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천주교계 월간지 <성모기사> 2004년 9월호에 게재된 글로 지난 8월 5일 <가톨릭 굿 뉴스> 등 웹사이트 게시판에 먼저 발표된 글이기도 합니다.
웹사이트 게시판에 먼저 발표된 글을 <성모기사>의 편집자가 읽고 가져다가 9월호에 게재한 것이지요. 웹사이트에 먼저 발표된 글을 종이 매체의 편집자가 읽고 가져다가 지면에 게재한 경우는 지난 2001년 <가톨릭 다이제스트> 12월호에 게재된 「헤픈 내 가을의 눈물」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가 아닌가 싶습니다.
웹사이트 게시판에 올릴 때의 이 글의 제목은 「나의 재미있는 산행 기도」였습니다. 이 제목을 「성서와 일상과 기도의 삼박자」라는 더욱 멋진 제목으로 바꾸어주고, 세 개의 중간 제목(「기도를 위한 나의 산행」「물 마시며 드리는 행위의 기도」「기도행동으로서의 건강운동」)까지 달아서 <성모기사> 9월호에 실어주신 편집자에게 깊이 감사하며 경의를 표합니다.
지난 8월 5일 이미 웹사이트에 올렸던 글이지만 <성모기사> 9월호에 게재된 상태 그대로 다시 한번 '굿 뉴스' 게시판에 올립니다.
아울러 이번에도 <성모기사>의 고료 6만원으로 6명의 지인들에게 <성모기사>를 일년 동안 우송해 줄 것을 부탁했음을 밝힙니다.
삶 그리고 빛
지요하 막시모
성서와 일상과 기도의 삼박자
우리 그리스도교의 신앙 안에는 여러 숫자의 의미들이 강하게 제시된다. 3이라는 숫자, 40이라는 숫자, 그리고 12라는 숫자가 그것이다. 7이라는 숫자도 무시할 수 없다.
나는 일찍부터 그 숫자들의 의미를 내 일상 생활 안에서 나름대로 체현(體現)해 내는 삶을 살고자 했다. 그렇게 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기도 행동'을 생활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그 숫자들을 사랑하고 내 행위로 체현하는 것도 일종의 의미 있는 기도일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기도를 위한 나의 산행/
나는 글 짓는 작업을 시작할 때마다 '봉헌의 기도'를 바치는데 성호 긋기는 세 번을 한다. 봉헌의 기도 전후에 하고, 또 작업을 시작하면서 한번 더 성호를 그으니 도합 세 번이다. 3이라는 숫자를 의식하고 하는 일이다.
지금 같은 복철에도 거의 매일같이 오후에는 고장의 명산 백화산을 오르는데, 내 당뇨를 다스리기 위한 운동 목적만으로 등산을 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묵주기도를 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운동도 하고 기도도 하는, 그 일거양득·일석이조를 위한 등산이다.
그러므로 내가 등산을 하는 시간은 기도하는 시간이다. 그야말로 하느님의 은총을 체감하는 시간이다. 또 그러므로 나의 등산은 기도 자체이기도 하다.
내 등산 자체가 바로 기도이기 위해서는, 산행 과정의 여러 가지 행위들에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중요하게 제시되는 숫자들을 결부시켜 체현하는 것이 필요하리라는 생각을 오래 전에 했다.
그래서 한때는 3이라는 숫자와 결부시켜 묵주기도를 산을 오르며 15단, 내려오면서 15단, 도합 30단씩 했다. 그렇게 하자니 시간이 너무 걸려서(요즘은 일이 많아진 관계로) 지금은 20단으로 줄였다.
/물 마시며 드리는 행위의 기도/
산을 오르고 내리면서 두세 곳 약수터에서 물을 마시게 되는데, 매번 네 모금씩 세 번, 도합 열두 모금을 마신다. 물을 꽤 많이 마시는 셈이다.
나는 특히 4라는 수를 좋아한다. 물을 네 모금 마시고 입을 떼면서 4라는 수의 의미를 의식하곤 한다. 내가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는 네 가지 요소(찬미·감사·통회·청원)가 조화를 이루어야 함을 상기한다. 산을 오르는 내 육신이 4지(四肢)로 되어 있음을 생각한다. 내가 밥을 먹는 밥상도 다리가 네 개요, 타고 다니는 자동차도 바퀴가 네 개다. 지금은 여름이지만 곧 가을이 오고 다시 겨울도 오고 또 새봄이 올 것이다. 사계절의 그 순환 속에서 나는 산다.
내가 특히 4라는 수를 좋아함은, 4라는 숫자를 중국 글자 죽을 사(死)자와 결부시켜 재수 없는 수로 여긴 나머지 아파트의 층수 표시에서도 4층을 없앨 정도로 4를 기피하는 일부 우리 한국 사람들의 미망(迷妄)을 안타까워하는 탓이기도 하다.
물을 네 모금씩 세 번 나누어 마시며 다시 3이라는 숫자를 생각한다. 삼위일체 하느님을 생각하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생각한다. 그리고 정결·청빈·순명이 삼위일체를 이루어야 하는 성직자·수도자들의 삶을 생각한다(성직자들에게는 청빈은 의무 사항이 아니지만…).
그렇게 물을 네 모금씩 세 번으로 나누어 마시면 도합 열두 모금이 된다. 12라는 숫자는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는 곧바로 12사도를 상기시킨다. 하루 24시간 중에서 12시는 낮과 밤의 정점을 이룬다. 하느님 신앙 안에서 12라는 수는 열두 지파를 의미하고, 그것은 곧 온 세상을 상징한다.
그런 것들을 두루 생각하면서 약수터에서 물을 마실 때마다 네 모금씩 세 번으로 나누어 열두 모금을 마시니, 나의 물 마시는 행위는 곧바로 기도가 된다. 말하자면 행위로 하는 기도인 셈이다.
/기도행동으로서의 건강운동/
백화산 정상에는 몸을 부딪치기 알맞은 바위가 하나 있다. 나는 산 정상에 오르면 으레 맨손체조를 하고 나서 그 바위에 몸 부딪치는 행동을 한다. 먼저 손바닥을 바위에 40번 부딪친다. 그리고 배를 40번 부딪친다.
그러며 40이라는 수의 의미를 생각한다. 40이라는 숫자가 그리스도교의 성서 상에 나타나는 수많은 중요한 사건들과 결부되고 있음을 상기한다. 또 40이라는 수가 우리네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 숫자인가를, 왜 사람 나이 40을 일러 불혹(不惑)이라 하는지도 생각한다. 사람 나이 40은 인생의 '반환점'이 아니던가….
다시 손바닥을 40번 부딪치고, 이번에는 등을 부딪치는데, 등은 내 나이 수만큼 부딪친다. 내 나이 수만큼 부딪치는 것은 내 몰염치한 나이를 생각하면서 매일같이 반복적으로 어떤 '각성(覺醒)'을 얻기 위해서다. 내가 내 등을 바위에 부딪치는 것이 아니라 바위로부터 등을 얻어맞는 느낌을 얻으려고 한다.
사람 나이 오십을 일러 지천명(知天命)이라고 했던가. 1998년부터, 그러니까 내 나이 만 쉰 살 때부터 해온 일이니 벌써 그 각성의 매가 여섯 대나 늘어났지만, 내가 얼마나 각성의 덕을 쌓고 있는지는 아직 미지수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몇 대나 더 각성의 매를 늘려나갈 수 있을지, 그것은 더욱 모른다. 다만 나는 내 나이 수만큼 바위에 내 등을 치고 바위로부터 각성의 매를 맞으면서 오늘을 살뿐이다.
등 부딪치기를 마치면 다시 손바닥을 40번 부딪치고 한 번 더 배를 40번 부딪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손바닥 40번 부딪치기를 한 번 더 한다. 그러므로 내가 정식 기도를 할 때는 합장을 하는 손바닥은 40번씩 네 번을 부딪치는 셈이다.
백화산에는 여러 곳에 간단한 운동 기구들이 설치되어 있다. 나는 허리 돌리기와 철봉에 매달리기는 꼭꼭 하는데, 등산 코스 선택에 따라 운동 기구들을 한 번 만나는 경우도 있고, 두 번이나 세 번 만나는 경우도 있다. 운동 기구를 이용할 때는 허리 돌리기는 꼭꼭 40번씩을 하고, 철봉에 매달리기는 열두 번을 한다.
이처럼 그리스도교 신앙과 결부되는 숫자를 의식하면서 운동을 하니, 그 운동들은 하나하나 '기도 행동'이 되는 셈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나의 그런 운동들도 기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산행을 하면서 묵주기도를 하고 약수터에서 물 마시는 것과 바위에 몸 부딪치는 것, 그리고 기구를 이용하여 허리 돌리기와 철봉에 매달리는 것까지 하느님께서 제시해 주신 고귀한 숫자들에 맞춰 체현을 하니, 나의 산행은 그 자체로써 기도가 될 터이다.
나는 믿는다. 나의 산행은 기도임을…. 산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그 하느님을 내 몸으로 체현하는 것임을…. 나의 그런 '기도 행동'은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크나큰 은혜임을….
그 기도의 힘으로 나는 오늘도 병마와 싸우며 최선을 다해 충실히 살아간다. 늘 하느님을 생각하면서….
/소설가. 장편 「인간의 늪」「회색정글」외 다수. 충남문학대상 외 수상 다수. 충남소설가협회 회장/
*2004년 <성모기사>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