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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지를 찾아서13 (미리내:은하수 별빛이 쏟아지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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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례객들을 반갑게 맞이하고 있는 비석, 좌측 뒤로 보이는 건물이 103위 기념성당이고 성전위로 움푹들어간 곳이 오두재이다 -
경기도 안성에서 북쪽으로 40리쯤 떨어져 '은하수'라는 뜻의 아름다운 우리말로 불리고 있는 미리내는 한국 최
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의 묘소와 그의 어머니 고(高) 우르술라, 김 신부에게 사제품을 준 조선 교구 제3대 교구
장 페레올 주교 그리고 김 신부의 시신을 이곳에 안장했던 이민식 빈첸시오의 묘가 나란히 美?構?있는 곳이다.
미리내는 본래 경기도 광주, 시흥, 용인, 양평, 화성, 안성 일대 등 초기 천주교 선교지역을 이루었던 곳의 하나
이다. 따라서 김 신부가 미리내에 묻힌 지 50년 후인 1896년 비로소 본당이 설정됐을 때 이곳에는 이미 1천6백
여 명의 신자가 있었다.
성 김대건의 일생은 짧았다. 26세의 나이에 생을 마친 그는 그러나 '뛰어난 지식, 열렬하고 꾸밈 없는 신앙, 놀
랄 만한 언변'으로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정든 부모 형제와 생이별을 하고 낯선 이국 땅에서 선진 서구 문명에 정진하기 10개 성상. 그 숱한 어려움을 무
릅쓰고 최초의 방인 사제가 되어 이 땅에 돌아온 그는 극히 짧은 사목 활동을 마치고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
다.
당시 김 신부의 처형 소식을 들은 페레올 주교는 그의 빼어난 인품과 재능을 두고 "과연 그에게는 어떤 일이든
지 맡길 만하였고 그의 성품이나 일하는 태도로나 지식 등 어느 모로 보든지 성공을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지금 그를 잃은 것은 무엇으로도 대상(代償)하지 못할 재앙"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심지어 조정에서조차 많은 대신들이 외국 문물에 능하고 박학 다식한 그의 재능을 아쉬워했다고 전한다. 하지
만 굽히지 않는 신앙으로 결국 헌종에 의해 직접 그의 사형이 선고되고 이튿날인 16일엔 떠들썩한 규모로 새남
터에서 처형된다. 김 신부는 형장에서도 추호의 두려움도 없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의 최후의 시각이 다가왔으니 여러분은 나의 말을 잘 들으시오. 내가 외국 사람과 교제한 것은 오직 우리 교
(敎)를 위하고 우리 천주를 위함이었으며 이제 죽는 것도 천주를 위하는 것이니 바야흐로 나를 위해 영원한 생
명이 시작되려 합니다. 여러분도 죽은 후에 영보를 얻으려거든 천주교를 믿으시오."
- 103위 기념성전으로 올라가는 길은 돌로 잘 단장되어 있고 좌측 산기슭에는 14처가 조각되어 있어 순례객들 의 기도를 도와주고 있다 -
마침내 희광이의 칼을 대하고서도 김 신부는 태연하게 "이 모양으로 있으면 칼로 치기 쉽겠느냐?"고 묻고 "자,
준비가 되었으니 쳐라."하고 말했다. 국사범으로 형을 받은 죄수는 통상 사흘 뒤에 연고자가 찾아 가는 것이 관
례였으나 김 신부의 경우 장례마저 막아 참수된 자리에 묻고 파수를 두어 지켰다. 하지만 죽음을 피해 살아 남
은 신자들은 이를 그대로 둘 수 없었고 그들 중 한 사람인 이민식(1829-1921년)은 파수의 눈을 피해 치명한 지
40일이 지난 후 김 신부의 시신을 빼내는 데 성공했다. 그는 시신을 등에 지고 험한 산길을 틈타 1백50리 길을
밤에만 걸어 일 주일이 되는 날 자신의 고향인 미리내에 도착했다.
자신의 선산에 김대건 신부의 묘를 모시고 아침 저녁으로 보살피던 그는 그로부터 7년 후 페레올 주교가 선종
함에 따라 주교의 유언대로 그를 김 신부의 옆자리에 안장했다.
그 무렵 김 신부의 어머니인 고 우르술라도 비극적인 처지에서 숨을 거둔다. 7년 사이로 남편과 아들을 여의고
이집 저집으로 문전 걸식을 하다시피 한 눈물겨운 생애였던 것이다. 이민식은 고 우르술라도 김대건 신부의 묘
옆에 나란히 모셔 생전에 함께 있지 못한 한을 위로한다.
그리고 미리내의 오늘을 있게 한 당사자인 이민식 자신도 92세까지 장수하다가 죽어서 김 신부 곁에 묻혔다.
-1927년에 세워진 김대건신부 기념경당에는 김대건신부를 비롯, 페레올주교, 미리내본당 초대신부였던 강도영신부, 3대 본당신부 였던 최문석신부의 묘가 모셔져 있다 -
미리내는 1883년 공소가 설치됐다가 3년 뒤인 1886년 본당으로 승격됐다. 하지만 본격적인 성역화 작업은 지난
1972년부터 시작됐다. 성모 성심 수도회와 천주 성삼 성직 수도회가 이곳에 자리 잡은 것을 비롯해 주차장 시
설, 김대건 신부 동상, 피정의 집 등이 완공됐다.
1980년 들어서는 경당 옆에 3만 평 규모로 광장을 확장하고 미리내 성당에서 경당까지 길 옆에 14처 조각을 세
웠고 1987년부터 1989년까지 2년에 걸친 공사 끝에 103위 성인 기념 대성전의 웅장한 모습이 드러났다. 경당에
는 현재 모두 여섯 분의 묘소와 함께 김 신부의 하악골(아래턱뼈)을 모셨다. 다른 유해는 가톨릭 대학교 신학
대학(성신 교정) 성당 안에 안치돼 있다.
성당 앞마당에서 보이는 성모상을 지나 조금 올라가다 보면 여기저기 나뒹구는 바위를 자연 그대로 이용해 게
쎄마니 동산을 꾸며 놓았는데 이는 피땀을 흘리며 기도를 바치는 예수, 그와 반대로 잠에 곯아떨어진 제자들의
모습을 실물 크기로 만들어 둔 것이다.
내려오는 길에 오른쪽 등성이로는 수원 교구 성직자 묘원이 자리 잡고 있고 그 위편으로는 18위 무명 순교자들
의 합장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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