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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전국 교구 교구장 부활 메시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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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전국 교구 교구장 부활 메시지
'예수님의 부활은 이 세상에서의 삶을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줍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축하드리며 함께 기뻐합니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기운과 함께 부활이 찾아왔습니다. 산과 들에 피어나는 꽃들과 풀들은 대지와 자연에 피어나는 생명을 노래합니다. 이삼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60세에 이른 분들에게 ‘환갑’ 잔치를 해드리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우리네 평균 수명이 늘면서 이제는 그런 풍경을 보기 어렵습니다. 70세에 하는 ‘고희’ 잔치도 ‘아직 젊고 앞으로 갈 길도 멀리 남았는데 남사스럽다.’며 피하시는 분들도 적지 않을 만큼, 이제 우리의 평균 수명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우리나라 여성의 평균 수명이 86세 정도, 남성은 81세 정도라고 통계는 이야기합니다. 건강 기대 수명도 73~74세로 국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두 번째로 높다고 합니다. 이는 과거에 비해 10~20년 이상 늘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80~90년 사는 것으로 우리 인생이 영원히 끝난다면 우리 각자의 삶이 10~20년 더 늘어난다는 사실이 수천, 수만 년의 역사 안에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의 삶이 영원함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나의 기대수명이 몇 년 더 늘었다는 점이 이 지구, 이 우주의 역사 안에 무슨 의미를 더할 수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우리의 삶이 이 세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었고, 이 세상에서의 삶을 ‘영원한 생명’과 연결 지어 준 사건이기에 의미가 있습니다. 건강 수명, 기대 수명이 늘었다는 사실은 ‘살아있는 동안의 건강’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과 연결’될 때에 참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은 ‘이 풍진 세상에 눈감고 내세로 도피케 하는 마약’(K. 맑스) 같은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의 삶’이 ‘영원한 생명’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하느님 보시기에 좋더라.’ 하는 모습으로 가꾸어나갈 우리의 책무를 자각하고, 더욱 이 세상에서의 삶에 책임을 다해 투신하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삶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또 실패, 좌절, 병고, 이별, 사랑의 깨어짐 등등 ‘죽음’과도 같은 골짜기를 지나고 있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죽음과도 같은 현실’이 ‘끝’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줍니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은 한반도의 분단 현실도 종국에는 ‘생명으로 하나됨’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갖게 합니다. 우리 국민 대다수의 바람과는 별개로 강대국 사이의 국제 관계 안에서 비롯된 분단의 역사로 인해 ‘죽음과도 같은’ 대립과 분열이 아직껏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죽음이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지듯이, 한반도 분단이라는 ‘역사의 죽음’과도 같은 상황도 언젠가 새 생명과도 같은 ‘평화 공존과 공영’이 가능하리라는 희망을 갖게 합니다. 진정한 대화는 갈등과 분열을 넘어서 다른 이들을 보듬고 서로 소통하고 이해하도록 도움을 줄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자주 “반대자들을 사랑하고 우리를 험담하는 이들을 축복합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치 지도자들은 국가의 발전과 국민들의 행복에 큰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정치 지도자들도 정파적 이익을 뒤로하고 국민의 민생을 우선하여 잘 살피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먼저, 곧 치르게 될 총선에서 민주국가의 국민으로서 권리를 잘 행사해서 국민의 참 봉사자를 선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개인과 사회의 어려움을 넘어 우리가 희망을 가질 수 있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삶이 이 세상에서 그대로 끝나지 않음을 증언합니다. 그렇기에 부활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삶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희망을 놓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부활의 희망 안에서 ‘하느님 보시기에 좋더라.’ 하는 말씀에 걸맞은 세상을 만들어 나가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기꺼이 투신할 수 있게 되길 간절히 희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부활의 새 생명과 희망이 어려움 중에 계신 모든 분들, 특별히 북녘 동포들에게도 따뜻이 퍼져가고,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의 모든 피해자들에게도 따뜻이 퍼져나가기를 기도합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평양교구장 서리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오늘은 주님 부활 대축일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분이 우리에게 더 큰 사랑으로 오신 것입니다. 파스카 축제인 주님 부활 대축일 복음에서 여인들은 주일 아침 일찍 해가 떠오를 무렵 미리 사놓은 향료를 들고 주님의 무덤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걱정거리가 있었습니다. 바로 무덤을 막고 있는 엄청나게 크고 무거운 돌이었습니다. “누가 그 돌을 무덤 입구에서 굴려 내 줄까요?” 그러나 서로 걱정하며 무덤에 도착했을 때 이미 돌은 굴려 치워져 있었습니다.
주님은 당신을 만나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의 수고를 헛되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막막한 상황임에도 향유를 들고 길을 떠나는 여인들을 보며, 그들이 지녔던 희망에 대해 묵상해 봅니다. 주님을 위해 행동으로 옮기는 그녀들의 사랑은 희망에서 나오는 것이고, 이 희망이 바로 사람을 움직이는 힘입니다. 우리 삶을 가로막는 커다란 돌은 희망이라는 움직임 앞에서는 결코 장해물이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부활의 삶을 간절히 원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신학생 때 그런 기억이 있습니다. 평소 알고 지내던 9살 본당 소녀 스텔라가 엄마와 함께 교통사고를 당하여 중환자실에서 사투를 벌이는 모습을 보면서 어린 영혼이 이대로 세상을 떠날까 봐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졸음 운전하던 상대방의 차에 큰 사고를 당한 스텔라는 갈비뼈가 일곱 군데나 부러지고 다리뼈도 많이 부서져 대학병원에서 의식이 없는 상태로 누워있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9일 만에 깨어나 한 달 동안 중환자실 생활을 하다가 담당 의사의 말처럼 기적적으로 회복하였습니다. 지금도 한쪽 다리가 짧아 오래 걷지는 못하지만 결혼하여 두 아이의 엄마로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저는 그때 스텔라의 어머니 실비아 자매님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학사님 저는 괜찮은데 우리 스텔라가 걱정입니다.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고 앞으로 며칠이 고비라고 합니다. 기도해 주세요.’ 자신도 많이 다치셨음에도 딸을 먼저 걱정하시던 실비아 자매님의 말씀과 눈물을 생각하면, 이 땅의 모든 어머니의 삶을 절로 묵상하게 됩니다. 벌써 10주기를 맞이하고 있는 세월호 참사는 우리에게 아직도 잊혀지지 않은 사건이며 가슴속에 응어리로 남아 있습니다. 진도 인근 해상에서 세월호가 침몰하는 장면을 목격하던 국민들은 설마 저렇게 큰 배가 쉽게 빠지지는 않을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배에 타고 있던 승객들과 수학여행을 떠났던 많은 학생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지금까지도 진상규명이 제대로 되지 않아 가족들은 여전히 희생자들을 떠나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모든 이의 죽음이 다 안타깝지만, 특히 어린 영혼들을 먼저 보낸 부모님들의 눈물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그분들의 눈물을 통해, 장성한 아들의 억울한 죽음 앞에 담대히 서 계셨던 성모님의 애끓는 심정 또한 헤아리게 됩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보아라, 여기가 그분을 모셨던 곳이다. 예수님께서는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듣고 찾아갔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빈 무덤에서 만날 수 없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기 삶의 현장에서 만나 뵐 수 있었습니다. 말씀을 선포하시고 표징을 보여 주시며 물고기를 잡는 제자들을 부르시던 갈릴래아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뵐 수 있었습니다. 부활은 과정 없는 새로운 탄생이 아니고 머나먼 곳으로 떠나는 것도 아닙니다. 부활은 절망에서 희망으로 일어서는 것이며, 슬픔에서 기쁨으로 일어서는 것입니다. 다시금 허리띠를 동여매고 주님과 함께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삶의 고통을 넘어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는 구원의 길이 될 것입니다.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고통은 필연적이고 우리가 희망하는 부활의 삶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겪는 일입니다. 파스카(Pascha)란 말은 ‘지나가다’, ‘건너가다’, ‘넘어가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룩한 파스카의 신비에 참여한 우리는 새로운 삶으로 건너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본능에 따라 마음껏 재물을 취하고 욕심을 부리며 살아도 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약육강식의 삶이 아닌 예수님의 희생처럼 이웃과 함께 사는 삶으로 건너가야 합니다. 나와 내 가족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삶이 아닌 이웃의 슬픔을 내 슬픔으로 여기는, 이타적인 신앙인의 삶으로 건너가야 합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오랜 세월 동안 몸에 밴 죄와 악습 그리고 이기주의를 내려놓고, 주님께서 용서와 사랑을 몸소 실천하셨던 갈릴래아로 건너오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마르 16,7)
2024년 3월 31일 주님 부활 대축일
천주교 광주대교구 교구장 옥현진 대주교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
교형자매 여러분, 알렐루야! 알렐루야! 주님의 부활을 축하합니다!
부활은 우리 신앙의 시작이자 마침이며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자 원리입니다. 부활은 삶의 끝이 죽음이라고 생각하는 우리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영원한 삶에 대한 희망과 기쁨을 다시 한번 되새기는 그리스도인의 축제입니다. 부활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오늘의 축제가 일상의 매 순간으로 이어지도록 노력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지난 사순 기간 동안 우리는 단식과 절제의 시간을 통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함께 나누고 묵상하며 부활을 기다렸습니다. 우리의 단식과 절제는 개인의 수련이나 완덕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만나는 모든 생명체에 대한 사랑과 배려의 표현입니다. 함께 나누고 격려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서로에 대한 희망이자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1테살4,13-18). 그러므로 부활을 산다는 것은 삶의 애환과 고통을 위로와 희망의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그리스도인의 역사적이고 실천적 책무를 또 한번 되새기는 것이기도 합니다. 교황 바오로 6세의 사도적 권고 ‘현대의 복음 선교’ 21항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리스도인 한 사람, 또는 몇몇 사람이 그들의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면서 단순하고 꾸밈없이 현세 가치들을 초월하는 가치들에 대한 믿음과, 보이지 않고 상상할 수도 없는 것에 대한 희망을 드러내 보입니다.” 이 말씀처럼 세상 속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바삐 돌아가는 세상의 흐름 너머에 참된 희망과 기쁨이 있음을 선포하며 살아갑니다. 현실의 근시안적 탐욕과 이기적 욕망에 이끌려 현세에 만족하고 자신의 안위만을 챙기며 살아가는 삶은 부활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세상을 함께 살아가며 세상 속에 희망과 기쁨을 선포하기 위해서 우리는 열려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이웃이 누구인지 묻기 전에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 모든 이를 위한 이웃이 되어주어야 합니다(루카10,25-37). 과연 우리는 누구의 이웃이 되어주고 있습니까? 우리 교구는 지난 해와 올해, 친교의 해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친교는 그리스도인들만의 배타적 삶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나의 이웃, 나의 형제, 나의 자매로 대하는 무한한 사랑의 확장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고 아끼는 친교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나를 미워하고, 나를 박해하는 사람까지 진정으로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특권이자 존재의 이유가 될 것입니다(마태5,43-38). 특별히 올해 부활시기 동안 우리는 국민을 대표할 새로운 일꾼들을 선택하게 됩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 안에 서로 다른 목소리들을 함께 듣고 나누어야 할 것이며, 그리하여 새로운 미래, 새로운 희망으로 나아가는 선택의 시간에 그리스도인은 대립과 갈등을 부추기는 모든 정략적, 선동적 목소리에 사랑과 용서와 화해의 목소리를 낼 뿐만 아니라, 지치지 않고 삶으로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당부하신 것은 세상 모든 이에게 형제애를 선포하고 모든 이들 안에 계신 하느님의 존재를 일깨우는 것이었습니다(마태28,20). 부활의 기쁨은 세상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함께 나누는 데서 시작합니다. 부활을 살아가는 교형자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이 바라는 세상은 아름답고 역동적이며 거룩한 형제 공동체입니다. 비록 어둡고 추하고 비루한 것들이 우리 삶의 언저리에 차고 넘치더라도 그리스도인은 부활의 희망과 기쁨 안에서 서로에 대한 사랑의 끈을 꼭 붙들고 살아가야 합니다. 어지러운 세상과 부활의 기쁨이 팽팽하게 긴장감을 유지할 때, 그리스도인은 고뇌해야 합니다. 세상의 일에 고뇌하고 부활의 신앙을 통해 세상 안에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어 나가길 고뇌해야 합니다. 그 고뇌의 시작이 오늘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승리하셨습니다. 용기를 내어 이 세상 곳곳에 부활의 새 생명이, 그 기쁨이 가득하길 오늘 우리의 삶을 봉헌하며 살아야겠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교형자매 여러분! 부활을 함께 기뻐하고 축하합니다!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님, 저희와 저희 교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성 이윤일 요한과 한국의 모든 성인과 복자들이여, 저희와 저희 교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2024년 3월 31일 주님 부활 대축일에
천주교 대구대교구장 조환길(타대오) 대주교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 찬미 예수님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을 찬미합시다. 알렐루야! 우리 모두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부활 축하 인사를 드립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태초에 하느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마지막으로 당신의 권위를 받아 이 모든 것을 다스릴 존재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하느님의 숨을 받아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영광스러운 이 모습에는 큰 위험과 도전이 숨어 있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인간은 하느님 뜻 곧 진리를 따라 살려고 하면서도, 늘 스스로 하느님처럼 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느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에 대해 뱀이 아담과 하와에게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창세 3,5)라고 한 말 안에 인간이 쉽게 넘어갈 수 있는 가장 큰 유혹이 담겨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이제 하느님의 뜻을 찾는 대신 자신의 생각을 따르는 길을 택했습니다. 이것이 모든 죄의 뿌리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아주 분명합니다. 하느님을 닮게 창조된 우리가 하느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배반한 유다에게 “네가 하려는 일을 하여라.”(요한 13,27)라고 하셨고, 사도들은 그를 두고 “제 갈 곳으로” 간 사람이라고 말합니다(사도 1,25). 생명을 창조하신 하느님을 떠나 제 갈 길을 가는 곳이 곧 죽음의 길입니다. 에덴동산에서 그렇게 시작된 죄를 말끔히 용서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데에 앞장서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참 생명을 깨닫게 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외칩니다.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잘못을 저질러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에페 2,4-5).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평화의 인사를 나누신 뒤,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 하신 것은 구원의 역사에서 참으로 신비한 일입니다. 태초에 하느님의 숨을 받아서 창조된 인간이 죄로 인해 죽음의 세력에 들자, 하느님의 외아들이 이 세상에 오시어 죽고 부활하여 그 부활의 생명이 담긴 숨을 불어 넣어주십니다. 이렇게 부활은 재창조입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에페 2,10). 하느님을 닮게 창조되었고, 다시 부활의 생명으로 재창조된 우리는 이제 성령의 이끄심 안에서 하느님처럼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읍시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 13,34).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에게 하느님 아버지처럼 자비롭게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살라고 하신 말씀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 수 있다고 하느님께서 믿어주신다는 말씀이고, 그렇게 살도록 도와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신뢰해 주시는 주님을 믿고 사는 우리들이 얼마나 행복하고 신비로운 존재인지 모릅니다. 부활의 신앙을 지닌 우리는 주님처럼 살아야 하고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야 할 주님의 뜻은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의 뜻을 설명하자면 수만 권의 책으로도 부족하지만, 아주 단순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신 기도 안에 주님의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 시작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을 아버지로 하는 형제자매요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을 돌아봅시다. 그리고 물어봅시다. 나에게 이웃은 어떤 존재입니까? 우리 사회에서 생명은 어떻게 존중받고 있고, 특별히 고통 중에 있는 이들에게 어떤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까? 이 세계는 어떠합니까? 많은 이들이 성실하게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오래 지속되는 전쟁들로 죄 없는 이들, 평범한 삶을 살아오던 수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하고 힘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이런 세계적인 상황에 대하여 “여러 나라에서 자행되었고 지금도 자행되고 있는 박해, 노예 매매, 민족 살상, 그리고 우리가 인간이라는 것을 부끄럽게 만드는 그 밖의 많은 역사적 사건들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일들은 언제나, 늘 새롭게, 끊임없이 무뎌지지 않고 기억되어야 합니다.”(교황회칙 「모든 형제들」 248항)라고 강조하십니다. 그 외에도 생태 위기를 극복하자는 말은 무성하지만, 정작 그 실천은 아직 미미합니다. 급속히 발전하는 인공지능은 긍정적인 기대보다 더 큰 우려를 낳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자비하심을 배워 선하게 살라고 예수님 안에서 다시 창조된 사람들입니다. 어떠한 일이든 어떤 결정을 내리든 우리 모두에게 좋은 일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합시다. 당장 우리의 관심과 도움 그리고 기도가 필요한 이웃이 있습니다. 그들 모두 아버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귀한 자녀들입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의 선한 행동을 보고 사람들이 하느님을 찬양하도록 합시다.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 부활 축하 인사를 드립니다.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주님 안에서 항상 행복하시기를 기도하며 주님의 강복을 전합니다.
2024년 3월 31일 예수님 부활 대축일에
천주교대전교구장 주교 김종수 아우구스티노
부활담화문
교형 자매 여러분,
2024년 부활축일을 맞이하여 주님의 은총을 기원합니다. 금년 부활절에도 예수님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다시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봄기운처럼 삶의 무미건조함을 뛰어넘고 기쁨의 신앙생활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스승의 죽음 이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의욕을 상실했던 그들이었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뒤 변화됩니다. 스승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는 죽음도 겁내지 않는 사도로 바뀌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인지요? 부활의 스승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님의 힘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받아야 합니다. 우리 역시 부활하신 예수님의 힘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이 달라집니다. 삶이 달라집니다. 예수님께 청원의 기도를 바칩시다. 미사성제가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자주 미사에 참여하여 그분께서 주시는 생명의 힘을 받고 느끼고 간직하며 살아갑시다. 슬픔에 억눌렸던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 기쁨의 사람으로 바뀝니다. 평생을 그렇게 사셨습니다. 의심하던 토마스 역시 부활하신 스승을 만났기에 불신의 강을 건너갔습니다. 상처를 확인하지 않고선 믿지 않겠다고 했던 분입니다. 하지만 평생을 진실의 증거자로 사셨습니다. 신앙인인 우리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 바뀝니다. 모르는 사이 삶은 밝아지고 우리를 감싸고 있는 환경도 달라집니다. 부활의 은총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부활하신 그분의 힘을 체험해야 합니다. 2024년 부활 시기 우리가 해야 할 과제입니다. 가끔씩 그분을 만나십시오. 성체성사 안에 현존해 계십니다. 기도하며 찬양하는 모임이면 그분께서는 오십니다. 가장 작은 이들 안에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한 번쯤 힘든 이웃과 따뜻함을 나누십시오. 본당 모임에선 예수님 만남을 먼저 생각하십시오. 미사 때는 영성체 시간을 기다려 보십시오. 가까이 계시는 예수님의 현존을 느끼게 되실 겁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체험한 사람은 세상 모든 것을 체험한 사람과 같다고 했습니다. 한 차원 달라진 삶을 깨닫게 된다는 말입니다. 많은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부활의 힘이며 부활의 은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주 나타나셨습니다. 함께 식사도 하셨고 함께 다니기도 하셨습니다. 부활사건을 각인시켜 주기 위한 배려였습니다. 그리하여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 역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서 바뀝니다. 처음엔 그분을 못 알아봤습니다. 포기와 체념의 안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이 뜨겁지 않았던가!’ 예수님과 함께 있었음을 알게 된 뒤 그들이 했던 말입니다. 하지만 떠나신 뒤였습니다. 뜨겁게 타오르는 마음은 그분께서 주신 은총이었습니다. 엠마오 제자는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예수님 부활사건을 수없이 듣고 읽고 묵상했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 엠마오 제자처럼 뜨거움을 만나야 합니다. 현실의 고통을 십자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가능해집니다. 십자가를 알게 되면 부활의 주님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이 뜨겁게 타오르지 않았던가!’ 루카 복음 24장 32절이 현실로 다가오게 됩니다. 부활신앙이 약해지고 있습니다. 영생에 대한 갈망도 흐려지고 있습니다. 물질 만능주의와 자유화의 물결이 강한 탓입니다. 결과는 가난과 부의 극단적인 양극화입니다. 절제가 사라진 개인주의의 난무입니다. 십자가를 모르면 부활사건을 알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고통입니다. 억울함입니다. 그 고통과 억울함을 주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여길 때 십자가를 아는 것이 됩니다. 십자가를 알고 받아들이면 부활은 깨달음으로 다가옵니다. 부활은 반전입니다. 상상도 못 했던 상황들의 반전입니다. 2024년 부활 시기 다시 체험하며 만나야 할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던 여인들에게 천사는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코로나 사태는 끝났지만 상황은 예전 같지 않습니다. 그렇더라도 두려워하지는 말아야겠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하늘의 힘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예수님께서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축복을 내려주시기를 청합니다. 아울러 이 땅에 살면서 고통받고 있는 많은 분들께 그분의 따스한 손길을 기원합니다.
2024년 3월 31일
주님 부활 대축일에 천주교마산교구 교구장 서리 신은근 바오로 신부
2024년 부활 메시지
천주교 부산교구장 손 삼 석 요셉 주교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 경청과 식별로 동행하는 수원교구!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 친애하는 수원교구 형제자매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의 사랑과 평화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부활하시어 함께 걸으시는 주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모습은 힘들고 지친 상황에서 부활절을 맞는 우리 모습을 보여 줍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에 해방과 구원을 가져다주실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처참하게 돌아가셨습니다. 기대와 희망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침통한 표정으로 힘없이 엠마오를 향해 뚜벅뚜벅 걷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예수님께서 다가오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시며 말씀을 건네십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그들 마음속 기다림과 희망, 좌절과 절망을 경청하고 함께 나누시며, 그들의 소중한 길벗이 되어 주셨습니다. 성경 말씀에 비추어 당신에 관한 일을 설명해 주시자 그들 마음은 뜨겁게 타올랐습니다. 집에 들어가 주님과 함께 빵을 나눌 때 눈이 열려 그분을 알아보았습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32)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바로 오늘 부활하신 주님께서 함께 길을 걷는 아름다운 여정과 뜨거운 체험으로 우리 모두를 초대하십니다. 경청과 식별로 동행하는 수원교구 우리 교구는 2024~2026년 3년간 걸어갈 사목교서로 ‘경청과 식별로 동행하는 수원교구’라는 표어 아래 교구가 나아갈 방향을 설정하였습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2천 년 전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던 것처럼,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걷고 계십니다! 환난과 시련이 아무리 크고 무겁다고 할지라도,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희망을 짓누를 수는 없습니다. 그 희망의 토대 위에 우리 교구의 복음화 여정을 걸어갑시다. 주님께서 부활하시어 우리 가운데 활동하신다는 강한 확신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고 앞을 향해 걸어가도록 합니다. 때로는 그분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고 절망과 좌절 속에 헤맬 때도 있지만, 그분은 결코 우리를 버리거나 외면하시지 않고 늘 우리 길 가운데 함께 계시며, 우리에게 격려와 응원을 아끼지 않고 용기를 북돋아 주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도 더불어 살고 있는 이웃 형제자매들과 함께 길을 걸으며, 모든 이에게 희망이 되는 주님의 복음을 기쁘고 담대하게 전할 수 있습니다. 희망의 순례자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2025년을 희년으로 선포하시고 ‘희망의 순례자들’을 표어로 선정하셨습니다. 또한 2024년을 희망의 순례자들이 희년을 영적으로 준비할 수 있도록 ‘기도의 해’로 선포하셨습니다. 희년의 표어인 ‘희망의 순례자’는 교회가 코로나 감염병과 지구촌 여러 나라에서 일어나는 전쟁 등으로 인해 절망에 빠진 인류에게 희망의 표징이 되어 주기를 당부하시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지향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겪으며 영광에 들어간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루카 24,26 참조) 환난과 역경 속에서도 굽히지 않고 끈질기게 인내로 버텨 내며, 희망을 자아내도록 하는(로마 5,4 참조) 희망의 증인입니다. 이 시대는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희망에 찬 증언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 교구도 이러한 지향을 바탕으로 내년에 있을 희년을 영적으로 준비하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전 세계 교회와 일치를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탈종교 시대와 부활의 증인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사회에는 점차 탈종교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회·경제·문화적으로 개개인의 수준이 높아지면서 삶의 방식이 눈에 띄게 달라졌습니다. 4차 산업혁명의 여파로 로봇과 인공지능이 진화하고, 각종 스포츠, 오락과 놀이(엔터테인먼트)가 전 세계에 ‘문화혁명’이라 불릴 만큼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사회의 급속한 변화는 사람들을 종교에 무관심하게 만드는 직접적 원인이 됩니다. 무엇보다 탈종교화를 부추기는 가장 주된 원인은 과학적으로 입증이 가능한 현상만 신뢰할 수 있고, 육체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실만 믿을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우리 부활 신앙에 큰 도전으로 다가옵니다. 눈으로 직접 보고 확인한 다음에야 진리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부활 신앙이 이 시대에 도전이 될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추구하는 삶이 진정 인간다운 삶인지 의문이기 때문입니다. 부활 신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희망을 둡니다(로마 8,24-25 참조). 그렇기에 예수님 부활의 첫 선포자인 베드로 사도는 오순절 설교(사도 2,14-36 참조)에서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그 증인”(사도 2,32)이라고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 부활에 관한 성경의 증언만이 아닌,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뵙고 회개한 제자들, 좌절과 절망, 두려움과 죽음을 딛고 불멸의 희망으로 다시 일어나 세상 속으로 파견되어 복음을 선포한 제자들의 삶이야말로 부활의 또 다른 증거가 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 가운데 고통받고 있는 이들, 특히 두려움과 절망 속에 있는 이들에게 희망의 불을 지펴 주기를 기원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위로 삼아 큰 힘을 얻고 희망의 증인이 되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수원교구의 주보이신 평화의 모후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2024년 3월 31일
주님 부활 대축일에 수원교구장 이 용 훈 마티아 주교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 20,18)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처음으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녀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뵙고 제자들에게 그 사실을 전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이렇게 증언합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 20,18)
마리아 막달레나의 고백과 증언을 듣고(요한 20,18), 제자들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뵙고 기뻐합니다.(요한 20,18.21) 뿐만 아니라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요한 20,25)하고 마리아처럼 부활하신 주님을 고백하며 증언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주님 부활의 증인으로 세상에 파견됩니다. 이렇게 제자들이 예수님 부활에 대한 소식을 마리아 막달레나에게서 듣고, 부활의 증인으로 세상에 파견된다는 의미에서, 교부들은 그녀를 “사도들의 사도”(Apostolorum apostola)라고 칭송하였습니다. 교회의 이러한 고백과 증언으로 같은 사명을 전해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 역시 주님 부활의 증인이 되도록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파견된 제자들처럼 우리도 똑같은 믿음으로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요한 20,25) 하고 고백하며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먼저 우리 자신이 정말로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싶은지, 정말로 그 기쁨을 전하고 함께 나누고 싶은지 각자의 신앙을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뵙고 전할 수 있는지 다양한 방법도 찾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전하라는 메시지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레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 28,10) 마르코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공적으로 처음 등장하신 곳도 ‘갈릴레아’요(14,1 참조) 부활하신 뒤에 나타나실 곳도 바로 ‘그곳’입니다(16,7 참조). 뿐만 아니라 부활 후 갈릴레아에서 제자들이 당신을 뵙게 되리라는 말씀은 복음 여러 곳에서 언급됩니다(마태 26,32; 28,7.10.16; 마르 14,28; 16,7; 요한 21 참조). 그래서 갈릴레아는 예수님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장소입니다. 당신의 지상 생활 동안에는 복음 선포의 중심 무대가 되었고, 부활하신 이후에는 제자들을 만나는 중요한 장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레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나를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을 어떤 의미로 해석하고 풀이할 수 있을지 함께 생각하고 정리해 보는 것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거기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구체적으로 만나 뵙는 방법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갈릴레아’는 2000년 전 예수님의 활동 무대였던 역사적인 장소일 뿐만 아니라, 더 깊고 넓은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됩니다. 나아가 제자들과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곳으로 기억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뵙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 ‘그곳’이 우리들의 ‘새로운 갈릴레아’가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부활의 증인으로 사는 우리들의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새롭게 복음을 선포하고, 가난하고 힘없고 보잘것없는 작은 이들 안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뵙게 될 것입니다. “내가 너희가 내 형제들인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마리아 막달레나의 부활 체험과 그녀가 전한 주님의 메시지 덕분에, 여러분 모두가 ‘오늘의 갈릴레아’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뵙는 복된 체험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그 기쁨을 전하고 나누는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다면 또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게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함께 기도합시다. 그리고 마리아 막달레나와 주님의 제자들이 고백한 부활 신앙을 우리 자신의 믿음으로 함께 고백해 봅시다. 주님,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 20,18), “우리가 주님을 뵈었소.”(요한 20,25)
2024년 부활절에
천주교 안동교구장 권혁주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마르 16,6)
+ 찬미 예수님 주님의 부활은 우리 교회의 출발점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자 뿔뿔이 흩어진 제자들이, 떠났던 고향을 찾아갔던 제자들과, 버렸던 배를 타고 그물을 다시 잡고 고기잡이를 하던 제자들 모두가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활로 제자들은 다시 예루살렘에 모였고, 주님의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주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오늘날 교회는, 우리들의 공동체는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 인류의 행복한 삶의 실현입니다. 인류는 아주 오래전부터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고’ 싶어 했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시간 속에 살면서도 영원을 이야기하며 죽음을 넘어 희망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죽음을 넘어선 영원하고 행복한 삶의 시작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죽음을 이겨낸 승리입니다. 죽음의 사슬을 끊고 부활하시어 저승에서 승리하여 오르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죽음으로 저희 죽음을 없애시고 당신의 부활로 저희 생명을 되찾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활로 열린 새 하늘 새 땅에서는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모든 불의와 억울함에 대한 보상입니다. 주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주님의 모든 삶은 불의하고 억울한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이 세상은 시지프스의 신화보다 더 부조리하고 인류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었을 것입니다. 판도라 상자에 남아 있던 그 희망마저 사라져 버렸을 것입니다.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마태 27,46)의 외침만 남았을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미움과 폭력과 죄에 대한 사랑의 승리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주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용서는 없고 죄만 남았을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모든 기쁨의 원천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마리아는 놀라움에 부활주일의 새벽길을 달렸습니다. 기쁜 소식을 제자들에게,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달렸습니다. 다락방의 벽을 뚫고 나타나신 주님으로 제자들은 그 기쁨으로 두려움을 이겨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평화’를 인사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샬롬’은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하느님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선포합니다. 하느님의 전능은 동정녀의 잉태도,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일도, 죽은 자의 부활도 가능케합니다. 주님의 부활은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세상을 보시기에 좋게 창조하시고, 마침내 세상을 보시기에 좋게 완성하신다는 것을 미리 알려줍니다. 주님의 부활은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모든 것의 시작이며 모든 것의 완성이심을 선언합니다. “나는 알파요, 오메가이고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시작이며 마침이다.”(계시 22,13) 주님의 부활은 우리 믿음의 시작이요, 마침입니다. 주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26)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기뻐합시다. 주님의 부활을. 알렐루야!
2024년 주님 부활 대축일에
천주교 원주교구장 조규만 바실리오 주교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십자가의 죽음으로 모든 이의 구원을 이루신 예수님께서 절망의 장소이던 돌무덤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적막하고 황량한 죽음의 기운이 우리 마음을 짓눌렀지만, 주님께서는 당신 부활로 무덤을 막은 큰 돌을 치우셨듯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심어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부활의 기쁨이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하시길 빕니다.
특별히 이번 부활을 앞두고 우리 교구에는 기쁜 소식이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 속에 새로운 교구장님이 임명되신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 교구의 목자로 일하실 손희송 베네딕토 주교님을 위해 한마음으로 기도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희망과 활력이 필요한 우리 시대 주님의 부활을 기뻐하는 오늘이지만,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짙은 어두움과 무력함이 자리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일상의 삶에서 체감되는 기후 위기 현상들은 해마다, 계절마다 더욱 심화하고,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 땅에서 일어난 전쟁은 그 끝을 알 수 없는 형국입니다. 이러한 비극 뒤엔 이기심으로 선의를 저버린 지도자들이 있고, 끔찍한 현실을 그저 무감각하게 대하는 우리도 어느새 그에 익숙해진 것 같습니다. 또한 우리 사회의 정치는 더 나은 삶을 위한 도구이기보다 전쟁터가 되어 버린 듯합니다. 화해와 일치가 사라진 살벌한 현실에서 출구를 찾지 못하는 젊은이들과 가난하고 힘없는 노인들은 더 크게 고통받으며 소외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그들이 다시금 희망과 활력을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하고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십자가 안에서 희망을 봄 오늘날 어디에서 희망을 찾아야 할지 막막한 현실 앞에서, 우리는 먼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께 시선을 돌릴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당신의 운명을 가리키며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구세주께서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신 방법은 다름 아닌 ‘자기희생’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파스카 축제 때, 어린양을 잡아 속죄의 희생 제물로 봉헌하곤 했는데, 이는 짐승 위에 안수하면서 사람의 죄가 제물에 옮겨지고, 그것을 잡음으로써 그 죄가 없어진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바로 파스카 축제의 ‘어린양’으로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죄를 온전히 짊어지신 하느님의 어린양께서는 당신의 죽음으로 극진한 사랑을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희생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엉킨 실타래처럼 풀기 어려운 현실에서 그 해답을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게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인간 구원을 위한 유일한 해답이며, 그곳엔 예수님의 희생이 자리해 있습니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부활을 향해 걷는 그리스도인 주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을 통해 우리의 죄를 씻고, 당신 부활로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는 구세주 예수님께서 거저 주신 선물입니다. 언제나 우리의 공로보다는 부족함이 더 크지만, 그 부족함보다 항상 더 큰 건 주님의 은총입니다. 그분의 은총 없이 산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한편, 우리 그리스도인은 은총의 수혜자이면서 동시에 ‘은총의 협력자’로 살라는 부르심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를 바라보기만 하는 이들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처럼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라나서는 이들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땅에 떨어져 죽는 한 알의 밀알’의 삶을 사는 이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 부활 대축일을 맞으며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외면한 채 부활의 영광만을 바라는 사람들이 되지 않아야겠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부활도 없다는 단순한 진리를 기억하고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의 십자가를 용기 있게 짊어지는 자기희생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 죄와 이기심, 어둠과 무력함을 극복하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복음의 기쁨을 전파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의정부교구 형제자매 여러분, 요즘 번잡한 사회 분위기가 보여주듯, 며칠 뒤에는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가 있습니다. 부디 진정으로 국민을 위하는 일꾼들이 뽑히기를 기도합니다. 특히, 가톨릭교회의 사회 교리에 부합해, 법과 정책을 만드는 국회의원들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 우리 각자는 비방과 혐오, 진영 논리 같은 세속적 방법과 기준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복음에 따라 관찰하고 식별하며 행동하는 유권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번 주님 부활 대축일 메시지는 제가 교구장으로 내는 마지막 공식 메시지가 될 것입니다. 그동안 저를 위해 기도하고 협력해주신 모든 교구민 여러분에게 진심 어린 감사의 마음을 담아 부활 인사를 드립니다. 죽음을 물리친 예수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희망의 선물이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주님의 부활을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2024년 주님 부활 대축일에
+ 이기헌
“그분께서 너희에게 무엇을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여라.”(루카 24,6 참조)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그리스도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부활의 은총이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복음이 전하는 부활의 사건을 떠올려 봅니다. 주간 첫날, 예수님을 지극히도 사랑했던 여인들은 예수님이 묻히신 무덤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들은 무덤이 비어있음을 발견합니다. 당황해 마지않던 그때, 천사는 그들에게 다가와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루카 24,6) 죽음은 오로지 두려움이었기에 부활의 생명은 상상키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여인들은 부활을 예고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냈습니다. 그리고는 부활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고백하며 제자들에게 그 소식을 전하러 나섭니다. “살아나신 주님무덤 부활하신 주님영광, 목격자 천사들과 수의염포 난보았네, 그리스도 나의희망 죽음에서 부활했네”라고 부활 대축일 부속가에서 노래하듯 그들은 주님 부활의 기쁨을 외치기 시작합니다. 주님의 부활은 더없는 기쁨과 희망의 사건입니다. 부활은 죄와 죽음의 한계에서 인간을 구원한 사건이자, 주님께서 당신 죽음을 통해 영원한 생명, 곧 새 생명의 길을 열어 보인 사건이기에 희망의 사건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654항 참조) 또한 그분께서는 죄의 권세를 누르시고 다시 살아나셨기에, 그리고 죄에서 죽은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초대하셨기에, 우리를 영원한 생명과 구원으로 이끌어 주는 그리스도의 부활은 더없는 기쁨의 사건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 15,14)라는 사도 바오로의 고백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우리는 믿음과 삶의 의미를 찾고 궁극적인 선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주님 부활은 우리 모두에게 큰 기쁨이며, 우리로 하여금 다시금 세상을 살아갈 용기와 희망을 안겨줍니다. 하지만 성경은 모든 이들이 즉시 부활을 깨달은 것은 아니라고 전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빈 무덤 앞에서 놀랐던 여인들의 모습(마르 16,4-5)에서 또,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자신들의 고향인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모습(루카 24,13-35)에서, 그리고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는 토마스 사도의 모습(요한 20,24-29)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직접, 그리고 천사들을 통해서 성경의 말씀을 설명해 주시면서 그들이 부활을 믿고 깨닫게 해주십니다. 주님 부활의 소식을 알리는 천사는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루카 24,5)며,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를 떠올려보라고 촉구합니다. 곧,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루카 24,7)는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시켜 줍니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약속의 실현이자 구약의 약속의 실현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652항 참조) 그러자 여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내어 부활을 깨닫고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 안에서 기억해 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부활을 직접 확인한 이들도 이렇게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부활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기억’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성숙시켜 줍니다. 또한 신앙생활에서 잊지 않고 실천해야 하는, 자신의 삶 안에서 작용하는 하느님의 뜻을 살피고자 나의 삶을 돌아보는 양심 성찰도 기억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자신의 생활을 돌이켜 봄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찾아 새롭고도 다른 하루를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현재 전 세계 가톨릭교회가 함께 진행하고 있는 시노드의 과정도 바로 우리 삶 안에서 함께 해주시는 하느님을 기억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각자의 삶 안에서 자신을 이끌어 주신 하느님 체험을 기억하고 서로 나눔으로써, 그 모습은 다르지만, 같은 신앙 안에서의 친교를 체험하게 됩니다. 나아가 ‘기억’의 의미는 신앙생활에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삶에서도 ‘기억’의 의미를 되새길 때 우리는 변화된 현재로 미래를 희망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는 이 시기에 10년 전 발생했던 가슴 아픈 사건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0년 전 4월 16일, 우리 모두의 희생양처럼 세상을 떠난 세월호의 어린 영혼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기억의 결핍에서 우리는 2022년 10월 29일, 또 다른 희생자들을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또한, 우리 스스로가 공동의 집인 지구를 무분별하게 대했던 지난날의 과오를 기억해야 합니다. 이상 기후를 발생시키는 병든 공동의 집 지구를 바라보면서도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들을 기억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기억하지 못하기에 과오를 반복하며 공멸의 길로 향해 가고 있다는 것조차 자각하지 못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공동선을 실행해야 하는 정치공동체를 위해 각자가 권리와 의무를 지니고 있다는 것도 이 시기에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사목헌장』 75항 참조) 주님의 말씀을 기억함으로써 주님께서 약속하신 바가 이루어진 부활을 깨달은 이들처럼, 우리도 늘 기억하는 삶 안에서 부활의 생명을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다시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쁨이 여러분에게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영원으로부터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말씀과 성사로 기르시는 주님을 기억함으로 주님 부활의 신비를 더욱 깊이 깨닫는 신앙인으로 거듭나기를 기도합니다.
천주교 인천교구장 정신철 요한 세례자 주교
“기억해 보아라”(루카 24,6)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되살아나셨습니다. 온갖 어둠을 물리치시고 승리하셨습니다. 부활의 기쁨과 은총이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 내리기를 빕니다.
기쁨이 가득한 오늘, 주님의 부활을 가장 먼저 체험한 여자들을 묵상해봅시다. 그들이 어떤 계기로 부활을 깨달았는지를 성찰해 봅시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음을 항상 느끼고 있었고, 기쁜 마음으로 그분을 추종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상황이 돌변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되시고 무덤에 묻히시고 말았습니다. 이에 그들은 깊은 슬픔과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보려는 일념으로 무덤으로 갔습니다. 때는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요한 20,1)여서 사람들은 대부분 태연히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자들은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이 그들의 발걸음을 무덤으로 재촉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으로 발걸음을 내디뎠지만, 무덤 입구를 막은 “매우 큰 돌”(마르 16,4)을 굴려내는 일이 문제였습니다. 그 해결 방법을 찾지 못했어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무덤으로 향했습니다. 그 문제도 주님을 향한 그들의 사랑을 꺾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오직 예수님의 몸에 향료를 발라 드릴 것만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무덤에 도착한 그들은 전혀 예기치 않았던 새로운 사건을 접했습니다. 곧 걱정했던 큰 돌은 이미 굴려져 있었고, 예수님의 시신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그들이 주님의 부활을 깨달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몹시 당황했습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요한 20,2 참조). 그래서 두려움에 더욱더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성경은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으로 숙였다.”(루카 24,5)고 말합니다. 선한 마음으로 힘차게 내디뎠던 그들의 발걸음이 완전히 멈추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재로 인해 그들은 완전히 용기를 잃고 마음과 몸이 마비되어 버렸습니다. 이처럼 당황, 두려움, 멈춤 등의 상태에 있는 그들에게 천사는 주님의 부활을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루카 24,5-6). 이러한 선포에도 그들은 아직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부활을 결정적으로 깨달았을 때는, 천사의 분부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했을”(루카 24,8) 때입니다. 천사는 ‘그분께서 너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기억해 보아라.’라고 분부했고, 그들은 ‘사람의 아들이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 냈던 것입니다(루카 24,6-8 참조). 그 기억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비로소 마음이 열려 주님의 부활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온갖 두려움을 이겨내고, 멈추었던 발걸음을 다시 힘차게 내디디어 사도들과 다른 이들에게 부활을 선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억은 주님의 부활을 깨닫게 하는 힘이고, 아울러 두려움에 사로잡혀 마비된 삶을 다시 일깨우는 힘입니다. “기억해 보아라”(루카 24,6). 이는 주님을 만났을 때를 기억하라는 뜻이고, 그분의 말씀과 행동, 그분의 삶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 우리를 위해 이미 행동하셨고, 지금도 행동하고 계시는 모든 것을 기억하라는 초대입니다. 이러한 기억은 미래의 희망에 마음을 활짝 열게 합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동하셨던 것을 기억하도록 합시다. 만약 이러한 기억이 없다면, 당황은 길을 잃게 하고, 두려움은 우리의 정신을 마비시키고 기괴한 환상마저 불러일으킵니다. 당황과 두려움은 하늘을 향한 우리의 시선을 차단하고, 우리의 지평을 어둡게 하고 희망을 꺾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당황과 두려움에 사로잡혀서는 안 되고, 그것에 지배를 받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슬픔과 절망에 잠겨 앞으로 나아갈 수 없고 주저앉게 될 것입니다. 마침내 참된 자유와 희망과 기쁨을 누리는 부활의 삶에서 아예 멀어집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역사에는 그런 때가 간혹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하자마자 추격을 당했을 때, 그들은 몹시 두려워하여 마비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이렇게 항의했습니다. “이집트에는 묏자리가 없어 광야에서 죽으라고 우리를 데려왔소?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 이렇게 만드는 것이오?”(탈출 14,11)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들은 차라리 이집트인들을 섬기는 것이 더 낫다는 궤변까지 늘어놓습니다. 이러한 힘겨운 시련이 반복될 때마다, 주님은 그들이 다시 일어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기억’을 거듭 강조하십니다. “너희는 오로지 조심하고 단단히 정신을 차려, 너희가 두 눈으로 본 것들을 잊지 않도록 하여라. 그것들이 평생 너희 마음에서 떠나지 않게 하여라”(신명 4,9).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내신 주님을 잊지 않도록 조심하여라”(신명 6,12). “너희는 이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인도하신 모든 길을 기억하여라”(신명 8,2). “예전에 여러분이 빛을 받은 뒤에 많은 고난의 싸움을 견디어낸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히브 10,32).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그분께서는 …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2티모 2,8). 한마디로 말하자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일으키셨던 사랑의 기적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기억은 온갖 두려움을 몰아내어 우리를 다시 엄연한 현실로 돌아오게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이며 사랑받는 자녀임을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 ‘훌륭히 싸우며 달릴 길을 다 달리게’(2티모 4,7 참조) 합니다. 말하자면 부활의 삶을 살게 합니다. 우리 삶에는 참으로 힘겨울 때가 더러 있습니다. 선한 마음으로 시작한 발걸음도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중단하고 주저앉을 때가 있습니다. 여러 이유로 두려움에 사로잡혀 현실이 더욱더 막막하게 보이고 실낱같은 희망마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때 우리는 특히 주님의 역사하심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곧 주님께서 내 삶에 개입하시고 행동하셨던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일어나 가야 할 길을 계속 걸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기억의 힘으로 자신의 길을 꿋꿋하게 걸으면, 이웃에게 주님의 부활을 선포할 수 있습니다. 특히 여러 가지 이유로 고통과 시련을 겪는 이웃에게 가까이 다가가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을 증언함으로써 그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고, 그들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습니다. 나아가 우리는 어두운 사회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물질만능주의와 극심한 개인주의가 만연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 무엇보다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함으로써 연대와 형제애를 증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과 이웃 그리고 우리 사회가 부활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를 구원하시는 사랑을 기억합시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하느님 사랑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켜 주시고, 성모님께서 우리의 기억에 함께해 주시길 빕니다.
2024년 부활절에
전주교구장 김선태 사도 요한 주교
성령의 힘으로 사는 부활의 증인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주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교우 여러분의 모든 가정에 부활의 축복 인사를 전해드립니다. 우리는 열흘후에 총선을 치르게 됩니다. 선거 결과에 따라 승리의 기쁨으로 축제를 벌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패배의 쓴잔을 마시고 슬퍼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선거가 우리 사회에 남겨주는 후유증으로 말미암아 각 후보의 지지자들 사이에도 쉽게 아물지 않는 감정의 골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충돌과 갈등 속에서도 항상 화해와 상생의 길을 찾아야 하며 희망을 놓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죽음의 문화는 직접적으로 인간 생명을 위협할 뿐 아니라 간접적으로 우리 사회 전체를 죽음으로 몰아갑니다.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 여러 종류의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폭력,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만 이해하는 상대주의는 회의주의와 냉소주의를 낳고, 성숙하지 못한 정당정치는 패거리 문화와 집단 이기주의를 만듭니다. 사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사회는 발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언뜻 죽음이 승리한 것 같은 이 세상에 오늘 부활의 복음이 선포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생명의 원천이신 주님께서 부활하심을 축하하고 축제를 지냅시다. 이날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계시된 날이고 인생의 의문이 해결된 날이며, 세상 피조물이 온전히 새롭게 된 날이며, 구원된 날입니다. 그러나 부활이 있기까지는 어두움과 죽음의 고통스런 시간이 있었습니다. 부활의 신비는 오로지 침묵 속에서만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금요일의 골고타 침묵, 성토요일의 빈 무덤의 침묵, 그리고 부활 아침, 제자들이 놀라서 바라보던 빈 무덤의 침묵 속에서 비로소 부활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금요일은 주님 수난의 날이고 성토요일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과 연대를 맺으신 날입니다. 이 시간들은 예수님께서 죄악과 폭력으로 얼룩지고 죽음과 고통의 어둠속에 휩싸인 이 세계를 성령의 사랑으로 품어 안으신 때입니다. 진정 부활은 이러한 사랑이 온 세상에 드러난 날입니다. “죽음보다 더한 사랑”(아가 8, 6)이 승리한 날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기쁨을 소리 높여 선포하면서도 침묵 속에 머물러야만 부활 사건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를 압박해 오는 현실이 주고 있는 침묵 속에 깊이 잠겨야 주님의 부활을 참으로 이해할 수 있고 오늘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지금 우리는 세계적인 글로벌 경제위기 앞에 희망의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위협적인 국제 무역 경쟁으로 암울한 경제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세계시장의 현실 속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제주 사회 역시 제2공항에 대한 찬성과 반대의 갈등을 해결할 실마리가 풀리지 않은 채,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상황의 연속입니다. 또한 제주의 아름다운 생태환경의 지속적인 보존이라는 가치와 일관된 지역 이기적인 주장이 맞서며 공동체화합을 저해하는 현실이 제주의 위상을 위협하고 있어 미래 평화 정착에 대한 희망이 요원한 실정입니다. 인간은 죄 많고 부족하며 한계가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개인이나 집단이나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이기적 경향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죄 많은 인간은 가치들의 서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오히려 선과 악을 뒤섞어 놓습니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참된 형제애가 자랄 수 없고 개인이나 집단이 자기 힘만을 키워나감으로써, 민족뿐만 아니라 인류의 생존까지도 위협하게 될 것입니다. 인류 역사 전체는 언제나 어두움의 세력에 저항하는 지속적인 노력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과 더불어, 타락한 인간 활동을 정화시키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고백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이 세상을 파괴하고 있는 어둠의 세력에 대해 눈 감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악과 죽음, 끝나지 않는 전쟁과 갈등에 대항하고, 인간적인 이기심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합시다. 부활이 가르쳐주는 위대한 진리는 우리가 죽은 후에 새롭게 산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과 함께 부활의 힘으로 지금 여기서부터 새롭게 산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부활입니다. 그래서 한 개인만이 아니라 가정과 본당 공동체 전체가 이 부활의 삶에 참여하기 바랍니다. 이러한 공동체야말로 부활을 증거하는 성령께서 머무시는 궁전이 될 것입니다. 이제 지난날의 묵은 역사는 십자가로 끝내고 새로운 삶의 활력을 성령의 힘으로 사는 부활의 증인이 되길 다짐합시다.
2024년 부활절에
천주교 제주교구 감목 문창우 비오
“마음 속에서 날이 밝아오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2베드 1,19)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은 주님 부활 대축일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드리며 예수님께서 주시는 부활의 기쁨과 평화가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1. 부활, 악에 맞선 선의 승리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악을 봅니다. 폭력과 억압은 세상의 다양한 영역에서 일상적인 것이 되었고, 많은 불평등이 인간이 활동하고 존재하는 곳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악의 힘에 눌려 그의 노예처럼 살아가는 사람의 처지를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사람은 자기 길의 주인이 아닙니다. 인간은 그 길을 걸으면서도 자신의 발걸음을 가눌 수 없습니다”(예레 10,23). “악마와 그 부하들”(마태 25,41)이 활개치는 세상에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사나운 늑대가 되고 섬뜩한 맹수가 됩니다(호모 호미니 루푸스, Homo homini lupus). 이렇듯 암울한 세상의 현실 앞에서, 오늘 우리는 복음서가 전해주는 ‘빈 무덤’의 소식을 듣습니다. 거기에는 여인들과 제자들이 목격한 빈 무덤이 있습니다(루카 24,3 참조). 빈 무덤은 분명한 사실이고 완전히 새로운 현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악에 맞서 아버지의 선을 행하신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부활시키심으로써 예수님을 세상의 모든 악에 대한 승리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빈 무덤을 보고 그 안에서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해 들은 여인들은 처음에는 너무도 깜짝 놀랐지만(마르 16,5 참조), 불가능한 것을 받아들이고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으며 예수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정말 부활하셨기에 우리는 오늘도 악에 대한 선의 승리를 희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하느님 아버지를 믿으며 어두운 세상에서 선한 일에 헌신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폭력과 갈취, 증오와 복수 같은 악의 모든 행위는 강한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를 죽음으로 이끌고 그 길의 끝에서 사람은 결국 무참히 실패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은 참 생명의 힘을 믿고 선으로 악에 맞서 싸웁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모든 이는, 사람이 사람에게 친구가 되고 형제가 되는(호모 호미니 아미쿠스, 프라테르, Homo homini amicus, frater) 세상을 꿈꾸고 열망하며 이뤄갑니다. 2. 부활, 두려움에 맞선 사랑의 승리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그분께서 무덤에 묻히셨을 때 그분께 희망을 두고 그분을 따랐던 제자들의 절망과 상실감을 전해줍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지만(루카 24,21 참조) 그분의 죽음으로 그들은 더 이상 아무런 희망도 가질 수 없었고 무엇보다 너무도 두려웠습니다. 복음서의 저자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 사람들이 두려워 방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 있었다고 했습니다(요한 20,19 참조). 우리도 두려워합니다. 창세기 저자는 아담이 처음으로 입을 열어 고백한 감정이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이었다고 말합니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두려워 숨었습니다”(창세 3,10). 인간의 죄는 그의 창조주인 하느님을 두려워하게 만들었고, 하느님께 죄를 지은 이후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갖고 살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사람이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노예처럼 예속된 삶을 살아가며 스스로 악과 죄에 빠져 산다고 말합니다(히브 2,15 참조). 이 모든 절망과 두려움 속에서도 “아직 어두울 때에”(요한 20,1), 예수님의 시신에 바를 향료와 향유를 준비하여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에 나오는 이 여인들은 마음속에 큰 슬픔과 두려움을 안고 있음에도 예수님을 찾고 그분을 뵙고자 하는 깊은 열망을 지닌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잃은 아픔을 마음에 담고 있었지만, 그분이 살아계실 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쏟으셨던 사랑을 기억하며 끝까지 스승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멈추지 않은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신실한 사랑, 예수님과 맺은 깊은 우정이 없었다면 여인들은 두려움을 이겨내고 무덤에까지 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던 이들만이 그분의 무덤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이겨내는 힘입니다. 주님께 대한 애틋한 사랑을 간직한 사람은 “마음 속에서 날이 밝아오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2베드 1,19) 생명의 주님께 나아가는 자신의 걸음을 멈추지 않습니다. 3. 부활, 주님을 따를 용기와 믿음의 승리 맨 먼저 ‘빈 무덤’을 본 여인들은 제자들에게 달려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고 그분께서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갈 것이니 거기서 그분을 뵙게 될 것이라는 놀라운 소식을 전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뵙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계신 “갈릴래아”(마르 16,7)를 향해 다시 걸어가야 했습니다. 예수님을 다시 뵙기 위해 제자들은 다시 한번 일어서서 주님이 계신 곳을 향해 걸어갈 용기와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위해 우리가 찾아나설 갈릴래아는 어디입니까? 갈릴래아는 예수님의 복음이 선포되는 이 세상의 모든 곳이고, 믿는 이들의 공동체가 부활의 빛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모든 곳이며, 재화와 물질을 나누고 성찬의 식탁에서 빵을 쪼개는 자리에 모여 서로 형제적 사랑과 화해를 이루는 모든 곳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복음서의 제자들처럼 우리에게도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우리의 인생길을 다시 걸어갈 용기와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 앞에는 여전히 세상의 많은 유혹과 갖가지 시련이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보다 먼저 걸어가시며 우리가 걸어갈 길을 열어주십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께서 먼저 가시고 열어주신 그 길을 따라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하느님 아버지의 오른쪽에 이르기까지(콜로 3,1 참조), 한 걸음 한 걸음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아버지의 집을 향해 올라갑시다.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생명이 죽음을 이겼습니다. 사랑이 두려움을 이겼습니다. 마냥 승리할 것 같았던 죽음은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으로 완전히 패배했습니다. 예수님처럼 사랑 안에 살고 사랑으로 이뤄낸 인생은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현재가 이미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의 미래가 이미 하느님의 섭리와 은총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우리 자신의 파스카를 살아냅시다. 예수님께서 먼저 가신 그 길을 따라 걸으며 우리도 예수님처럼 우리 인생길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은총을 구합시다.
2024년 3월 31일
주님 부활 대축일 청주교구장 김종강 시몬 주교
성체와 가난!
친애하는 춘천교구 하느님 백성 여러분!
우리는 은총의 때인 사순시기를 맞으며 신앙의 정점인 부활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사목교서인 <말씀살기와 찬미받으소서 7년 여정> 후속 권고를 다시 한번 되새기며, 함께 걷는 우리의 여정을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그리스도교 메시지는 나에게 소비 강박 심리를 거슬러, 소비로부터의 자유를 가르쳐 준다. 자신의 행복을 오로지 향유와 유복함 위에 구축하는 일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사람은 위세와 경쟁 법치에 지배되어서는 안 되고 또 잉여 숭배에 동참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한스 큉, 『나는 무엇을 믿는가』) 우리는 살아가면서 꽤 많은 것을 소유합니다. 할인하면 당장 필요치 않아도 사서 쟁여두고, 물건에 이런저런 의미를 부여하며 때마다 사들입니다. 그러다 보니 소유한 것들이 필요 이상으로 늘어나면 왠지 모를 죄책감과 많은 물건에 짓눌리는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중고 물건을 사고파는 ’당근 마켓‘이라는 앱이 활성화된 것도 이러한 소비 심리를 방증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소비가 미덕이라고 외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건을 사지 않고 사는 삶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자발적으로 검박한 삶을 영위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단순한 생활방식인 ‘미니멀리즘 라이프’를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단순한 생활방식은 자발적으로 불필요한 물건만을 줄이고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건을 적게 소유한다는 것은 불필요한 소비에 시간을 들이지 않는 것이며, 그 잉여의 시간을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하는데 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건을 적게 소유함으로써 얻게 되는 정신적 풍요로움을 경험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신앙인의 참된 풍요로움과 진정한 행복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요? 우리는 올 한 해 성체를 향한 응시와 묵상을 하며 내적인 풍요로움과 외적 삶의 은총을 청하기로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신 성체성사의 제정과 세상을 향한 헌신으로, 우리의 내적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그분 삶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성체를 영하거나 응시하는 것으로만 끝나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나의 삶 속 일상으로 옮겨 놓을 때 우리는 진정한 성체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가난한 삶은 경쟁 법칙과 잉여 숭배에 동참하지 않고, 소비와 낭비로부터 자유로운 그리스도인으로 가난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체와 가난의 삶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복음서는 그것을 증명해 줍니다. 자신을 따르겠다는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 8,20)”고 하시고, 복음선포 여정에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마르코 6,8)”하시지만,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를 진복팔단(眞福八端)으로 알려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따르기로 한 우리의 신앙 여정에 사랑의 신비인 성체와 가난이 결여된다면, 이상과 현실의 충돌이 생겨 크나큰 어려움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소비로부터 자유로울 때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올 수 있으며, 이때 비로소 신앙인의 참된 풍요로움과 진정한 행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은총의 시기를 맞아 성체와 가난의 삶에 대한 응시와 묵상과 실천으로, 우리의 삶을 영적 풍요로움으로 가득 채우시고 신앙의 정수인 부활의 기쁨을 맞이하시길 희망합니다.
춘천주교 김주영 시몬 주교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요한 20,1)
알렐루야. 알렐루야!
십자가 위에서 희생되시어 돌무덤에 묻히셨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드리며, 우리에게 빛과 구원을 주신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군종교구민 여러분께 부활 축하의 인사를 전하며, 부활하신 주님께서 전해주신 평화의 선물이 분쟁과 전쟁으로 고통받고 상처로 얼룩진 형제자매님들의 마음에도 전해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요한 20,2) 안식일 다음 날, 이른 아침. 마리아 막달레나와 몇몇 여인들이 예수님 시신에 향료를 발라 드리려고 무덤에 갔습니다. 용감하고 신심 깊은 여인들은 향유를 예수님 시신에 발라 드림으로 마지막 예를 갖추고자 위험을 무릅쓰고 무덤을 찾았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여인들이 도착했을 때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빈 무덤’을 목격한 여인은 제자들에게 달려가 ‘누군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갔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전달하였습니다. 그리고 마리아 막달레나는 안타까움과 슬픔 속에 끊임없이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이 간절함에 감동되셨을까요? “마리아야!”(요한 20,16)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녀를 부르십니다. ‘빈 무덤’의 목격과 증거는 우리 부활 신앙의 근간입니다. 우리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만약 영영 깨어나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분의 지상 33년의 삶, 특히 공생활 3년간의 말씀과 행적은 세기의 성현 중 한 분의 것으로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최종 한계인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예수님은 인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이 증명된 것입니다. 볼 수 있고 증명된 사실에 대해서도 믿지 못하는 세상에서 육신의 죽음 후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부활 신앙은 허황된 주장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가설이 아닌 실재이며, 사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 진리를 믿는 이들이며, 증인들입니다. 부활을 살기 위한 ‘줄탁동시(啐啄同時)’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죽음을 이기시고 승리하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신뢰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부활을 ‘내가 사는 것’입니다. ‘줄탁동시’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병아리가 알에서 깨어나기 위해 어미 닭은 밖에서 쪼고, 병아리는 안에서 쪼며 서로 협동하여 일을 순조롭게 한다’는 뜻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 부활의 영광과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나 역시도 피나는 영적 노력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영적인 것을 선택해 나가고, 어둠보단 빛으로 나아가고자 힘씀으로써, 현실 속에서 부활을 체험해 나갈 수 있습니다. “갈릴래아에 계실 때에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기억해 보아라.”(루카 24,6) ‘줄탁동시’의 자세로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요? 천사는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예수님께서는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서 뵙게 될 것이다.’(마태 28,7 참조)라고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하였습니다. ‘갈릴래아’는 어떤 곳입니까? 사실 이곳은 이방인들의 지역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곳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갈릴래아 지방의 작은 마을 나자렛에서 30년을 지내셨고, 공생활 3년을 갈릴래아 호수를 근거로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서 40일간 기도하신 후, 갈릴래아로 나가시어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라고 선포하시며 공생활을 시작하셨습니다. ‘갈릴래아’ 호수에서 어부로 살아가던 이들을 포함하여 부르심을 받은 열두 명의 제자들과 함께 말씀과 행적으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 8,20) 하실 정도로 어려운 여건 속에서 반대자들의 집요한 공격을 받으시며 사명을 수행하신 곳이 ‘갈릴래아’입니다. 그러나 갈릴래아는 측은지심의 마음으로 가난하고 소외되고 고통받는 이들을 돌보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예수님과 제자들의 사랑이 싹튼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러기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를 제자들과의 해후의 장소로 정하신 것 같습니다. 스승을 잃고 상심하여 방황하던 제자들 역시 스승님과 함께했던 지난 3년을 회상하며 기쁜 마음으로 갈릴래아를 향해 발길을 옮겼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갈릴래아로 나아갑시다. 여기서 우리 자신에게 물어봅시다. 나의 ‘갈릴래아’는 어디입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기쁨을 나눌 수 있는 자리입니까? 그 갈릴래아에는 누가 있습니까? 예수님의 갈릴래아와 같이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이 함께 있습니까? 만일 나의 갈릴래아가 예수님의 갈릴래아와 멀어져 있다면 우리의 발길을 새로이 옮겨야 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부활의 예수님을 만날 수 있고, 그분의 기쁨과 사랑과 평화를 이웃과 나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군종교구민 여러분! 겨울의 맹추위 속에 얼어붙은 대지를 뚫고 새 생명이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육신의 부패로 악취를 풍기는 무덤이 새 생명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빈 무덤’은 우리의 희망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콜로 3,1)라고 말합니다. 부활의 기쁨을 내 것으로 하기 위해 천상 것을 추구하는 신자,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갈릴래아’를 자주 찾는 교우 여러분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다시 한번 부활의 인사를 전하며, 여러분의 가정과 부대에 새 생명의 은총이 충만하시기를 기도합니다.
2024년 부활절에
천주교 군종교구장 서상범 티토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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