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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 월남파병(越南派兵) 국가부흥의 원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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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태 [cosma] 쪽지 캡슐

2004-11-04 ㅣ No.74055

▣ 한국군 월남파병(越南派兵) ▣

프랑스가 베트남에서 공산주의자들과의 대결에 실패하고 물러나게 되자

미국이 베트남을 떠맡게 되었다. 베트남이 공산화될 경우

도미노 현상을 우려한 미국은 우방국과의 연합군을 구성하여 이에 대응하고자

한국군의 파견을 요청하였으므로 1965년부터 국군의 파월이 시작되었다.

베트남전쟁은 우리 역사상 한국군대가 외국의 영토에서 싸운 최초의 전쟁이었다.

초기에는 공병건설업무를 담당한 비둘기부대와 해병 1개 여단(청룡부대)이,

그뒤를 이어서 1965년과 1966년에는 각각 보병 1개 사단씩(맹호부대와 백마부대)

증파되어 베트남에서 미군 등 연합군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싸움으로써

한국군의 무형의 전력증강에 크게 기여하였다.

국군의 파월과 더불어 非군사분야에서의 부수적인 효과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우리나라의 많은 건설 및 수송업체들이 베트남에 진출하여

많은 경험을 축적함으로써 오늘날의 대기업으로 성장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한국군의 파병은 전쟁이 치열해진 1960년대 중반 미국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미국은 세계의 여론이나 정세, 국내의 반전여론에 부딪쳐

군대의 대규모 파병이 어렵게 되자 우방국가들의 도움을 요청하여

세계의 여론을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이끌면서

미국의 손실을 축소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한국에도 파병을 요청한 것이다.

이에 한국 정부는 6·25전쟁 당시 자유우방의 지원을 상기하면서

미국의 베트남 지원 요구를 외면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



▣ 월남파병 경과 ▣


최초의 한국군의 월남파병은 1964년 9월

제1이동외과병원 병력 130명과 태권도 교관 10명의 파견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브라운 주미대사와 베트남 정부의 지원 요청을 받고,

1965년 1월 26일 국회의 동의를 얻어 1965년 2월 비둘기부대로 명명된

2,000여 명의 후방 군사원조지원단의 파병으로 본격화되었다.

                        
전투부대의 파병은 1965년 7월 2일 결정되어 10월 9일 해병 청룡부대가

월남에 상륙하고, 10월 21일 육군 맹호부대가 베트남에 상륙하여

미국으로부터 전술책임지역을 인수받았다. 이외에도 군수지원부대인

십자성부대, 군수물자수송을 담당한 백구부대 등이 파병되었다.

1966년 미국의 전투부대 추가파병 요청에 의해 국회의 논의를 거쳐

4월 16일 혜산진부대가 증파되었고 8월 15일 백마부대가 베트남에 상륙했다.


한국은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병하여

월남파병 국군은 4만 8,000여 명에 이르렀다.

1968년 5월 미국과 월맹 사이에 휴전협정이 시작되고,

미국과 연합군의 군대철수가 1971년부터 시작된다.

1971년 11월 한국과 베트남 정부는 한국군을

단계적으로 철수하는데 합의하고, 1971년 12월 청룡부대 1만 명의 철수를 필두로

1973년 3월까지 철수를 끝마쳤다.

한국군 파병은 8여년 동안 총 34만여 명이 참전해 많은 전과를 올렸다.



▣ 주월한국군의 활약 ▣


국군파월과 관련된것은 당시 파월교섭의 실무단장을 맡았던

이훈섭씨의 회고록 "당신은 그때 어디 있었는가"에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파월한국군의 지휘권을 미군이 갖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수차례 교섭 끝에 독자적인 지휘권을 갖는 것으로 낙착되었다.

만약 미국, 베트남 군과 협조가 필요한 경우 연락사무소를 두기로 했다.


한국군 파월당시 가장먼저 고려한것은 경제적인 효과와 장병의 안전이었다.

미군은 호치민 통로인 캄보디아 국경지대에 한국군을 배치하고 싶었다.

하지만 한국군은 베트남 경제의 동맥인 1번도로에 인접한 도시들을

주둔지로 선택함으로서 한국 기업인의 보호 및 안전을 담당하였다.

청룡부대는 최초 캄란에 주둔했으나 츄라이 다낭지구로 이동하였으며

맹호부대는 퀴논을 중심으로 하는 푸캇성 일대를 관장하였으며

백마부대는 나트랑을 중심으로 선무작전을 펼쳤다.

이곳들은 중부월남의 경제적인 중심지였다.


한국군은 중대전술기지개념을 적용,

베트남전쟁을 수행하였다.

전술책임구역내 지점에

중대규모의 작전기지를 설치하고

적 1개연대 정도가 공격해 오더라도 3일간 버틸수 있는 탄약과 식량을 비축한 다음,

지속적인 수색정찰로 지역내 안정을 추구하는 전략이다.

중대규모는 상당히 위험하다는 우려가 있었으나

맹호부대가 수행한 둑코전투에서 그 실효성이 입증되어

미군들의 전술교리에도 채용되게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파월한국군은 가장 근대적인 장비와 전투교리를 실전에서 활용하며

실전경험을 축적하고, 전투력이 증강되어 자주국방의 기틀을 쌓았다.

한국군에서 최초로 헬리본 작전을 수행한 것도 파월부대들이었으며

M16소총이 최초로 지급된 부대 역시 파월국군들이었다.

베트콩을 잡던 매복작전의 축적된 경험을 한국의 DMZ에서 적용하여

1969년 이후 DMZ 휴전선에서 북한군의 침투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 월남파병 의의(意義) ▣


한국의 베트남 전쟁 파병은 조약상의 의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고,

자유우방에 대한 신의라는 명분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야당은 파병에 대해 반대했고, 1966년 추가파병시에는

야당뿐만 아니라 여당 및 정부측 일부에서도 강력히 반대했다.


반대의 이유는

맹호·청룡 부대의 파병만으로도

미국이나 자유세계에 대한 신의를 다한 것이며,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전투사단을 빼돌린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군의 전력을 약화시키는 것이고, 세계 여론이 베트남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원하고 있기 때문에 외교에서 한국의 입장이 난처하다는 것 등이었다.

그러므로 더이상의 파병이 있을때는 한국에 뚜렷한 국가이익을

가져올 수 있는 반대급부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정부는 미국측과 수차례의 회담을 거쳐 한국군 전력증강과

경제개발에 소요되는 차관 공여 등 14개항의 사전보장을 받았으나

이후에 국회에서는 이 보장의 효력 등에 대해 많은 시비가 있었다.

논란 속에서도 한국은 월남파병으로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까지 많은 외화를

획득하여 한국 경제발전에 기여했으며, 군사기술 및 군장비 등의 현대화에 기여했다.

또한 미국과 군사적 관계를 증진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 한국군 현대화 ▣


한국군의 월남파병은 정부가 국내외적으로 여러 가지로

어려운 상황에서 결정한 국가의 생존 및 발전전략으로서

한국역사의 큰 획을 긋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한국은 파월로 인하여 공산권은 물론 일부 비동맹 국가와의

관계에서 외교적 손실을 보았고 군사작전과 경계활동에서

5,400여 명의 인명손실을 가져오기도 했으나

군사 , 경제, 외교적으로 많은 긍정적 성과를 얻음으로써

국위를 선양하고 경제발전을 이룩하여 소위 한강의 기적을 이룩하는데 초석을 놓았다.

한국은 전투병력 파병을 통하여 국가안전보장은 물론

한미간의 현안들을 해결 하였을 뿐만 아니라 월남특수를 통한 경제 발전을 도모하였다.

한국은 월남참전을 통하여 껄끄럽던 미국과의 관계를 우호적인 협력관계로

발전시킴으로써, 정치·경제·군사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게 되었다.

한국군의 파병으로 주한미군의 월남이동을 저지하여 국가안보를 튼튼히 하였고,

월남경제 진출 등으로 많은 외화를 획득하여 경제발전을 이룩하였으며,

미국으로부터 많은 군사원조를 받음으로써 국군의 장비 현대화를 달성하였다.



▣ 국가부흥의 원동력 ▣


한국은 월남파병으로 인한 경제활동, 전투수당, 경제원조, 외국으로부터의

차관 등으로 많은 외화를 획득하여 경제발전에 충당하였다.

월남참전으로 인한 경제적 이익은 미국의 경제 및 군사원조, 차관도입,

대미수출 등을 제외하더라도 월남으로부터의 외화수입은

무역과 무역 외 부문을 포함하여 약 9억 달러에 달했는데,

이는 그 어려웠던 한·일 협상을 통해 일본으로부터 청구권이란 명목으로 받아낸 돈이

겨우 6억 달러였던 점을 감안하면 월남파병으로 인한 외화수입은

당시로서는 대단한 금액이었다.


일부 비판론자들은

월남파병으로 국가가 정치·경제·군사적으로 많은 발전을 하였음에도

파병이 경제이익과 전투수당을 전제로 이루어졌으므로 파월 한국군을

용병이라고 비판하였는데 이는 잘못된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으로부터 경제적 도움을 받았고 전투수당을 받기는 하였으나

처음부터 파병목적이 명확하였고 독자적인 지휘권을 행사하였다.

용병이란 말은 군사적 지식이 없는는 識者들의 잘못된 표현이다.


한국군은 월남에서 공산주의와 당당히 맞서 용감히 싸웠으며

이들의 희생의 결과로 국가가 여러 분야에서 발전하였고,

특히 경제가 획기적으로 발전하여 국력이 세계로 뻗어나가게 되었다.

우리는 현대사에서 큰 획을 긋는 월남파병의 意義나 그 결과를

올바르게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파병으로 얻은 경제적 실리를 파병당사자에게 제대로 분배하지 않고

일부 재벌중심의 경제개발을 가속화하였다.

파월기간중 우리나라가 베트남에서 송금한 액수는 총 9억달러에 달했는데

그중 2억달러는 파월한국군의 피의 댓가라고 한다.

이 달러들은 경제개발을 위해 필요한 외화 자금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에서 부상당한 2만여명의 파월용사에 대한 복지와

고엽제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은 오랫동안 잊혀져 왔다.

이 부분에 대해 명확한 해명이 있어야 한다.



▣ 고엽제(Agent Orange) ▣


베트콩 게릴라가 숨어 있는 삼림지역의 나뭇잎을 없애기 위해서

미군은 에이전트 오렌지라는 제초제 혼합물을 살포하였다.

저공 비행 항공기로 뿌렸던 이 고엽제의 화학물질을 실험동물에 노출시키면

유산, 피부병, 선천적 결손 등을 일으킬 확률이 비정상적으로 높아진다.

전쟁에 참전했던 사람들 중 몇몇은 이와 비슷한 장애로 고통을 겪고 있으며,

이들은 이것이 에이전트 오렌지에 노출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주장에 대해 결정적인 증거를 잡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지만,

미군에 에이전트 오렌지를 납품한 7개의 제초제 회사들을 상대로 소송을 하여

1984년 에이전트 오렌지에 대한 노출로 인해 장애를 겪고 있다고 생각되는

미국의 재향군인과 그 가족들은 1억 8,000만 달러에 이르는 보상을 받았다.

제초제 회사 다우코닝사는 베트남 전쟁때 오렌지제 이외에도 방화성이 높은

젤리 모양의 물질 '네이팜' 을 생산했다.

한 보고에 따르면 이 네이팜탄은 민간인과 군인에게 무차별 사용되었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고엽제 후유증을 앓고 있는 베트남 전쟁

참전군인 12명이 정부로부터 전상(戰傷) 판정을 받았다.

국가보훈처는 1993년 1월 15일 국방부로부터 정밀신체검사를

의뢰받은 고엽제 후유증 환자 238명을 검사한 결과

이들 중 12명에게 3~6급의 상이등급 판정을 내렸다.

이들은 보훈병원에서 고엽제 후유증에 대한 무료진단과 함께

매달 최고 56만 4,200원에서 31만 8,200원까지 상이보상금을 받는다.

1993년 3월 1일 고엽제 후유증에 대한 신고 및 진료, 역학조사 등을 규정한

고엽제 후유증 환자 진료에 관한 법률안이 공포되었다.

많은 페트남전 파월용사들이 고엽제 증상을 호소하고 있지만

국가 보훈처에서 이들에게 주는 혜택은 극히 일부에게만

진료 대상의 권한을 부여하고 있어 이들의 원성이 높다.

[자료편집:최진현/vietv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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