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31일 (수)
(백) 성탄 팔일 축제 제7일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가톨릭 교리

가톨릭 교리: 주님 보시기에 좋은 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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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5-12-30 ㅣ No.6638

[가톨릭 교리] 주님 보시기에 좋은 몫!

 

 

주님 보시기에 좋은 몫은?

 

가톨릭교회 내에서 한때 레지오 마리애의 인기(?)가 좋았는데, 요즘은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을 듣습니다. 성당 어느 단체나 인원이 줄고, 연령이 높아진 것은 공통된 특징이지만, 특히 기도와 봉사를 함께 하는 레지오 단원의 감소는 안타깝게 여겨집니다. 기도하는 것은 좋지만, 봉사까지 하기엔 시간이 없다는 사람도 보았고, 봉사하는 레지오 활동보다 자유롭게 성경 공부하는 것이 더 좋다는 사람도 간혹 봅니다. 성당에서 활동하고, 공부하고, 기도하는 모임은 다 좋습니다. 주님 보시기에 모두 좋은 몫을 택한 것입니다. 단지 기도와 봉사를 함께 하는 활동이 더 활성화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마리아와 마르타 자매는 라자로의 동생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따르던 신앙 공동체 일원이었고, 특히 예루살렘 근처 베타니아에 살면서 예수님을 자주 모셨습니다. 라자로는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인물이었고, 그가 죽었을 때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으며, 결국 예수님으로 인해 다시 살아났습니다. 라자로의 ‘다시 살아남’은 예수님의 권능과 사랑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으로 요한복음 1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어느 마을에 가셨을 때 마르타는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셨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모시고, 식사를 대접해 드리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마르타의 동생 마리아는 언니를 돕지 않고, 주님 발치에 앉아 그분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언니 마르타 혼자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했습니다. 어느 순간 화가 난 마르타는 예수님께 다가가 말합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루카 10,40) 이 모든 상황을 다 아시고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말씀하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41-42)

 

 

봉사란 가장 높은 수준의 완덕

 

마르타는 예수님의 식사를 준비했고,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르타가 화가 난 이유는 아마 본인도 예수님 곁에서 예수님 말씀을 듣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고, 자신의 상황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예수님 앞을 지키는 동생 마리아에게 서운하고 분한 마음을 예수님께 일러바친 것 같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했다!” 이 말씀을 근거로 해서 봉사(마르타)보다 관상 혹은 기도(마리아)의 중요성과 우선성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말씀을 열심히 듣는 마리아가 좋은 몫을 택한 것은 맞지만, 부엌에서 밥하고 예수님 시중드는 마르타가 나쁜 몫을 택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느 본당에 교구장님이 방문하셨을 때, 성전에서 전례와 성가 봉사하는 사람은 좋은 몫을 택한 것이고, 밖에서 땀 흘리며 주차 관리하고 밥하는 사람은 나쁜 몫을 택한 것입니까? 주님을 위해 몸으로 하는 봉사가 말씀을 듣는 것보다 덜 중요합니까? 인간의 눈에 그렇게 보일 수 있지만, 하느님 보시기에 그럴 수 없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봉사란 가장 높은 수준의 완덕이라 했습니다. 즉 제대로 기도한 사람만이 제대로 봉사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주님 보시기에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한 것이 맞고, 마르타도 좋은 몫을 택한 것이 맞습니다. 단지 마르타는 중간에 마리아를 부러워하고 곁눈질하며 이미 마음을 빼앗긴 것이 문제입니다. 관상이 아닌 봉사를 선택한 것이 잘못이 아니라, 본인에게 주어진 몫에 충실히 집중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몫을 부러워한 것이 문제입니다. 만일 두 자매 모두 예수님 발치에서 마냥 예수님 말씀만 듣고 있었다면, 아마도 예수님께서 두 자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을까요? 

 

“그런데 밥은 언제 먹냐??”

 

 

기도는 하느님 현존 체험

 

요한복음 11장 전체는 라자로의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라자로가 죽고(1-16), 예수님께서 찾아가시어 마르타와 라자로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신 후(17-27), 라자로의 죽음에 대해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전하고(28-37),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려주시는 이야기가 나오고(38-44), 이어서 예수님의 기적 이야기에 사람들이 동요하자 최고 의회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는 내용(45-57)으로 11장이 마무리됩니다.

 

라자로의 소생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는 결정적 사건이고, 인간 구원의 내용과 방향을 미리 보여줍니다.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 자신이 부활이고 생명이라 알려주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11,25-26) 우리가 장례미사 중 자주 듣는 구절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물론 ‘소생’과 ‘부활’이란 말엔 차이가 있습니다. 둘 다 다시 살아나는 것이지만, 전자는 다시 살아난 후 다시 죽게 되는 것이고, 후자는 다시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질까요? 부활이요 생명이시라는 예수님 말씀을 듣고 마르타는 이렇게 답합니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11,27) 마르타는 예수님의 자기 계시 말씀을 듣고, 예수님이 주님이고 하느님의 아들임을 믿습니다. 이 내용이 그리스도교 신앙고백의 핵심입니다.

 

라자로의 소생은 예수님이 부활과 영원한 생명 자체이심을 드러낸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이를 일으켜 세우셨는데, 이는 믿는 이들에게 약속된 하느님 구원사건을 미리 보여준 것입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11,39)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것이 없습니다. 믿음 안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고, 믿음은 불가능을 뛰어넘게 해 줍니다. 믿음은 기도로 표현되고, 강화됩니다. 

 

그리고 기도의 목적은 하느님과 일치입니다. 기도란 내 몸과 마음을 하느님께 향하는 것이고, ‘지금 여기서’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며 함께하는 것입니다. “제게 기도란 마음을 들어 올리고 온전히 하늘을 바라보는 일이며, 시련이나 기쁨의 한 가운데에서 감사와 사랑의 마음으로 외치는 일입니다.”(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 기도는 내 말을 하느님이 들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을 내가 듣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고요해질 때까지 참고 기다린 후 하느님 말씀을 듣는 것이 기도입니다.

 

[성모님의 군단, 2025년 12월호, 조한규 베네딕토 신부(가톨릭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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