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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위 성인전 7, 聖 앵베르 (라우렌시오,주교 1796~1839)1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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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명 범세형(范世亨)인 聖 앵베르주교님(라우렌시오)은 1796년 4월 15일 프랑스 부슈뒤로오느현
마리야느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액스 앙프로방스 평야가 굽어 보이는 구릉 위에 아담스럽게
올라앉은 카브리에스면 칼라스라는 마을의 조그만 집에 살고 있었다.
그의 부모는 매우 가난하여 아들에게 학교 교육을 시킬 능력이 없었으므로 앵베르는 늘 슬퍼했다.
그는 여덟살때 길에서 돈 한푼을 주웠는데, 이것이 그의 일생을 두고 잊혀지지않는 큰 전환점이 되는데,
다른 아이 같았으면 혹, 군것질을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앵베르는 알파벳(Alphabet)을 배우기위해
책을 구입해 마을에서 마그리트라는 부인의 도움으로 열심히 배워 얼마후 글을 읽게 됩니다.
그의 이욕은 점점 커져서 벽에다 숯으로 책의 글자를 낙서를 하는등, 이같은 앵베르의 열의를 보고
감격한 마르그리트 여사는 철필과 공책을 선사합니다. 이런 앵베르를 눈여겨본 ,본당 이르노 신부는
앵베르를 학교에 입학시킵니다. 앵베르는 학비를 면제 받지만 아버지는 이것마저 감당할수 없어
앵베르는 수도회에서 묵주 만드는 것을 보고, 틈만 나면 묵주를 만들어 스스로 학비를 벌면서,
남은 돈은 아버지에게 15프랑씩이나 매달 보내 드립니다. 그후 앵베르는 천주성의 확증을 얻기위해
애그밸의 트라피스트(Trappe)수도원에서 묵상 생활을 하면서 그 수도 원장에게 희망을 말하자.
원장은 앵베르 모습에서 천주님 무르심이 있음을 쉽게 알아보고 외방 전교회 신학교로 보냅니다.
그후 1819년 3월 27일 부제가 되고 그해 12월18일에 신품을 받았으며 중?사천교회로 임명되어
1820년 3월20일에 파리를 떠나 사천교구에와 12년동안이나 열심히 또한 효과적 성무를 행함으로써
조선 사목을 위한 철저한 준비로 많은 경험을 얻습니다. 그는 얼마후 주교를 모시기위한 조선 사절단이
변문에 도착한 것을 알고 그들과 만나게 됩니다. 앵베르 주교는 그해 12월 17일밤에 조선교우들과 함께
변문을 떠나, 앞서 두 신부(모방,샤스탕)가 입국할 때 겪은 모험과 방법에 따라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의주 관문을 숨어서, 13일후 한양에 무사히 도착하게 됩니다. 그는 최초로 조선땅을 밟은 주교였으니
이는 조선 교구설정 6년만으로 이로써 조선교구는 명실상부한 조직을 갖추게 된것입니다,
한편 조선교우들은 교회 창설한 이래 53년만에 주교를 모시게 되었으니 그들의 기쁨은 어떠 했으랴!
앵베르 주교가 한양에 들어와서 느낀 감격은 다음에 적은 그의 편지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_천주는 찬미 받을 지어다. 나의 고달프고 피로한 것쯤은 문제가 아닙니다.
나는 사랑하는 아들들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들을 보면서 느끼는 행복은 그들과 같이 있기 위해
맛보지 않으면 안되었던 모든 고생을 잊어 버리게 하였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믿는 교우의 지붕 밑에서 1839년 첫날을 보냈습니다.
나의 도착 시기를 짐작하고 있던 모방 신부는 그날 저녁때 나를 만나러 왔습니다..
우리는 형제애로써 반갑게 껴안았습니다. 프랑스 국내에 있는 나의 가정 이었을지라도
이조선의 한가운데 있어서와 같은 그것도 외국사람의 틈 바구니에 끼어서 더 이상 열렬하고
더 이상 즐거운 인사를 바꿀 수가 있었을 것으로 나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앵베르 주교는 입국 첫날부터 그를 보좌하던 모방, 샤스탕 신부와 함께 조선 전교를 위해 힘쓰면서
틈틈이 조선말을 공부하여 의사 소통이 가능할 즈음 고해성사를 보고 성체를 영 해줍니다. 그해 모방,
샤스탕 두 신부와 2천여명의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죽어가는 어린이들 2백여명에게도 세례를
줍니다. 그 결과 6천여명의 신자수가 무려 만명을 헤아렸으니 이런 놀라운 교회발전의 이면에는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이 숨어 있었다는 점을 다음과 같은 앵베르 주교의 편지에서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
_나는 지칠대로 지쳐서 큰 위험에 빠져있다, 매일 새벽 두 시 반에 일어나서 신공을 드리기위해 집의
사람들을 일으킨다, 세시 반 부터는 교무일을 보고 지망자가 있으면 성세를 주고 견진성사를 주고 있다,
그 다음 미사를 드리고 성체를 영하고 감사의신공을 올린다,
성체를 영한 교우는 해가 뜨기전 서둘러 돌아간다. 낮에도 같은 수의 교우가 고해성사를 보러 하나씩
남 모르게 찾아와서 다음날 아침 성체를 영하고 가버린다. 나는 같은 집에 2일 이상 머무를 수가 없다.
동이 뜨기전에 다른 집으로 가야한다 (서양인과 동양인의 판이한 모습은 프랑스 신부님들의 행동을
제약하는 중요한 원인이 됩니다, 이분들은 늘 방갓을 눌러쓰고 상복으로 변장하고 다님) 몹시 배가 고파
서 고생이 된다. 새벽 두 시에 일어나서 12시가 되지 않으면 식사를 할 수가 없다. 게다가 그것도 맛없고
불충분하며 영양가가 적은 음식물이니..이 춥고 메마른 국토에 있어서는 실로 참을 수가 없는 일이다.
식사 후에 잠시 쉬고, 그후 늙은 신학생(정하상,이재의 최형,이문우등)에게 신학을 가르치고 이를
마치면 밤이 되도록 고명을 듣고 있다. 밤 아홉 시가 되면 돗자리와 담요를 깐 흙바닥 위에서 자게 된다,
조선에는 침구도 이불도 없다 (아주 가난한 교우 집)이것은 허약하고 병들기 쉬운 나에게는 몹시 벅찬
일 들이다. 어쨌든 나는 아주 벅찬 생활을 하고 있다 .괴로운 일이 많은 가운데 이 이상 참을 수 없는
곳까지 다다랐다고 나는 생각된다. 이러한 괴로운 생활을 하는 가운데서도 다시 시퍼런 칼날에서
목이 떨어져서 이 목숨을 마칠 위험에 부딪히고 있다는 것도 생각해 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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