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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 1,소양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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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태 [cosma] 쪽지 캡슐

2004-10-14 ㅣ No.72741

정주영.............1. 소양강

1. 소양강

 

"강물을 막아 댐을 건설해야겠다."

 

대통령 박정희의 생각이었다. 한강의 한 지류인 북한강의 소양강 한 자락을 막아 댐을 건설하는 것을 놓고 세계적인 댐 건설 회사들은 물론 콘크리트로 단단하게 막아야 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미 세계적인 공사가 있다는 정보를 들은 일본 건설회사는 관련 장관들과 로비가 끝내고, 곧 계약과 함게 착공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이 큰 공사에 별희한한 대안(代案)을 제시하는 사람이 있었다. 콘크리트가 아니라 모래와 흙으로 막하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주영이었다. 정주영이 제시한 공법은 이미 제2차 세계 대전 후에 전략적인 위치에 댐을 건설할 때는 별 이의없이 채택되는 공법이었다. 대통령 박정희가 현대건설 사장 정주영을 불러 그 이유를 물었다.

 

"폭탄이 떨어지면 콘크리트 댐은 박살이난다. 그러나 모래와 진흙으로 건설한 사력댐은 폭탄이 떨어져도 자리에 웅덩이만 생길뿐이 댐이 터지지 않는다."

 

포병 출신의 박정희가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소양댐은 결국 정주영의 아이디어대로 사력댐으로 건설하기로 결정이 났다. 관계 장관과 일본 회사의 코가 납작해졌다. 이 때 정주영은 박정희를 처음 만났다. 소양강 댐공사가 사력댐 공사로 결론이 나자 지난 날 압록강에 수풍댐을 건설한 일본인 노엔지니어는 소양강은 강바닥에 암반이 약하여 콘크리크댐을 건설할 수 없다는 고견으로 정주영의 해박한 혜안에 동의했다.

 

정주영은 토목공학과를 나온 사람도 아니고 발전학을 연구한 사람도 아니다. 무(無) 전공이 그의 전공이었고, 글방 공부에 보통학교 다닌 것이 공부의 전부이니, 요즘 같은 고학력 시대에 보면 무학(無學)이 그의 학력이었다.

 

아버지는 6남1녀의 장남이었고, 정주영은 6남2녀의 장남이었다.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 지금은 북에 있다. 서당 3년에 소학 대학 자치통감 5언시 7언시를 익히고, 보통학교에 들어갔으나 배울 것이 없어 맨 날 놀고도 성적은 2등을 하는 걸물(傑物)이었다. 열 한 살에 몹시 기침을 해서 학교를 중단한 일이 있었다. 그 때는 왜 그렇게 기침이 나오는지 약 한 톨 먹지 못하고 끙끙대다가 나았는데, 후에 알고 보니 폐병을 앓은 흔적이 폐에 남아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열 네 살에 보통학교를 졸업했다. 본인은 공부를 더 해서 학교 선생을 했으면 좋겠다는 희망이 있었으나,장남의 장남으로 태어난 주영을 아버지는 농사꾼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래야 아래에 있는 여섯 동생들을 키우고 성가(成家) 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주영의 생각은 달랐다. 나이가 들수록 고삐를 매지 않은 '인간 황소'가 되어, 농사도 잘 지었지만, 틈만 나면 고향 땅을 박차고 나가려고 이리 굼실 저리 굼실, 굼실거리고 있었다.

 

신문을 보니, 청진에 제철공장이 생겨 노동자를 구한다는 기사가 있었다. 같은 마을에 사는 3년 선배를 꼬셔 가출(家出)을 감행했다. 첫 번째 가출이었다. 우선 원산으로 갔다. 통천에서 원산은 200리, 도중에 임절미 하나에 시래기 국 한 사발 얻어 먹고 간신히 원산에 왔다. 원산과 청진 사이에 시메트 공사판이 있었다. 가던 길을 멈추어 흙이 가득찬 트럭을 레일 위에 놓고 미는 작업장에 들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다. 작업장에 손님이 왔대서 나가 보았더니, 뜻밖에 아버지였다. 실패한 가출이었다. 대대로 이어온 농토를 지켜야 한다는 아버지를 따라 다시 집에 갔다.

 

궁둥이가 근질거려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었다. 친구 둘을 꼬셔 다시 서울행 가출을 감행했다. 도중에 한 친구의 친척 집에 들어갔다가, 그 친구의 형님이 길목을 지키고 있어서 그 친구는 잡혀 가고, 다른 친구와 정주영은 서울행을 강행한다. 도중에 신사 한 사람을 만났다. 금강산의 한 호텔로 취직하여 가는 요리사라는 말을 듣고, 그를 따라 금강산에 갔다가 집에서 몰래 훔쳐온 노자(路資) 돈 마져 다 날렸다. 세상 도처에 멀쩡한 사기꾼이 있다는 사실을 그 때에 알았다.

 

금강산 장안사에서 김화 쪽으로 길을 재촉했다. 중간에 친척집에 있어서 들렸다가 이번에는 아버지가 쳐놓은 덫에 걸려 다시 고향으로 잡혀갔다. 두 번째 가출도 실패였다.

 

또 신문을 보니 평양과 경성의 부기학원에서 6개월 코스의 경리학원생을 모집하며, 졸업하면 취직이 보장된다는 광고가 있었다. 그 때 마침 아버지는 소를 팔아 괴짝 속에 숨겨 놓고 계셨다. 소판 돈을 훔쳐 다시 야반(夜半) 도주(逃走)서울행을 재촉했다. 세 번째 도망이었다. 참으로 지독한 놈이었다.

강원도 통천 산골 촌놈이 새벽에 청량리에 내렸다. 서울은 참으로 컸다. 경리학원을 찾아가 입학했다. 두 달 쯤 되었을 때였다. 또 아버지가 나타났다. 참으로 지독한 아버지였다. 찾는 자와 도망 가는 자, 그 아버지에 그 아들, 그 아들에 그 아버지였다. 서울 가서 성공한 놈이 없다는 아버지의 눈물어린 설득에 그만 헉!하고 울음을 터뜨린 정주영은 다시 고향으로 간다.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말이 있다던가, 정주영은 죽어도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을 또 했다. 멀리 지인을 통하여 약간의 돈을 빌어 친구와 함께 네 번째 가출 길에 올랐다. 청진에 가도 들키고 서울에 가도 들키니, 이번만은 다른 꾀를 냈다. 친구는 서울에 있도록 하고 주영은 인천으로 가서 숨어 부두 노역 생활을 했다. 서울에 올라와 고려대 전신인 보성전문학교 공사장에 가서 날품을 파는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오리엔트제과의 전신인 풍전엿공장에 취직하여 1 년 여 있었다. 돈은 한 푼도 모으지 못하고 맨날 그 타령이었다.

 

지나는 길에 복흥상회(復興商會)라는 쌀집에 취직되었다. 먹고 자고 한 달에 쌀 반 가마의 월급을 주었다. 하는 일은 배달이었다. 집 주인 아들은 부잣집 아들이라 난봉꾼이 되어 돈만 쓰지, 장사에 관심이 없었다. 아들한테 실망한 주인이 아침 저녁으로 가게 앞을 썰고 물까지 뿌려 놓는 근면하고 성실한 청년 정주영에게 쌀가게를 주었다. 하늘의 도우심이었다. 입사 4년만의 일이었다. 경일상회(京一商會)로 이름을 바꾸어 도매상을 차렸다. 그의 나이 스물 두 살이었다.

 

7년만에 고향에 찾아가 아버지에게 논을 사드리고 장가도 들었다. 서울에 와서 아현동에 자동차 수리 공장을 차렸으나 뜻하지 않은 화재로 남의 차까지 몽땅 불에 태어 날거지가 되었다. 공장은 신설동으로 옮겨 3년만에 꽤 돈을 벌었다. 해방 직전에 관의 강제 합병 조치로 공장에서 손을 떼고 고향에서 해방을 맞았다.

 

서울로 올라와 1946년에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세웠다. 자동차 수리업은 토건업에 비하여 수입이 그리 많지 않아 1947년에 공업사 간판 옆에 '현대토건사'라는 간판을 하나를 더 달았다. 왠지 '현대'라는 말이 자꾸만 마음에 들었다. 말의 뜻이 진취적이라 더욱 좋았다. 이렇게 해서 21세기 전야에 지구촌을 웅거(雄據)하는 현대자동차와 현대건설이 태동했다.

 

6.25 전쟁이 터졌다. 대구를 거쳐 부산에 가서 정훈장교를 만나 7천톤 동력선의 민간(民間) 선무대(宣撫隊)가 되어 '괴뢰군은 망한다. 곧 유엔군이 들어온다'는 방송을 하며 남해안 일대를 누볐다. 그 때 동생 인영이 미군 부대 통역이 되었고, 그 인연으로 삽시간에 10만 여 명이 잘 수 있는 임시 막사 공사를 부산에서 하게 된다. 그 뒤에 미군 부대 일이라면 정주영의 것이요 현대건설의 것이었다. 양키들이 정주영과 현대인들을 보면 '현다이 넘버 원'을 외첬다.

 

정주영과 현대건설이 유명해진 것은 1957년의 한강 인도교 공사 때문이었다. 당시 1천환으로 공사에 응찰했던 모 회사는 공사 의사가 없는 것으로 본다는 장관의 말에 따라 2위로 응찰했던 현대에 공사를 주었다. 그 동안 건설 공사를 하다가 적자도 많이 보았으나 이 공사로 상당히 사세(社勢)와 명성(名聲)을 회복할 수 있었다.

 

정주영, 그리고 현대건설의 건설 공사 사업은 계속된다. 4.19가 나고, 5.16이 터졌다. 젊은 군인들이 새로운 각오로 새로운 국토 건설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건설회사로 보면 일감이 많아진 셈이다. 아니 많아질 정도가 아니라 폭주할 정도였고, 어떤 것은 공사가 너무 커서 국내 건설 업자들이나 현대 건설이 먹지 못할 정도였다. 소양강 댐 공사도 바로 그런 공사 중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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