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4일 (일)
(백)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성서 주간)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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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전국 교구 교구장 성탄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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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 [goodnews] 쪽지 캡슐

2023-12-22 ㅣ No.2736

2023년 전국 교구 교구장 성탄 메시지

 

서울대교구

광주대교구

대구대교구

대전교구

마산교구

부산교구

수원교구

안동교구

원주교구

의정부교구

인천교구

전주교구

제주교구

청주교구

춘천교구

군종교구

 

 

 

 

[서울대교구]

우리 안의 선함을 이끌어내시고자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예수님이 오십니다!


“(동방 박사들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마태 2,11)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아기 예수님의 거룩한 탄생을 함께 기뻐하며 축하드립니다. 성탄의 기쁨이 온 누리에 가득하기를, 특별히 전쟁으로 죽음의 공포와 위협 속에 놓여 있는 나라의 국민들과 북녘의 동포들을 포함하여, 가난하고 소외된 분들과 위로가 필요한 우리 사회의 모든 분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이 큰 희망과 힘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실 때에 전능하신 하느님의 아들로서 위엄 가득한 다른 모습으로 오실 수도 있었을 텐데,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갓난아기는 인간 존재 중에서도 가장 연약하고 힘없는 존재입니다. 어머니의 도움 없이는, 주변의 도움과 사랑 없이는 성장할 수 없고, 존속할 수도 없는 약하디약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아드님, 만왕의 임금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런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기들은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 비록 자기 가족이 아니라 하더라도, 아기를 보는 이들의 마음을 선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엄마의 품 안에 안겨 있는 아기가 우리를 향해 방긋 웃어주면, 보는 이는 누구라도 ‘무장이 해제되고’ 각자의 마음 안에 원래부터 있던, ―그러나 많은 경우 바쁜 삶을 사는 중에 잃어버리고 지내왔던― ‘선함이 눈을 뜨게’ 됩니다. 아기들은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존재이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선함을 이끌어내는 그런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가장 연약한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심은 우리 안에 원래부터 내재해 있던 선함을 이끌어내시고자 함이었을 것입니다.

우리 사회 안에는 여러 모습으로 힘없고, 가난하고, 소외된 분들이 계십니다.아기 예수님이 우리 안의 선함을 이끌어내시고자 가장 연약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듯이,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의 도움과 사랑을 이끌어내시기를 바라시며, 힘없고 가난하고 소외된 분들 그 안에 현존하고 계십니다. 누구나 건강하고 멋진 삶을 누리고 싶어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누군가는 질병이라는 십자가를, 또는 가난이라는 십자가를, 혹은 다른 여러 형태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살아 갑니다. 그들은 우리 모두 안에 있는 선함을 일깨우면서, 우리의 사랑을 기다리고 계시는 아기 예수님의 몫을 살고 계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하시는 ‘시노드 교회’란 다 함께 걸어가는 신앙의 여정, 곧 삶의 여정에서, 하느님과 깊은 친교를 바탕으로 이웃들과 친교를 이루고,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고 선포하는 선교하는 교회를 살며, 거기에 우리가 모두 주인공으로 참여하는 교회를 말합니다. 우리가 살아야 할 시노드 교회를 위하여 함께 걸어가면서, 특별히 힘없고 가난하고 소외된 분들 안에서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하느님께서 심어주신 우리 안의 선함을 이끌어내시고자 가장 연약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신 아기 예수님의 부르심을 들어봅시다.

성모님의 전구 속에, 우리 사회의 힘없고 가난하고 소외된 분들이 친교의 공동체, 선교하는 공동체, 모두가 주인공으로 참여하는 공동체의 한 주역으로서, 복음을 듣고 나아가 복음을 선포하는 주인공이 되실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배려하고 존중하는 교회를, 그런 사회를 만들어 갑시다. 우리에게 오신 아기 예수님의 축복이 늘 풍성한 한 해 되시길 기도합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평양교구장 서리
대주교 정순택 베드로

 

 

[광주대교구]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오늘 우리는 대림 시기 동안 열심히 준비하면서 기다려 왔던 성탄 대축일을 맞이했습니다. 기쁜 성탄을 맞이하여 신자 여러분의 모든 가정에 하느님의 축복과 은총이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부유함도, 권력도, 명예도 없이 평범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인간의 시선으로는 아무런 힘도 없어 보이지만 참된 행복을 선포하시고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 주실 구세주가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보다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며 십자가의 길을 제시하십니다. 누구도 쉽게 따라나서지 못하고 망설였지만, 자연의 섭리가 몸에 밴 가난한 어부들이 주님을 먼저 따라나섰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교회 공동체는 무너지지 않고 이천 년의 역사 안에서 굳건히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천 년 전 바로 오늘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구유 안의 가난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당시에는 아기 예수님을 맞아줄 따뜻한 방 하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구간에서 아기 예수님은 이 세상 삶의 첫 순간을 맞이하여야 했습니다. 오늘날 높이를 자랑하는 수많은 아파트와 그 안에 빈방들이 넘쳐나지만, 세상을 찾아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따뜻하게 맞아줄 방이 있을까요? 어쩌면 가난한 목수의 아들인 예수님은 서울의 고시촌에 몸을 누일 수밖에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은 주님을 알아보고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따릅니다.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아가는 가난한 목동들은 구유 위에 계시는 아기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왕좌에 앉아 권력을 행사하던 헤로데 왕은 하늘의 표징을 읽어내지 못하고 왕권 유지에 집착한 나머지 잔혹한 살인까지도 저질렀습니다. 예수님은 다윗왕의 후손으로서 세속적인 왕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게 아니라, 오히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하며 우리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의 왕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사람들은 다윗 왕의 후손인 예수님께서 조국을 식민지에서 해방시키고, 어지러운 사회를 바로잡을 것으로 희망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국가의 통치와 같은 큰 문제부터 삶에서 부딪치는 구체적인 문제들까지 속 시원하게 해결해 주는 왕으로 오지 않으셨습니다. 기적적으로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설교로써 사람들을 감동케 하는 힘을 보여주셨지만, 더 이상의 힘은 발휘하지 않으셨습니다. 실망한 제자 유다는 예수님을 팔았으며 참된 구세주가 아니라고 생각한 군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 죽음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아직도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메시아가 아니라고 말하며,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를 여전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왕 대축일 복음에 보면 “여기 있는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라고 언급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가운데 가장 작은 이는 누구일까요? 인생을 살다 보면 어느 누구라도 가장 작은 이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중에 죄를 짓지 않았지만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사람들은, 고통이라는 감옥에서 여전히 빠져나오지 못하고 혼자서 외롭게 나그네 살이를 하기도 합니다. 세월호나 이태원 참사의 유가족들이 그와 같을 것입니다. 또한, 지금 이 순간에도 전쟁의 포화 속에서 두려움에 떨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참혹한 현실과 불확실한 미래에서 머물 곳과 먹을 것을 걱정하며 하루하루를 견뎌내는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작은 이들입니다.

사실 명예나 부, 권력과는 상관없이 삶 속에서 심한 갈증을 느끼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 나 혼자라고 느껴지는 순간도 많고,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도 생깁니다. 그때 우리는 주변의 작은 이들의 힘겨운 상황에 귀 기울이고 고통에 공감할 뿐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에는 기꺼이 손을 보태는 삶을 살도록 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가장 작은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함께’하시는 의미는 서로 작은 이로서 서로를 사랑하고 어둠과 절망 속에 있는 이들에게 빛과 소금이 되라는 데 있습니다. 그것이 죽음의 삶에서 생명의 삶으로 건너는 구원입니다.

오늘 성탄절을 맞이해서 우리 마음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찾아오실 수 있는, 작지만 넉넉한 장소로 만들어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탄생의 장소로 마구간을 선택하셨다는 것은 우리 마음을 작은 이웃들을 향해 열어두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아기 예수님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가장 작은 이웃들을 환대하며 그들과 함께 성탄의 기쁨을 만끽하시길 빕니다.

2023년 12월 25일
천주교 광주대교구 교구장
옥현진 시몬 대주교

 

 

 

[대구대교구]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마태1,23)

 

 

사랑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참된 메시아로 오신 오늘을 교구민 모두와 함께 기뻐하며 축하합니다. 올 한해 ‘친교의 해’를 살아간 우리 교구는 저 하늘의 하느님과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이 하나 되는 성탄의 신비를 친교의 절정이자 핵심으로 맞이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친교는 예수님 안에 우리 모두가 한 몸이 되는 ‘그리스도의 신비체’(1코린10,16;콜로1,18)를 향해 꾸준히, 끊임없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인간이 하나 되는 성탄의 시간에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 안에 어떻게 육화하고 있는지 자문하고 성찰해야 합니다. 특별히 가난하고 소외된 이의 자리를 당신의 자리로 여기시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 역시 보다 가난하고 보다 소외된 이들의 삶을 형제적 사랑과 친교로써 함께 어루만지고 보듬으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세상은 함께하는 삶의 가치를 소홀히 여겨 관계의 단절과 극한 대립의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지난 한 해는 국내외적으로 전쟁과 대립으로 어려운 해를 보냈습니다. 
 우리가 보고 듣는 뉴스는 이른바 거대 담론의 이야기만 흘러나옵니다. 세상 지도자들의 권력욕과 정치적 야심 때문에 벌어지는 갈등과 대립 속에 일상을 살아가는 가난한 이들과 작은 이들은 늘 소외되고 무시당하고 있습니다.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의 전쟁과 다툼으로 죽어가고 상처받는 서민과 백성은 역사 속에 묻혀 그 존재의 가치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 베들레헴의 외진 곳에 오신 이유는 세상을 호령하던 유다의 종교 지도자들과 로마 총독들의 권력 다툼과 야심 뒤편에 숨죽이며 하루하루를 살아내었던 소시민의 상처와 슬픔에 함께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한 줌 권력과 욕심으로 얼룩지게 만드는 인간의 어리석음은 오늘도 우리 삶 곳곳에 횡행합니다. 작은 이들을 귀히 여기고(마태18,10), 가난한 이들을 업신여기지 않으며(야고2,1-5), 보잘것없는 이들을 하느님처럼 여기는 우리의 마음(마태25,31-46)이 예수님의 마음이고 그리스도인의 마음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은 비단 인간을 향해서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 모든 피조물을 향한 회개의 마음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기후 위기에 따른 생태적 회개는 시급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너무 더디게 진행됩니다. 삶의 여유를 지닌 이들에게 기후 위기는 그리 심각한 것이 아니지만, 가난으로 생계의 어려움 속에 갇힌 이들이나, 생태계 사슬의 최하층에 존재하는 생명들에게 기후 위기는 생존 위기로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인간의 편리를 위해 수없이 생산되는 물건들과, 그것을 허투루 사용하거나 사용하지도 않고 버려지는 수많은 생산품들, 그리고 성장과 발전이라는 미명 하에 자행되는 난개발 등이 자연 생태계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다는 사실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리로 직접 선택하신 이 세상의 뭇 생명들의 아름다움과 고귀함을 짓밟는 안타까운 일임을 우리 모두는 자각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것은, 뭇 생명들이 각자 제 종류대로 서로를 향해, 서로를 위해, 서로 함께 조화를 이루기 때문입니다(창세1,25).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지난 11월 19일 ‘제7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 미사 강론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그분 사랑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타인을 위한 선물이 되라고 부름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오늘, 우리 모두는 세상 모든 생명체 안에서 서로를 위한 선물이 되었으면 합니다. 새로운 한 해를 앞두고 다시 맞는 성탄의 시간은 대립과 갈등의 세상을 친교와 화해의 자리로 기억하고 되새겨야 할 숙제를 남깁니다. 세상이 서로를 미워하고 다투며 그것으로 아파할수록 우리의 친교와 화해는 더욱 간절하고 위대합니다. 오늘 우리 삶 한가운데 오신 하느님을 믿고 따르며 세상의 모든 아픔을 함께 나누는 친교의 삶을 더욱 열심히 살아가도록 합시다. 

 하느님께서 오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 큰 기쁨과 축복이 우리 교구민 모두에게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2023년 12월 25일 주님 성탄 대축일에
천주교 대구대교구장 조환길(타대오) 대주교

 

 

 

[대전교구]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루카 1,76)

 

 

   + 찬미 예수님!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느님의 외아들께서 이 세상에 탄생하셨습니다. 주님의 탄생을 교구의 모든 형제자매 여러분과 함께 기뻐하며, 여러분 모두 그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시기를 빕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하느님 자비의 절정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며 시작한 구원의 역사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권능과 자비에 대한 깊은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끊임없이 하느님의 뜻에 등 돌리고 사는 자신들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가난하고 힘든 시절보다 주님의 은총이 충만했던 부유한 시절에 오히려 죄악이 커졌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원이 자신들의 의지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을 고백하고, 주님 친히 이루어주시는 구원을 갈망하게 되었습니다. 메시아를 보내주시고 새로운 계약을 맺어주신다는 말씀은 하느님 백성의 이러한 갈망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이셨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때가 차자 하느님의 약속이 이루어졌습니다. 태초에 세상을 창조하신 말씀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신 분께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가 온 것입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3,2; 4,17)는 말씀은 세례자 요한이 한 설교의 첫 말씀이며,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하시며 선포하신 첫 말씀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어 태어나실 때, 이 신비를 목격한 증인들 그리고 이 신비가 이루어지도록 함께 한 여러 인물들이 있었습니다. 즈카르야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은 예수님의 길을 준비한 세례자 요한을 낳아준 사람들입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방문했을 때, 태중의 아이가 뛰논다고 말하면서 마리아를 ‘주님의 어머니’라고 불렀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주님을 낳으신 주역입니다. 목동들은 천사들의 소식에 놀라며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신 시간에 함께 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계시를 받고 먼 길을 찾아와 아기 예수님께 준비해온 예물을 드렸습니다. 이들 모두 우리가 주님을 믿고 신앙의 여정을 가는 길에서 모범이 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은 아주 특별한 인물입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 요한은 엘리사벳의 태중에서 즐거워 뛰놀았다고 합니다. 이는 영적인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즈카르야는 막 태어난 자신의 아이를 두고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루카 1,76)라는 예언을 했습니다. 주님께서 준비하신 구원의 신비가 성령 안에서 이렇게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영성생활도 이와 같습니다. 성사와 말씀의 은총 그리고 주님을 닮은 자비로운 삶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은 성령의 감도에 이끌리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은 성장하여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자신의 사명을 깨닫고 광야로 나갑니다. 그는 낙타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지냈다고 합니다. 광야는 홀로 고독한 시간 안에서 하느님만을 대면하며 자신의 길을 찾는 장소입니다. 마치 깊은 피정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셔서 악마의 유혹을 받으셨습니다.(마태 4,1) 우리에게도 이런 시간이 필요합니다. 세상사에 쫓기며 올바른 가치를 잊을 수도 있고,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열정을 쏟으면서 정작 하느님은 잊고 살 수도 있습니다. 고요한 침묵 속에 내가 정작 무엇을 쫓고 살고 있는지, 내 삶에서 주님은 어떤 분이신지, 내 이웃은 나에게 어떤 존재인지 깊이 묻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은 참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겸손은 주님을 아는 데에서 나오는 진정한 겸손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주님의 길을 준비하라고 외치는 소리 역할을 할 뿐이며,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고 당당히 밝혔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우리 신앙생활의 큰 모범이 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오로지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자신의 사명에 충실했고, 예수님이 그의 앞에 오시자 즉시 자신의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따르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고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요한이 작아지고 예수님께서 커지신다는 것은 요한의 존재가 점점 의미 없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요한을 통해 예수님께서 드러나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과정에서 예수님을 만난 바오로 사도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라고 말한 것도 같은 고백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살라고 불린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벌써 우리가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이고,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처럼 사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만일 우리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드러나신다면,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진정으로 태어나시는 것입니다. 주님 성탄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것이면서, 우리를 통해 이 세상에 그리스도께서 드러나시는 신비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그리스도의 은총과 자비가 필요한 곳이 많습니다. 우리의 기억에서 조금 흐려졌지만 미얀마와 우크라이나 사태는 여전히 진행 중이고, 튀르키예·시리아 지진의 희생은 아직도 충분히 복구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전쟁은 벌써 많은 희생자를 낳았고 아직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도 우리의 도움이 절실한 이웃들이 있습니다. 나와 내 가족의 행복에 너무 집착하여 오히려 불행한 상황을 만드는 일도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세상 창조부터 종말의 완성까지 이끌어 가시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자비로운 눈으로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기쁨과 감사의 삶이 늘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길 빕니다. 주님 탄생의 기쁨을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2023년 12월 25일 주님 성탄 대축일에 
천주교대전교구장 주교 
김종수 아우구스티노

 

 

 

[마산교구]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이사 9,1)

 

 

교우 여러분,
빛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의 성탄 축일을 맞이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길 기원합니다. 2023년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사회와 가족을 위해 열심히 달려오셨습니다. 구유에 계신 아기 예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또 한 해를 살아갈 힘을 청합시다. 천상의 기운과 하늘의 에너지를 은총으로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 베들레헴 시골 마을에서 탄생하셨습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성탄은 이렇듯 우주의 주인께서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사건입니다. 평범한 보통 사람들과 함께 사신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은 기쁨과 희망의 축제일입니다. 2024년에도 삶의 어두움을 건너뛰며 살아야겠습니다. 그러한 힘을 청하면서 성탄절을 맞이합시다. 우리가 밝아지면 그만큼 우리 주위도 밝아집니다.

세상은 물질 최고주의에 젖어 있습니다. 물질의 소유를 행복으로 여기며 소유를 위해 살아가고 있는 듯합니다. 신앙인 역시 이러한 흐름 속에서 믿음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아기의 모습으로 구유에 계신 예수님께 행복의 깨달음을 청해야겠습니다. 오로지 말씀에만 순종하며 성가정을 이루셨던 성모님과 요셉 성인의 삶을 묵상해야겠습니다.

왕이신 예수님께서 힘없는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우리 역시 성탄의 예수님을 닮아 조금은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살아야겠습니다. 살면서 만나는 많은 문제들은 겸손과 낮은 자세로 임하면 뜻하지 않은 답을 만나게 됩니다. 인간적이고 세속적 방법으로만 해법을 찾았다면 성탄절을 맞아 변화를 일으켜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사회는 놀랄 만큼 외형적으로 발전했습니다. 하지만 내적 나눔이 없으면 공허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가난한 이들의 문제를 해결 못하면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을 위해 주님께서 오셨습니다. 우리도 누군가에게 가야 합니다. 따뜻함과 밝은 기운을 전해야 할 사람을 떠올려야 합니다.

성탄절엔 우리 모두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합니다. 구유경배를 통해 아기 예수님을 삶의 주인으로 선언합니다. 이제는 내 삶에 그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홀로 기도하는 시간이 예수님을 모시는 시간입니다. 함께 일하는 이들의 부족함을 받아주는 것이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행위입니다.

교우 여러분,
금년 3월 22일 우리 교구는 새 교구청을 완공하고 이사를 했습니다. 교구청 신축은 주님의 크신 도움과 교우 여러분의 기도와 봉헌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앞으로도 우리 교구를 움직이는 신비스런 힘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우리의 정성을 받아주신 주님께 감사드립시다. 부족한 힘이지만 모였기에 커다란 에너지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함께해 주신 교우들과 수도자 성직자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다시 한 번 성탄의 기쁨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 가정에 가득 내리기를 기원합니다.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의 축복 많이 받으십시오.

2023년 12월 25일
주님 성탄 대축일에
교구장 서리 신은근 바오로 신부

 

   

 

[부산교구]







 

 

 

[수원교구]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 경청과 식별로 동행하는 수원교구!
†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

사랑하는 수원교구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세상에 오신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빕니다. 주님의 성탄을 경축하는 오늘, 우리는 하느님께서 저 하늘 높은 곳에 당신의 영광 안에서만 머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 모든 이를 비추어 주심을 희망에 가득 찬 마음으로 기뻐합니다.

1.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오신 예수님

하지만 모든 이가 세상에 태어나신 주님을 환영하며 기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고 떠나가자, 헤로데는 베들레헴과 그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 사내 아기들의 생명을 앗아갑니다(마태 2,1-16 참조). 평화와 구원을 선사하시고자 다가오신 하느님의 빛을 거부하며, 자신을 위해 다른 이들의 삶을 파괴한 것입니다.
지금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시작된 지 벌써 2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사이에 벌어지는 전쟁의 고리는 언제 끊어질지 아무도 모릅니다. 이렇듯 세상 여러 곳에 증오와 반목의 뿌리가 깊게 박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묻습니다. 내가 가진 재산을 힘으로 빼앗고, 자식의 목숨을 앗아가며, 가족의 인권을 유린한 사람들을 어떻게 가만히 둘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를 참으로 필요로 하는 이 세상이지만, 자신을 위해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기는 이들이 일으킨 전쟁이 오늘날에도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를 잃고 울부짖는 이들, 폭력과 억압에 짓눌려 고통에 신음하는 이들, 가난과 궁핍, 병고에 지쳐 쓰러져가는 이들의 눈물이 우리의 도움을 간절하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고통받는 이들에게, 그리고 그들과 연대하며 도움의 손길을 건네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오늘 축복과 구원의 메시지가 새롭게 울려 퍼집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루카 2,10).
참 빛이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이 세상 어둠의 한가운데로 들어오십니다. 전능하시고 완전한 자유이신 분께서 놀랍게도 유약한 아기의 모습, 무능함과 순종의 모습을 선택하시며 고통 속에 아파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하기를 원하십니다. 아기 예수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당신을 감추시는 방식으로 이 세상에 당신의 참모습, 참 평화를 선사해 주십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2. 감동을 주는 신앙인

“교회는 그 본성상 선교하는 교회다.”라고 말씀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우리가 삶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힘을 일상에서 증언하도록 초대하십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은 삶에 새로운 의무를 강요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쁨을 나누는 사람, 아름다운 전망을 보여 주는 사람, 그리고 풍요로운 잔치에 다른 이들을 초대하는 사람입니다.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개종 강요가 아니라 “매력” 때문입니다(복음의 기쁨 14항). 복음의 힘과 매력은 모든 이의 마음 안에 ‘감동’을 불러일으킵니다.
오늘 경축하는 성탄은 우리 삶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 강생 사건의 감동을 전해줍니다. 구원자의 탄생을 알리는 천사의 예고를 따라 베들레헴 마구간을 방문한 목자들이 본 것은 바로 구유에 뉘어진 유약한 아기의 모습, 한 가정의 가장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일상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탄생하십니다. 하늘의 가장 부유한 분께서 지상에서는 스스로를 낮추셔서 가난함이 되십니다. 우리 구원을 위하여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일상을 당신의 장소로 취하신 성탄의 이러한 신비는 우리에게 큰 감동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 선사하신 감동을 마음에 새기며, 이제 그 감동을 세상 곳곳에 전하고 증언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 구석구석까지 우리를 파견하십니다. 특별히 굶주리고 헐벗고 갈 곳 없는 사회적 약자들, 병들거나 감옥에 갇힌 이들에게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발견하며(마태 25,31-46 참조), 우리의 몸과 마음을 아기 예수님을 맞이하는 장소, 그분을 누일 수 있는 구유로 봉헌하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가치보다 구세주의 오심을 기뻐하고 희망하는 여러분들에게 아기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화와 기쁨의 은총이 항상 가득하기를 기도드립니다.

“평화의 모후이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2023년 12월 25일 주님 성탄 대축일에
수원교구장 이용훈 마티아 주교

 

 

 

[안동교구]







 

 

 

[원주교구]

주님의 성탄 축제를 맞이하여

 

 


찬미예수님!

주님의 기쁜 탄생을 기념하는 크리스마스입니다.
우리는 그 기쁨을 노래합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아직 우리에겐 슬픔과 아픔과 어둠이 있습니다.
전쟁과 폭력과
거짓과 중독과
욕심과 이기심이 뒤엉킨 또 한 해였습니다.

빛이 필요합니다.
자비가 필요합니다.
평화가 필요합니다.

한 처음에 빛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탄생을 알리는 커다란 빛이 있었습니다.
세상은 그 빛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어둠은 그 빛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순진한 목동들이 알아보았습니다.
지혜로운 동방의 박사들이 알아보았습니다.

목동들이 들었던 천사들의 음성을 우리도 들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동방박사들이 보았던 그 빛을 우리도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동방박사들이 주님께 드린 선물을 우리도 준비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무엇보다 주님이 마련하신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2023년 주님의 성탄 축일에
천주교 원주교구장 조규만 바실리오 주교

 

 

 

 

[의정부교구]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요한 1,9)

 

 

오늘은 주님 성탄 대축일입니다. 구세주의 오심을 고대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큰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찬미하며 의정부교구의 모든 분께 성탄 인사를 드립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총이 여러분 모두에게, 특별히 여러 이유로 고통을 겪고 있는 분들에게 위로의 손길로 내리시기를 빕니다. 2,000년 전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요한 1,9)이 베들레헴의 캄캄한 밤을 밝혔듯이, 오늘날 우리 각자와 사회에 깃들어있는 어둡고 아픈 곳을 치유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참된 가치’를 찾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올해 성탄을 맞이하면서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님께 세 가지를 간구하고 싶습니다.
먼저, 많은 이가 주님께서 알려주신 ‘참된 가치’를 찾고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청합니다.
우리는 지난 대림 제1주간 월요일의 독서 말씀으로 이사야서 2장의 한 대목을 들었습니다: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2,3).
세상에는 다양한 지식과 지혜가 넘치고 있지만, 그것들은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의 시각에서 이해될 때, 비로소 충만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만일 지식과 지혜가 그 자체로 단편적이고 평면적인 수준에만 머문다면, 그것은 파편화된 정보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는 정신없이 바쁜 일상에서도 하느님을 향한 신앙을 간직해야 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주님의 산” “야곱의 하느님 집”을 향한 발걸음은 ‘참된 가치’를 향해 인간이 나아가는 여정이며,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가는 길에 대해 응답을 주십니다. 그리고 이 거룩한 밤에, 하느님께서 몸소 인간이 되심으로써 인생길에는 반드시 자신을 낮추는 겸손이 필요하며, 하느님의 놀라운 이끄심에 믿음으로 의탁해야 한다는 지혜를 알려주셨습니다. 구세주의 강생 사건에 담긴 하느님의 가르침을 기억하며 자신을 낮추어 이웃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 참된 가치를 잃지 않고 올곧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이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당신의 평화를 주시기를 청합니다.
세계 곳곳에서 전해오는 분쟁 소식들은 어느새 우리에게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되었습니다. 전쟁 중에 일어나는 끔찍한 파괴 행위는 자신들을 보호한다는 이름 아래 상대방을 향한 더 잔인한 폭력으로 심화하고 있습니다. 또한 어느 한 편을 완전히 말살하면 모든 게 해결되리라는 어리석음과 이를 기회 삼아 이익을 챙기려는 사악함은 무죄한 이들의 목숨을 수없이 앗아가고 있습니다.
특히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지역의 오늘날 상황은 우리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합니다. 양측에 깊숙이 자리한 적개심이 사라지고 상생을 도모하는 화해와 용서의 마음이 자라나기를 빕니다.
이와 함께, 우리 사회와 개인 안에 스며있는 적개심과 증오심도 치유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최근 우리 사회에는 잘못의 인정과 뉘우침, 용서와 화해가 잘 이뤄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서로 일치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먼저 변해야 하는데, 스스로 변화하기 이전에 상대방이 바뀌기만을 기다리고 이를 강요하기에, 상황은 더욱 나빠집니다. 이러한 태도는 결국 평화를 가로막고 분열을 부추길 뿐입니다. 바로 여기에 큰 전쟁이든 작은 갈등이든 그 뿌리가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생명을 파괴하는 미움이 사라지고 평화가 꽃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 모두 평화를 위해 용기를 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의 창조물에 대한 생태적 회개와 실천

끝으로, ‘우리 공동의 집’ 보전을 위한 우리 모두의 생태적 회개를 주님께 청합니다.
지난달 30일부터 이달 13일까지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서는 ‘제28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8)가 열렸습니다. 이때 화석연료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목표로 했던 ‘화석연료의 단계적 퇴출’이 아닌 ‘탈화석연료 전환’이라는 타협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그 시행에 대한 구속력 없이 구체적인 시점도 합의하지 않은 채 막을 내렸습니다. 또한 이 회의 기간 중 세계 기후환경단체들의 연대체인 기후행동네트워크(CAN)는 ‘기후 악당’에게 수여하는 ‘오늘의 화석상’이란 불명예스러운 상을 우리나라에 주었습니다. 기후 협상의 진전을 막는 기후 위기 주범국 중 하나라는 경고인데, 이는 우리가 기후 위기를 부추기는 움직임들에 얼마나 무관심했는지를 반성하게 합니다.
한편, 우리 교구는 이번 대림 시기에 작은 실천으로 <「찬미받으소서」 기부 챌린지>를 실시하였습니다. 매일 성경 말씀이나 교회 문헌을 읽고 또는 실천사항을 수행하여 수행한 만큼 기부에 참여하였습니다. 이러한 실천이 대림 시기에 한정되지 않고, 앞으로 계속 이어지기를 기대합니다. 작은 시작이었지만 생태적 회개를 향한 관심과 노력이 꾸준히 쌓여간다면, 반드시 큰 변화의 결실을 내리라 생각합니다.
이에 덧붙여, 더 많은 신앙인이 가톨릭 사회교리에 관심을 두고 배워 익힐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는 저마다 살아온 삶, 그 안에서 쌓아 익힌 이상과 이념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의 가르침이 첫 번째 기준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회교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따를 가르침이기에, 신앙 대상에 관한 내용과 함께 ‘교리’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가톨릭 사회교리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간다면, 하느님 마음에 드는 모습으로 선한 영향력을 전파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의정부교구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경배드린 아기 예수님은 작고 나약한 모습입니다. 그분이 짐승의 여물통에 누였다는 사실은 세상의 모든 이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어주신다는 점을 알려줍니다. 인간에게 당신을 온전히 내어주신 하느님에게서,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란 타인에 대한 지배와 착취가 아니라 희생과 봉사라는 점을 배웁니다. 올해 주님 성탄 대축일을 맞이하며 겸손과 나약함의 신비를 더욱 깊이 묵상할 수 있기를 빕니다. 의정부교구 모든 형제자매님과 여러분 가정에 주님 성탄의 은총이 가득하시기를 기도합니다.

2023년 주님 성탄 대축일에
+ 이기헌

 

 

   

[인천교구]

2023년 성탄 메시지
“베들레헴으로 갑시다.” (루카 2,15 참조)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그 사랑이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구세주의 탄생에 대한 소식을 처음 듣고 찾아온 목자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성탄을 묵상하고 싶습니다.

먼저, 성경은 예수님의 탄생 과정을 알리며, 베들레헴에 도착한 마리아와 요셉은 그들이 머물 여관의 자리를 찾지 못했다고 전합니다.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입니다.(루카 2,7 참조) 그리고 이어서 성경은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는 목자들의 모습을 전합니다. “들에 살면서 밤에도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루카 2,8)은 밤을 지새우다 주님의 천사가 하는 말을 듣습니다. 그것은 구세주의 탄생을 알리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천사들의 이 말을 듣고 목자들은 서로 말합니다.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신 그 일,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봅시다.”(루카 2,15)

목자들은 천사들의 목소리를 들었고, 그 말이 실현된 곳을 찾아서 떠납니다. 목자들은 참으로 깨어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깨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누구에게나 말씀하시지만, 그 말씀을 모두가 알아듣는 것은 아닙니다. 소리로 듣기는 하지만,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속에 하느님의 말씀이 들어갈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원하는 대로 들으려 하고, 원하는 대로 실행하려고 합니다. 최근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의 모습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고도로 발달된 현대문명의 시대에 반문명적 야욕에 의한 전쟁이 세계를 위협한다는 것 자체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또한 그것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 납득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우리가 사는 오늘날의 세상에는 서로를 향해 무기를 들고 마치 컴퓨터 게임을 하듯이 살육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신(神)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또 그것이 인류의 평화를 위한 일이라고 변명합니다. 이러한 안타까운 모습은 군비경쟁 속 강대강의 구도를 조장하는 세계의 모습과 한반도의 모습을 통해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전쟁만이 아니더라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는 많은 사회적 일탈도 가득 찬 욕심과 이기심에서 기인된 것들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천한 목자들은 하느님 말씀으로 가득 찬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깨끗했고, 또 참된 가난함을 지녔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가득 찼기에 베들레헴을 향해 나섰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곳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육화되신 그 모습을 만났습니다. 말구유의 비천하고 가난한 가운데 태어난 주님을 볼 수 있는 마음과 눈은 이렇게 모든 것을 비운 가난한 마음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우리에게 성탄의 참된 모습을 깊이 느끼고 깨우치게 하는 것은 목자들과 같은 가난한 마음과 하느님 앞에서 깨어있는 마음입니다.

목자들은 베들레헴으로 떠나면서 조급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떠나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것을 목자들은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루카 2,16)고 전합니다. 우리의 바쁜 일상의 다급함과 목자들의 서두름은 차이를 지니고 있습니다. 마음의 다급함은 우리로 하여금 평화로운 마음을 빼앗아 갑니다. 하지만 서둘러 떠났다는 의미는 목적을 향한 발걸음이며 기쁨에 가득 찬 움직임입니다. 그 발걸음은 하느님을 향했기에, 비우고 떠난 목자들의 마음은 기다렸던 구세주를 맞이하는 기쁨으로 채워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천사와 하늘의 군대가 외친,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라는 말의 뜻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구세주 탄생의 기쁨과 희망을 보고 느낀 그들은 모든 이들에게 구세주 탄생을 알리게 됩니다.

성탄을 맞이하는 이 시기만큼은 잠시 바쁜 일상을 멈추고 목자들과 함께 베들레헴으로 주님의 탄생을 맞이하러 서둘러 나서보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의 무거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 탄생을 기쁨으로 맞이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평화를 온몸으로 받아 안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이 성탄시기만큼은 세상에서 총성이 멈추고, 평화와 사랑의 세상이 되기를 모두가 함께 기도합시다.

여러분 모두에게 성탄을 통해 우리에게 내리는 평화가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천주교 인천교구장 정신철 요한 세례자 주교

 

 

 

 

[전주교구]

가난하고 연약한 아기 예수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온 누리에 가득 내리기를 빕니다.

성탄은 축제 가운데 축제입니다. 성탄은 무엇보다도 마음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을 크게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한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면, 아기는 많은 것을 변화시킵니다. 가장 먼저 부모의 생활 리듬을 바꿉니다. 그 가족과 친지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무언가를 변화시킵니다. 태어난 갓난아기를 바라보면, 경직되고 완고한 우리의 마음이 대개는 녹아내립니다. 아기는 그저 단순하게, 완전히 원초적이고 무기력하게 존재합니다. 이런 연약한 아기에는 우리의 도움과 사랑이 필요하기에 우리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도 우리 마음을 움직이십니다. 하지만 여느 아기와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 마음을 크게 변화시키십니다. 이 신비를 헤아려 봅시다.

천사는 아기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11-12).

천사의 말씀에 따르면, 아기 예수님은 아무 데서나 오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에게서 오십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질서를 세우기 위해 오십니다. 죄악의 권세를 부수기 위해 세상에 오십니다. 인간과 세상을 근본적으로 구원하기 위해, 곧 증오와 적개심을 없애고 사랑과 평화로 다스리기 위해 오십니다.

세상을 이렇게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사람에게는 분명 권능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를 위해 오신 분이 아주 작고, 무기력한 아이의 모습으로 지금 구유에 누워계십니다. 아무런 힘도 없이 가난하고 무방비 상태로 계십니다. 이렇게 가난하고 연약한 아기로 오신 까닭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를 하나도 잃지 않고 남김없이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1티모 2,4 참조).

인간의 회심과 구원은 폭력으로 결코 강요될 수 없습니다. 오직 마음의 변화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폭력으로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비참한 결과를 가져다줍니다(「복음의 기쁨」, 60항; 「모든 형제들」, 261항 참조). 그러기에 하느님은 그렇게 연약하고 무방비의 상태로 가난하게 오십니다. 하느님은 오늘날 많은 국가지도자와는 달리, 당신의 권능을 내세우지 않으십니다. 철권으로 다스리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당신의 이름에 걸맞게 행동하십니다. 그분의 이름은 임마누엘 곧 ‘우리와 함께 계시다.’입니다(마태 1,23 참조). 그분은 우리 곁에, 우리 가운데 사십니다.

하느님이 이렇게 연약하고 무방비의 모습을 취하신 것은 탄생 때만이 아닙니다. 공생활 중에도 계속 그러하십니다. 그분은 압제자의 지팡이를 무력으로 부러트리시지 않고, 오히려 빌라도에 의해 채찍질을 당하십니다. 사람들에게 침 뱉음을 당하시고 조롱을 받으십니다. 마침내 “죽음에 이르기까지”(필리 2,8) 당신 자신을 낮추십니다. 따라서 그분은 우리 가운데 계시지만, 분명 우리와 다르게 사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작은 아기로 오신 하느님이 일생 동안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가난하고 연약한 모습을 취하신 궁극적인 이유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 때문에 그분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시고, 당신 자신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내어주십니다. 그분은 과연 사랑에 전능하신 분입니다.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 모든 일을 다 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 때문에 이렇게 가난하고 연약한 길을 걸으시는 하느님은 때때로 어리석어 보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사람들이 하는 일보다 지혜롭고, 하느님의 힘이 사람의 눈에는 약하게 보이지만 사람의 힘보다 강합니다”(공동번역성서 1고린 1,25). 끝까지 가는 그러한 사랑만이 마침내 승리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아기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심으로써 우리를 겁박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의 사랑을 간절하게 구애하십니다. 그분의 구유, 가난과 작음, 연약함과 무방비의 상태 등은 우리에게 구애하시는 그분의 행동 방식입니다. 따라서 그분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그분께 마음을 열고 그분의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이를 통해 그분은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십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새롭게 창조됩니다. 우리가 아기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여 새롭게 된다면, 우리 주변이 점점 달라지고, 참된 평화가 퍼질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참된 평화를 향한 방향전환은 바로 나 자신에게서 시작합니다. 우리 각자의 삶에서 시작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우리 자신이 성탄의 신비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 아기 예수님은 우리에게 구애하십니다. 당신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를 바라십니다. 그분께 마음을 열고, 하느님이 세상에 가져다주신 위대한 사랑을 받아들입시다. 그리하여 기쁨과 평화가 가득한 성탄절과 새해가 되기를 빕니다.

2023년 성탄절에
전주교구장 김선태 사도 요한 주교

 

 

 

 

[제주교구]







 

 

 

[청주교구]







 

 

 

[춘천교구]







 

 

  

[군종교구]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오셨다.”
(요한 1,9)

 

 

‘하늘엔 영광, 땅에는 평화!’(루카 2,14) 하늘의 군대가 탄생하실 구세주께 드리는 찬미노래입니다. 추운 날에 영공과 전후방 각지에서 경계근무를 수행하는 병사들과 비좁은 배 안에서 맡은 바 임무를 다하는 간부/수병들 안에 아기 예수님은 탄생하셨습니다. 우리 구세주께서 오늘 이 밤,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성탄 축하 인사를 교구민 모두에게 전합니다.
아울러 성탄의 기쁨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그리고 이스라엘과 하마스 전쟁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형제자매들에게도 전하고 싶습니다. 어두운 방 안에 전등 스위치를 올리면, 어둠은 온데간데없이 환한 세상이 옵니다. 예수님 탄생의 은총에 힘입어 분쟁과 갈등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 광명과 평화가 가득하시길 경사스러운 이 밤에,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남긴 상처...

2020년 초부터 시작된 코로나19 팬데믹은 많은 사상자와 후유증을 남기고 종식되어 가는 단계입니다. 육체적·정신적 상처와 더불어 인간 삶의 방식을 총체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경제적 빈곤층이 발생했고, 사람 사이의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또한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참례자 인원이 제한된 미사와 이를 보완하기 위해 SNS와 종교 채널을 통한 방송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정부는 지난 6월부터 제한적 코로나 종식을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코로나19 발병 초기, 미사가 중단되었을 때의 안타까움은 서서히 신앙의 나태함으로 바뀌었습니다. 코로나19가 진정되어 일상으로 돌아온 지금도 많은 이들이 예전의 신앙생활로 돌아가기를 주저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군대 내의 종교활동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최소한 주일 미사 봉헌에 충실하였던 병사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주일이나, 오늘과 같은 대축일에 성당 좌석이 병사들로 꽉 찼던 것과는 달리 듬성듬성 비어 있는 장의자를 보면 씁쓸한 마음입니다.

‘물리적 공간’뿐만 아니라, 지난 3년간의 코로나19 시대를 거치며 우리 ‘마음 안에 공간’도 더욱 커졌습니다. 코로나19 감염으로 35,000여 명의 사람들이 사랑하는 이들과 사별(死別)을 했으며, 잘 나가던 사업을 하루아침에 접어야 했던 가장은 좌절과 허탈감을 느껴야 했습니다. 젊은 세대는 불투명한 자신들의 미래에 대해 비관하며 방황하고 있습니다. 사회는 양극화되어 가고, 세계는 분쟁과 전쟁의 화염 속에 허무와 고통을 느끼고 사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때문에 자신과 가정, 부대, 사회, 세상의 ‘공간’을 채우기 위해 지금 우리 안에 필요한 것은, 행복을 향한 불굴의 의지와 희망이라고 믿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전한다.”(루카 2,10)

우리를 좌절시키고, 현실에 안주하게 하는 요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두려움’입니다. 미래에 대한 공포가 엄습해 오면 인간은 꼼짝달싹 못 하고 주저앉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세계를 공포로 몰고 가던 2020년 3월 27일,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텅 빈 성 베드로 광장에 서시어 ‘특별 기도회’를 주례하셨습니다. 교황님은 그날 마르코 복음 4장의 ‘풍랑을 가라앉히시는 기적 사화’를 들려주시며, “희망을 품기 위해 주님께 의지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신앙의 힘으로, 이는 우리를 공포로부터 해방시켜 주며 우리에게 용기를 준다.”고 덧붙이셨습니다. 큰 풍랑 때문에 공포와 두려움에 휩싸인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현재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에 대해 너무 심각해하며 두려움에 가득 차 그 안에서 좌절하지 않도록 합시다. 주님께 우리의 앞날을 봉헌하고, 그분 능력에 의지하며 기도합시다.

“당신께서는 즐거움을 많게 하시고, 기쁨을 크게 하십니다.”(이사 9,2)

이사야 예언자는 말합니다.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이사 9,1)
언제고 어둠은 걷히게 될 것입니다. 어둠과 암흑 속에 살던 백성에게 빛이 비친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즐거움, 기쁨이십니다. 그분이 보내신 구세주 예수님은 어둠을 비추시는 ‘빛, 광명’이십니다.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하시는 성령님은 고통 속의 인간을 위로해 주시며, 사랑의 하느님과 빛이신 예수님은 연결시켜 주는 ‘고리’이십니다.
나자렛이라는 작은 고을에 살던 처녀 마리아의 태 안에 구세주를 심어주신 분이 바로 사랑의 매개 역할을 하셨던 성령님이십니다.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구세주 잉태 소식을 전합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루카 1,35)

좋으신 아버지이시지만 눈으로 뵈올 수 없었던 하느님께서 인성을 취하여 이 세상에 오심으로 해서 우리는 그분을 뵈옵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으며, 하느님의 선물 곧 ‘빛과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어둠의 자녀에서 ‘빛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얻게 된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성탄을 기뻐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빛을 위한 ‘2024년도 사목지침’-‘화해와 치유를 위한 고해성사의 해’

저는 지난 대림 제1주일에 2024년도 사목교서를 발표하였습니다. 2024년도는 개인의 신앙 성숙과 세상의 화해를 위한 고해성사에 중점을 두며 살아가기를 희망합니다. 나의 영혼이 성찰과 통회를 통해 변화될 때에 우리가 몸담은 가정, 부대, 사회와 세상이 바뀝니다. 우리 안에 어둠이 빛과 광명으로 변화됩니다.
‘빛’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을 기쁘게 맞이하고 그분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고해성사의 준비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유혹과 죄에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를 복원하고 다시금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은총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바로 고해성사입니다. 참빛을 맞아들일 때에 진정 믿는 사람다운 새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빛을 품어야만 그 빛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군종교구민 여러분!

성탄의 기쁨과 아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내리시는 ‘참빛’이 우리만의 자리를 넘어서서 모든 자리에 임하시기를 소망합니다. 이 사회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개인과 가정 문제로 번민에 싸여있는 전우들에게 탄생하신 예수님의 은총과 격려가 가득하시길 기도합시다. 특히 앞서 말씀드렸던 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과 이스라엘, 하마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무고하게 희생되는 자들과 질병과 배고픔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풍성히 내려 주십사 마음을 다해 기도합시다.
기도는 어떤 불가능도 가능하게 합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바치는 어떤 유형의 기도도 하느님께 다다라 응답을 받을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 천주교 신자들이 꼭 해야 하는 사랑의 의무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교구민 모두가 성탄절에 아기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충만히 누리시고, 이 선물과 기쁨을 이웃과 나누시기를 기원합니다.

2023년 주님 성탄 대축일에
천주교 군종교구장 서상범 티토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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