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삼국유사’ 가운데서 정수(正秀) 스님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다지 길지도 않은 이야기이다.
신라 제40대 애장왕(800~808) 때였다. 승려 정수는 황룡사에서 지내고 있었다. 겨울철 어느 날 눈이 많이 왔다. 저물 무렵 삼랑사에서 돌아오다 천암사를 지나는데, 문 밖에 한 여자 거지가 아기를 낳고 언 채 누워서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스님이 보고 불쌍히 여겨 끌어안고 오랫동안 있었더니 숨을 쉬었다. 이에 옷을 벗어 덮어 주고, 벌거벗은 채 제 절로 달려갔다. 거적대기로 몸을 덮고 추운 밤을 지새야 했다.
‘감통’편의 맨 마지막에 나오는 ‘정수 스님이 얼어 죽을 뻔한 여자를 구하다’(正秀師救氷女) 조의 앞 대목이다. 구차한 설명을 붙일 것도 없다. 원체 감동스러운 모습은 우리에게 바로 다가오는 까닭이다.
기독교의 ‘성서’에서 예수는, 불쌍한 어린 아이에게 베푼 덕, 외로운 과부에게 베푼 자선이 곧 내게 해준 일이라고, 세상에서 예수를 위해 한 일이 아무 것도 없다고 머리를 조아리는 사람에게 말한다. 아마도 예수의 입장에서 그 사람을 위로하자는 차원의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크건 작건 실천의 문제다.
정수 스님의 경우에도, 이론으로서 받아들인 철학을 넘어 생활 속에서 움직이는 실천원리로 불교가 신라 사회에 자리잡았음을, 우리는 이 같이 짤막한 삽화에서 읽는다.
애장왕 때라면 9세기가 막 시작됐을 무렵이다. 저물어 가는 나라의 분위기가 여기저기 감지되고, 정치적으로는 더욱 혼란스러워지는 때였다.
그런 사회를 지탱해 주는 것은 저 잘난 사람들이 아니었다. 여분의 옷 한 벌 없이 살아가는 한 승려가, 돌아가 덮을 이부자리 하나 없는 처지에, 입고 있던 옷을 몽땅 벗어주고 알몸으로 달려가거니와, 그 순간이 바로 신라 사회의 고갱이였다고 말한다면 어떨까?
기록에 나타난 ‘우리나라 첫 번째 스트리퍼’라고, 나는 이 대목을 농담처럼 설명하곤 한다. 그러나 나의 그 농담 속의 진담을 아는 사람은 다 알리라.
시민운동을, 나는, 진솔한 인간성의 구현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 운동이라면 이미 정수 스님 같은 신라 사람이 했었다. 거기에는 그다지 많은 돈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본디 돈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없는 상태에서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면서 하는 것이라고 해야 옳겠다.
요사이 시민운동 단체들이 막대한 정부 돈을 받아가며 활동한다고 말이 많다. 1년에 500여 단체가 400여억원을 받았다고 하니, 어림잡아 한 단체 당 1억원꼴로 받은 셈이다. 시민단체에 정당한 자금 지원을 해주는 법이 있고, 오히려 그것이 모금이라는 민폐를 끼치지 않고 지속적인 활동을 보장해 준다는 점에서 탓할 일은 아니다. 더욱이 과거의 어용단체, 이제는 반시대적 활동을 하는 쪽이 돈도 더 많이 받아간다는 항변을 단지 변명으로만 듣지 않겠다.
그러나 문제는 시민단체의 활동이 어느새 상당한 돈을 들이지 않고는 유지되지 않는 시스템으로 고착되었다는 점이다.
처음으로 돌아가 생각한다면, 시민운동을 벌인 어느 단체건, 회원들의 자발적이고 희생적인 정신에서 바탕을 삼았을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의 주장은 작지만 힘이 있고 알맹이가 넘쳤다. 역동적인 민주화의 바람을 일으킨 개개 활동 주체들은 거기서 무엇에도 견줄 수 없는 보람으로 가득 찼었다. 우리보다 시민운동의 역사가 훨씬 깊은 일본인들마저 그런 한국의 상황을 부러워하지 않았던가.
돈을 받아쓰는 데 거기서 자유로울 개인이나 단체는 없다. 구구한 변명이나 항변을 하기보다, 살림살이의 규모를 적당히 하여, 아름다운 독립의 길을 찾아가는 것이 우선이다. 시민운동을 생계의 수단이나 출세의 발판으로 삼았다고는 믿지 않는다. 만약 그런 이들과 그런 단체가 있다면 처음 마음으로 돌아가라.
정수 스님은 제가 입은 옷 한 벌을 벗었다. 그것은 그의 재산 전부였다. 모르긴 해도 그 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