안하고 그리고 어떤 일을 겪었을 때는 분명히 이게 하느님이 나에게 이렇게 일을 허락하셨구나 라는 자각이 있었음에도 세월이 지나면 금방 고걸 잊어버리는게 인간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역사를 통하여 자기 인생을 통하여 다른 말로 경험을 통하여 절대 무언가를 배울 수 없는 존재라는 거에요

사람들이 이것저것 경험하고 체험을 하다보면 하느님을 알게 되고 그렇게 된다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런 일은 없습니다. 심지어 뭐 대단한 불치병이 나은 경험이 있다 할지라도 조금만 지나면 그게 하느님이 해주셨다라는 감사가 사라지는게 인간이에요

그래서 절대 인간들은 기적으로 하느님을 배울 수가 없어요. 그리고 교훈을 얻을 수도 없어요. 그러니 하느님이 그런 일을 여러분 삶 속에 허락 하시겠냐구요. 하느님이 하시는 일과 마귀가 하는 일을 잘 분별해야 되는데 이 시대는 그런 분별 능력이 없어요

하느님은 하느님의 영광을 챙기시기 위해서 인간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상황과 처지속으로 밀어내리시고 그리고 그 속에서 믿음이라는 것으로 하느님을 붙들게 하시는 것이지 인간들이 어떤 것을 이렇게 경험하고 수긍하고 설득되어진 상태에서 야 그러니까 하느님을 붙들어야 되겠구나이렇게 일을 안 하신다구요

하느님은 당신에 영광을 챙기셔야 돼요 하느님에 능력이 가장 어 멋지게 나타나는 곳이 바로 도저히 어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감사할 수 없고 기뻐할 수 없고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상태에서 어떤 존재들에게 평화와 기쁨과 안식이 있는거.

그게 어떻게 가능해요 그거 불가능한거라고 여전히 상황은 암울하고 여전히 걱정 투성이인데 그 걱정과는 또 별개로 나에게 나를 좌절시키고 절망시키지 못하는 평화, 그 하느님에 그 구원에 대한 그 희망, 이게 있는게 이게 어찌 기적이 아니겠어요 그게 기적인거에요 그런게 하느님의 권능이며 능력인 거에요

우리는 어떤 경험이나 체험이나 이런 것으로 절대 교훈을 받을 수 없고 절대 거기에서 하느님을 이렇게 인식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되냐면 하느님이 뚫고 들어오실 수 밖에 없는 거에요 그걸 은혜의 복음이라 그래요

그러니까 하느님이 뚫고 들어오셔서 당신이 완료하실 수 밖에 없는 구원의 역사 그 위대함이 구원의 위대함이 들어나기 위해서는 우리는 자꾸 그것을 방해하고 믿지 못하고 흔들리는 존재임을 수시로 폭로당해야 되요 나한테 나 자신에게 그래야 하느님이 끌고 가시는구나가 점점 오롯이 들어나게 되는 거지 아 나는 이제 확신해요 확실해요 이런 식으로 그건 신앙생활을 뭔가 이렇게 크게 착각하고 있는 거에요

 

평화는 하느님이 붙들고 계시면서 우리와 이렇게 늘 우리와 함께 계시지만 자주 하느님이 우리를 떠난듯한 경험을 우리에게 계속 하게 해주세요 그래야 인간은 아 하느님이 나와 연합이 되어 있는 그 상태에서만 나는 비로소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구나를 배울 수 있는거기 때문에,

늘 행복하고 늘 평화로울 수 없어요 그러나 평화가 우리 안에 들어와 있다라는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구원에 완료는 흔들리지 않는다는게 평화지, 늘 나는 평화로와요 늘 웃고 다녀 그냥 얼굴 근육이 아예 웃음으로 응 굳어져 버렸어 그걸 그냥 평화 기쁨 안식 이렇게 생각하면 큰 오산이에요

저는 선택받은 사람이 아닌거 같은데 어떡하죠 왜 늘 기쁘지가 않아요 늘 마음에 평화로운게 없어요 이렇게 안심이 되지 않죠 늘 불안해요 계속 이런 질문만 해요 그게 너무 많아요 저도 그래요.

사도 바울로도 죽기 얼마 전까지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 줄 것입니까(로마7,24)) 라고 이렇게 불안에 떨면서 갔는데 여전히 자신에 몸을 죽음의 몸이라고 지칭했다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도바울로가 구원에 대한 그 희망을 잃어버린 적이 없어요. 그런데 사도 바울로에 현실은 막 뭔가 흔들리고 있는데 하느님은 그를 꼭 붙들고 있는걸 평화라고 하는 거에요 그러니 내가 흔들린다고 해서 나는 아닌가봐이렇게 생각하면 안되는 거에요

 

구원에 확신은 내가 뭔가 이렇게 확신으로 꼭 붙들고 있는게 아니라 하느님이 하신 역사적 객관적 그 사실 십자가라는 그 역사적 객관적 그 사실 역사속에 그냥 꽉 꽃혀버린 그 십자가에 의해 확신이 되야 되는 것이지 내가 갖고 있는 기분이나 감정으로 확신을 붙드는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조금만 그냥 자기가 신앙생활 불성실한 거처럼 이렇게 생각이 되면 그냥 불안해하고, 두려워가지고 어쩔줄 모르고 그러는 거에요 하느님이 내가 기도할 때 오셔야 되는데 아 내가 혹시 그냥 부부싸움할 때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어떡하지이런 생각들을 하는 거에요

아무리 그 사람이 심지어 살인을 저지르고 있는 순간에 예수님이 온다 할 지라도 당신이 선택한 백성은 그 삶의 현장에서 끄집어 내는게 하느님이란 말입니다 그게 하느님에 열심인 거에요

여러분 살인이라는걸 다른걸로 생각하지 마세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게 살인이라 하느님이 직접 그랬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죽는 순간까지 매순간까지 살인하고 있는 자들이에요 살인에 대한 형벌은 뭐라 그랬어요 하느님이 사형이라 그랬잖아요 그러니 죽을 때까지 우리는 사형이라는 그 선고를 그냥 확정받는 자로 살아요

이 세상에서 착하게 산 모든 일은 여러분이 매순간 형제를 사랑할 수 없는 그 살인행위에 다 묻히는 거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지들의 착한일을 스스로 챙긴다니깐요 참 이 철학에 개념을 뛰어넘는 그게 신학이거든요 철학은 그 밑에서 인본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그러니 사람들이 아무리 이런 복음을 설명해도 이해를 못하는 거에요 선이 뭔지 착함이 뭔지 악이 뭔지 죄가 뭔지를 인간들은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를 못해요 우리가 숨쉬는 거 자체가 죄에요, 왜 우리는 사랑할 수 없는 존재거든요.

 

어떻게 세상이 성경을 이렇게 오해할 수가 있는가 인간들은 철학과 상식수준에서 인문과학 수준에서 성경을 보는 거에요 그러니 용서하자 사랑하자 착하게 살자 선행을 행하자 뭐 여기에서 머물러 있는 거에요 성경을 전부 그렇게 오독하는 거죠

성경을 읽을 때 반드시 배제해야 할 게 뭐냐면 인간 종교 도덕 윤리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인간 종교 도덕 윤리를 포함시켜서 읽게 되면 전부 自意적으로 해석하게 되요. 이게 인간에게 어떤 도움이 될까 어떤 교훈을 줄까 이건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무슨 메세지를 전하는 것일까 이거는 우리에게 어떤 종교적 행위를 요구하는 것일까.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니라 하느님이 뭘 하셨는가에 대해 기록되어 있는 거에요

그런데 인간들은 전부 거기서 자기가 해야 할 길을 찾아내려고 그래요 이런 답답한 일이 있습니까 그러니 그걸 의 마일리지를 꼬박꼬박 쌓아서 하느님 앞에 가져 가려고 하는 거에요 그러니 늘 불안한 거에요 왜 늘 만족스럽지 못하거든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늘 폭로당하기 때문에 어 이건 아닌데 하느님 혹시 요거는 안보셨겠죠뭐 이런 식으로, 왜냐면 내가 뭔가를 해서 하느님께 가야된다라는 생각이 은연중에도 있어요

그러니까 하느님이 자근자근 밟아 주시는게 복이라니깐요 사람은요 이 세상에 힘이 주어졌을 때 거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어요 진짜.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도 요즘 돈좀 벌고 나서 완전히 얼굴보기 힘든 사람들이 있어요 우리 교회도 이 사람은 안 그럴줄 알았는데 일이 너무 잘되니깐요 하느님 뒷전이에요 신앙생활은 뒷전이에요 그러다가 한방에 가는 거에요.

그러니 하느님이 그냥 여러분이 절대로 그 하느님에 이름을 부르짓는 그 자리에서 떠나지 않을 만큼 그냥 자꾸 이렇게 끌어 내리는걸 복이라고 생각하면 되요. 여러분이 하느님에 이름을 부르는 그 상태와 그 자리 그것만큼 큰 복이 어디있습니까

 

그 하느님을 모르니까 인간들이 그렇게 그냥 자꾸 자기에 문제나 해결해달라고 소원이나 들어달라고 그러고 이러고 있는거지. 그리고 그냥 자기에 어떤 선한 일 착한일 이걸 갖고 자기에 그 인기를 교회에서도 챙길려고 하고, 그러니 이리봐도 회색빛이고 저리봐도 회색빛이고 안볼래도 보이는걸 어떡해요 그게 뻔히들 마음이 이렇게 되는걸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그랬잖아요 그런데 그 분은 너무 좁고 협착해서 찾는 이가 없다 그랬어요 좁은 문이 뭘까요 자기 부인이라니깐요 예수만 붙드는거 하느님만이 내 인생에 주인이시고 난 아닙니다. 그런데 이 세상 교회들이 전부 넓은 문으로 가고 있어요 그러니 고생하는, 뭐 힘겹게 가난하게 가는거 이걸 좁은 길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럼 간디가 좁은 문으로 간 사람이에요 수도사들이 다 좁은 문으로 간거에요 힘들고 어려운 그 고난의 길을 갔으니까 그거 아니에요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길을 평생 그냥 빤스 하나 입고 그렇게 살았다 할지라도 고걸로 야 이 이 내가 이정도로 이렇게 고난을 통과하면서 갔는데 하느님도 날 이뻐해주시겠지그게 넓은 문이에요

내가 나의 가치를 챙기는 그 만약에 그러한 의도로 순교했다 할지라도 그게 넓은 문이에요 그 사람 바로 순교하는 순간 지옥가요 그래서 여러분 모든 순교자들을 다 위대하게 보지 마세요 그러한 마음으로 순교한 사람들 태반이에요 아세요 그래 인간들에게 너무 후한 점수들을 주는 거에요 이 인본주의가 그러니 뭐 착한일을 하고 뭐 순교도 당하고 이러면 다 그냥 위대한거라고 생각들을 하는 거에요 그런거 위대한거 아니에요

 

오직 위대한 분은 하느님 한분이에요 이 세상에서에 정말 가치있는 함이란 예수 그리스도에 함 하나밖에 없어요

우리가 무슨 사랑을 하고 무슨 용서를 합니까 여러분 마음속에 진심으로 용서되는게 몇개나 있어요 그냥 힘없으니까 그냥 아예 관심을 안두는 거. 만약에 내가 그걸 갚을 힘이 있다면 아마 당장 가서 때려 죽일 걸요 그러니 그럴 용기도 없고 그럴 힘도 없으니까 놔두는거고 그냥 잊은 거고 벼른거지 무슨 인간이 용서를 해요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에 사랑으로 하느님과 내 이웃을 사랑합니까 우리는 하느님에게 용서받아야 될 존재고 하느님에게 사랑 받아야 될 존재에요 용서와 사랑은 완료되어서 우리 안에 선물로 주어지는거지 우리가 해나가는게 아니에요 우리는 사랑과 용서를 훈련하고 연습하면서 우리는 왜 정말 참다운 사랑과 용서를 못하는가를 배우는 거에요

그래서 열심히 사랑해 보는 거에요 열심히 용서해 보는 거에요 그런데 어느날 그게 내가 나는 사랑할 수 없는 존재고 용서할 수 없는 존재구나가 이렇게 발각이 되면 아 나는 용서받은 존재지 용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구나라고 이게 진짜 진심에서 이해가 되면 나에게 해꼬지를 한 사람에 그 행위가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지는게 용서에요

그래서 용서는 선물로 주는 거지 주어지는 거지 내가 용서한다고 애쓰는게 아니에요 그래봐야 잠만 안와요 화가나서, 불면증에 걸리고 그러는 거에요 하느님에 은혜를 배우세요 그리고 애써 보면서 나는 얼마나 불가능한 존재인지를 확연히 깨달으시면 되요 그러면은 사랑과 용서가 어느틈에 나에게 와있는걸 알게 될거에요

그런데 그 과정 속에 예수님에 십자가와 은혜가 들어있다라는걸 다른 사람들 못봐요 우리는 알아야 되요 내가 노력해서 한게 아니라 하느님이 이렇게 해주시는 거구나 나는 실패할 수 밖에 없는데 하느님이 나를 이렇게 열심히 끌고 가시는 구나배우면 되는 거에요

그러니까 여러분에 삶 속에서 일어나는 그 수많은 역사들 늘 말씀에 비추어서 하느님에 주권속에서 해석할려고 애를 쓰셔야되요 적어도 하느님을 안다고 하는 우리는.

하느님을 모르는 에집트의 파라오는 그걸 그렇게 넘김으로 말미암아 결국 열가지 재앙에 던져지게 되었지만 심판이거든요 나중에 에집트가 깜깜해진게 이게 심판이에요 어둠.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깜깜해졌죠 심판이란 말입니다 그런자들은 심판받는다를 그림으로 보여주는 거에요

 

그러나 우리는 역사와 인생을 통해 하느님을 배워야 돼요 모든 건 다 하느님의 때가 있어요. 에집트왕 파라오가 이렇게 막 그냥 들쑤시고 나셨는데 그게 하느님이 약속하신 때가 가까움에그러죠 하느님은 당신이 계획세우신걸 한치의 오차도 없이 착착 진행하고 계시는 거에요

그러니까 여러분에 현실은 다 하느님이 계획속에 들어있는 거에요 그렇다면 여러분이 지나가고 있는 이 현실이 결코 절망에 순간만은 아니다라는걸 아셔야죠. 그렇게 배가 고파서 곧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이 되어 알지도 못하는 이방땅으로 가야 하는 야곱에 후손들에 신세, 75명에 그 운명 얼마나 처절해요 그렇지만 그게 구원의 시작이잖아요.

그리고 거기 에집트에서 이렇게 그냥 노예로 고생하고 지프라기도 안주면서 벽돌을 만들라 그러고 짚이 안들어가면 벽돌을 어떻게 만들어요 만들어지면 부셔지고 그러한 수모를 당하면서까지 그 시간을 살아내야 했던 그들의 삶, 그게 하느님에 구원에 역사 그 과정 중에 있었던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 그게 복이죠. 사실은 우리는 다 이렇게 한면으로 볼 수 있으니까 그게 복이야 그렇게 해서 야 너희는 이 세상이 정말 너희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곳이 아니다라는걸 깨달으면 돼 우리는 막 그렇게 응원하잖아요 막 읽으면서도 왜 우리의 삶 속에서는 그걸 못 읽느냐구요.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그 일을 하느님의 때 안에서 하느님에 이끄심 안에서 해석할 수 있어야 돼요 때가 차서, 하느님에 약속하신 때가 가까움에 그들을 알지 못하는 에집트왕 파라오가 일어나서 그때 하느님에 그 역사를 완수하는 그 어마어마한 하느님에 그 경륜과 하느님에 섭리를 잊지 말고 여러분에 삶 속에서도 오늘 하느님에 창세전에 계획하신 일들이 분명 일어날 것이다라는 거 잊지 마세요.

야 재수 더럽게 없네 오늘 같은날 참 내 인생에 없었으면 좋겠다’. 이런 말 하지 마세요 그 삶 속에 분명히 여러분의 삶 속에서도 이루어질 하느님에 뜻이 있는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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