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에 생각해야 할 인물
1월의 독립운동가! 농촌계몽을 위한 꺼지지 않는 열정 최용신 선생
선생은 1909년 8월 12일 함남 덕원의 두남리에서 최창희
(崔昌熙)의 2남 3녀 중 차녀로 태어났습니다. 본관은 경주로
12대조가 원산으로 옮겨간 이래 동해 영흥만에 자리 잡은
원산 인근의 덕원에 정착했습니다. 일찍이 기독교가 전래
되고 근대문물이 들어온 이곳에서 선생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설립한 사립학교에 입학하고 마을교회에도 다녔습니다.
어릴 때 앓은 천연두로 생긴 마마자국 때문에 놀림을
많이 받은 선생은 굳건한 신앙생활과 봉사활동으로 이를 극복하였습니다.
선생이 본격적으로 농촌계몽활동을 하기로 한 것은 1928년 원산의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협성여자신학교에 재학하면서 부터였습니다. 조선의 부흥은 농촌에 있고, 민족의 발전은 농민에 있다는 것이 선생의 신념이었습니다.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 총회 때 협성학생기독교청년회 대표로 참가한 선생은 본격적으로 YWCA의 농촌계몽사업에 참가했습니다. 선생은 1929년부터 황해도 수안과 경북 포항 등지에서 봉사활동을 하였는데, 현지 활동을 통해 많은 갈등과 자책감을 느낀 선생은 계몽운동을 위해 학업마저 중단했습니다.
1931년 10월 YWCA 농촌지도원으로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천곡(샘골)에 파견된 선생은 예배당을 빌려 강습소를 개설하고 어린이와 청년,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밤에 공부를 가르치는 한편, 더 좋은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부녀회와 청년회도 조직하여 주민들끼리 믿고 살 수 있는 데도 앞장섰습니다. 처음에 주민들은 선생을 이해하지 못하여 미움과 질투를 하였고,
일본경찰은 끊임없이 감시하며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선생의 노력으로 1932년 5월 강습소는 정식으로
인정을 받았고, 주위의 도움으로 1933년 1월 건물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이즈음 선생은 보다 장기적이고 실천적인 농촌
계몽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1934년 선생은 새로운 지식과 학문을 배우고자 일본에 건너가 3월 고베여자신학교 사회사업학과에 입학하여 뒤늦게 공부를 열심히 하였으나, 갑자기 각기병에 걸려 공부를 중단했습니다. 같은 해 9월 귀국과 동시에 다시 샘골로 돌아온 선생은 1934년부터 YMCA보조금 중단으로 운영난에 빠진 천곡학원을 살리기 위해 여러가지 노력을 기울이던 중 1935년 1월 23일 과로로 쓰러진 선생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쓰러져가는 농촌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신 선생의 눈물겨운 행적은 심훈(沈熏)의 소설 ‘상록수’에서 실재화되어 일제하 농촌운동의 귀감이 되었습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드렸습니다.
- 본문 출처 : 국가보훈처 홈페이지(http://mpva.go.kr)
1월의 호국인물! 휴정 의승장
휴정 의승장은 1520년(중종 15년) 평안도 안주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운학(雲鶴). 자는 현응(玄應). 호는 청허(淸虛). 별호로 백화도인(白華道人) 또는 서산대사(西山大師)가 있으며 법명이 휴정이다. 1534년 지리산에 입산, 숭인(崇人) 문하에서 승려가 되었고 일선(一禪) 등에게 구족계(具足戒 출가한 비구․비구니가 지켜야할 계율)를 받았다. 1552년(명종 7년) 승과에 급제, 중덕․대덕을 거쳐 교종판사, 선종판사를 겸임했으며 보우(普雨)에 이어 봉은사 주지가 되었다. 1589년(선조 22년) 요승 무업(無業)의 무고로 정여립의 역모에 연루되었다 하여 투옥되었으나 곧 풀려났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나라의 위급함을 알리고 구국의 방법을 묻자 73세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전국에 격문을 돌려 각처의 승려들이 구국에 앞장서도록 했으며 자신도 의승 1,500명을 모집, 명나라 군대와 합께 평양을 탈환하는데 결정적 공을 세웠다. 이에 선조가 팔도선교도총섭(八道禪敎都摠攝)이라는 직함을 내렸으나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군직을 제자인 유정(惟政)에게 물려주고 묘향산으로 돌아가 참선에 매진했다. 한양에 돌아온 선조는 ‘국일도 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 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 扶宗樹敎 普濟登階尊者)라는 최고의 존칭과 함께 정2품 당상관 작위를 하사하여 그의 공적을 치하했다. 이후 참선과 후학 양성에 매진하던 중 1604년 1월 묘향산 원적암에서 설법을 마치고 가부좌하여 앉은 채로 입적했다. 그의 나이 85세 법랍 67세였습니다.
휴정은 승군활동으로도 명성을 떨쳤을 뿐만 아니라 양성한 제자만 해도 사명당 유정을 비롯, 1천여 명에 달하는 등 조선시대 불교계를 주도하는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묘향산 안심사(安心寺),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 부도가 서고, 해남 표충사(表忠祠) 등에 배향되었다. 문집으로 『청허당집(淸虛堂集)』『선교석(禪敎釋)』『선교결(禪敎訣)』『운수단(雲水壇)』『삼가귀감(三家龜鑑)』『심법요초(心法要抄)』등이 있습니다.
1월 6일(목 14:00) 전쟁기념관 호국추모실에서는 휴정 의승장과 관련한 유관단체 주요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고인을 추모하는 현양행사가 거행된다.
- 본문 출처 : 전쟁기념관 홈페이지(http://warmemo.co.kr)
1월에 기억해야 될 날
1․4 후퇴
1950년 마지막날인 12월 31일은 일요일이었다. 유난히도 춥고 어둠이 일찍 찾아든 17시경, 서부전선에 배치된 중공군과 북한군은 짧은 공격준비사격과 함께 임진강을 도하해 일제히 공격을 감행했다. 또한 연천에서 피란민(避亂民)을 앞세워 지뢰지대를 개척한 후 압도적으로 우세한 병력을 투입함으로서, 서부전선의 계곡과 능선에는 중공군의 물결이 넘치게 되었다.
약 한시간 정도가 지났을 때 국군과 유엔군 방어진지의 전방은 물론, 후방에서도 중공군의 징소리, 나팔 및 피리소리가 울려 퍼지고, 전후방에서 일제히 수류탄이 날아들었다. 이때 중공군들은 문산 우측의 제1사단과 동두천의 제6사단 등 국군부대를 집중 공격하고 있었다. 제1․6사단은 준비된 진지에서 용전분투했으나, 시간이 갈수록 거세지는 중공군 인해전술(人海戰術)을 감당할 수 없었다.
1.4후퇴시 다리가 파괴되어 결빙된 한강위로 건너는 피난민들
1951년 1월 1일 오전, 전투현장을 시찰한 미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은 국군 제1․6사단의 돌파구가 예상외로 심각하고, 중동부 전선의 국군 제3군단도 집중적인 공격을 받고있어 "적에게 포위될 위험이 크다"라고 판단했다. 결국 장군은 1월 1일 12시경, 전 부대를 한강-양평-홍천선으로 철수하도록 했다. 이어서 1월 3일 오후에는 한강선에서 평택-안성선으로 철수를 명령했다. 이때 장군이 한강선의 결전을 포기한 것은 한강이 결빙되어 장애물로써 가치가 반감되었기 때문이었다.
8군사령관의 철수명령에 따라 1월 4일 오전까지 한강이북의 모든 부대들이 한강에 설치된 임시교량을 이용하여 질서 있게 철수했다. 그리고 13시경 마지막 엄호부대가 철수했다. 이어서 14시경, 8군의 한강 교량통제반이 임시교량을 폭파했다. 그리고 15시경, 중공군이 서울에 입성하였으며, 서울시청에는 인공기(人共旗)가 걸렸다.
한강선에서 철수한 국군과 유엔군은 수원과 오산을 지나 단숨에 37도선까지 후퇴해 1월 6일, 평택-안성의 방어선을 점령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중공군은 보이지 않았다. 8군은 도깨비에 홀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후 국군과 UN군의 반격으로 3월 18일 서울은 재탈환되었다
본문 출처 : 국방저널 ‘이달의 전투사’ 2003. 1월호중 -
이봉창의사 의거(1. 8)
이봉창李奉昌 의사가 단신으로 적도 동경에 가서 일왕거소의 옆문격인 앵전문(櫻田門)에서 마차를 타고 들어가는 소화(昭和)에게 폭탄세례를 가한 것은 우리 나라 독립운동사에 있어 길이 남을 큰 사건이었다. 이 의사는 오로지 우리 민족은 일본에 동화되지 않았거니와 우리 민족은 영원히 자주민이란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목숨을 던졌다. 그것은 동시에 20여 년 전 동양 삼국평화론을 부르짖으며 목숨을 내던졌던 안중근의 의병정신을 다시 한번 과시한 거사이기도 하였다.
이봉창의사
이봉창 의거가 일어난 직후 일본 육전대는 돌연 상해를 침략하였다. 이 사건을 상해사변이라 한다. 이 사변은 이봉창 의거와 결코 무관하지 않았다. 상해사변은 중국국민당 기관지 국민일보가 이봉창 의거를 '한인 이봉창 저격 일황 불행불중' 즉 '불행히도 맞지 않았다'고 대서특필한 직후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 사변은 일본 해군의 소행이었다. 일본 육군이 만주침략을 감행하여 공을 세우자 이에 질세라 일본 해군이 오늘날로 말하면 해병대에 해당하는 육전대를 상해에 상륙시켰던 것이다. 일본 군부내에 육군과 해군의 암투가 벌어졌던 사실은 너무나 유명하다. 육군파는 자기네 활동무대인 중국을 겨냥하여 북진론을 주장하였고 이에 대항하여 해군파는 동남아를 겨냥하여 남진론을 주장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1931~32년의 만주사변과 상해사변은 일본 군부 내의 모순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일본을 패망의 길로 들어서게 만들었던 것이다.
1931년 어느 날, 일본말을 유창하게 쓰는 한 청년이 상해 프랑스 조계에 있는 임시정부 청사를 찾아왔다. 그는 불쑥 이런
말을 했다.
"당신들은 독립운동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인데 어째서 일본 천황을 못 죽이는가요."
일동은 어이가 없어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 사람이 대꾸했다. "일개 문관이나 무관 하나도 죽이기 어려운 형편인데 천황을 어떻게 죽인단 말이오."
그러면서 모두가 이 청년을 혹시 일본 밀정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그러나 김구선생은 이 청년을 유심히 보고 쓸 만한 인물임을 간파하였다. 그는 청년을 여관으로 찾아가서 그의 애국심을 시험해 보기로 하였다. 이 청년이 다름 아닌 이봉창 의사였다. 이 의사는 말했다.
"제 나이가 서른 한 살입니다. 앞으로 서른 한 살 더 살아 봤댔자 지금까지보다 더 나을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늙으니까요. 인생의 목적이 만일 쾌락에 있다면, 지난 31년 동안에 인생의 쾌락이란 것은 어지간히 맛본 셈입니다. 이제부터는 영원한 쾌락을 위해서 독립운동에 몸을 바칠까 합니다."
김구선생은 이 의사에게 1년 안에 폭탄과 자금을 마련해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1년이 지난 어느 날 약속대로 김구선생은 수류탄과 3백 원을 이 의사에게 건네주었다. 3백 원이라면 당시 적지 않은 거금이다. 아무런 조건도 없이 김구선생이 거금을 주는데 대하여 이 의사는 눈물겨웠다. 그가 동경을 향해 떠나던 날 김구선생에게 이렇게 말했다.
"일전에 선생께서 내게 돈 뭉치를 주실 때 나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나를 어떤 놈으로 믿으시고 이렇게 큰돈을 주시나 해서 말입니다. 내가 이 돈을 떼어 먹기로서니 조계 밖으로는 한 발짝도 못 나가시는 선생님이 나를 어찌 하시겠습니까. 나는 평생에 이처럼 신임을 받아 본 일이 없습니다. 이것이 처음이요 마지막일 것입니다. 과연 선생님이 하시는 일은 영웅의 도량이십니다."
이봉창의사 투탄의거지
이봉창의사 투탄의거지
(일본 동경소재 경시청앞)
이 의사는 떠났다. 그리고 1932년 1월 8일 적도(敵都)에서 천황에게 폭탄을 던졌다. 그의 의거는 대륙침략에 나선 일제에게 민족정신을 보여준 무서운 폭탄세례였다.
우리는 조금도 일본에 동화되지 않았다는 증거를 이 의사가 널리 세계를 향해 보여 주었던 것이다.
- 본문 출처 : 알기 쉬운 독립운동사(朴成壽 著)
김상옥의 서울의거(1. 12)
의열투쟁은 3․1운동으로 나타난 민족의 강렬한 독립의지가 일제의 교활한 속임수, 문화정치로 무산되어갈 때 가장 효과적인 항일투쟁이었다. 1923년은 의열투쟁의 절정기였다. 이해 정월 흰눈이 덮인 서울거리에 김상옥(金相玉)의사가 종로서(鐘路署)에 폭탄을 던졌으며 또 연말에는 무정부주의자 박 열(朴烈)의사의 거사가 토오쿄오에서 일어났다.
김상옥 의사는 서울 동대문밖 창신동(昌信洞)사람으로 가난한 기독교 신자였다. 1920년 미국 의원단의 한국 방문을 계기로 총독암살을 계획했다가 실패하고 그 길로 망명하였다. 상해에서 의열단에 가입한 김상옥은 상해 임시정부의 파견원 안홍한(安弘翰) 동지와 농부로 변장하여 입국하였다. 야음을 타고 압록강 철교를 건널 때 한 명의 순찰소 보초 한 명을 때려 뉘여 때마침 역에 정거하고 있던 석탄 화물열차에 몸을 숨겼다. 몇 시간이 지났는지 그들은 석탄더미 속에서 곤히 잠들었다.
김상옥의사의 폭탄 투척지
김상옥의사의 폭탄 투척지
(종로경찰서)
기차가 일산(一山)역에 도착했을 때야 그들은 눈을 떴다.
화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걸어서 서울에 들어왔다.
김 의사는 서울의 여러 동지들과 협의하여 총독사살의
기회를 노렸으나 상해의 일본경찰은 김 의사의 국내
잠입을 탐지하여 재빨리 이 소식을 총독부 경찰에 알려
주었으므로 총독이 밖에 나타날 리 없었다. 1923년 1월
21일 김상옥 의사는 목표물을 종로경찰서로 바꾸어 폭탄을
던졌다. 지금의 신신 백화점 자리에 있던 종로경찰서는
서울의 가장 중심지에 자리잡은 원한의 경찰서였다. 폭탄을 던지고 김 의사는 재빨리 몸을 피해 삼판통(三坂通) 304번지 고봉근(高奉根)의 집에 은신하였다. 고봉근은 그의 매부였다. 닷새 후 이 집에서 총격이 벌어졌으므로 당시의 신문은 이 사건을 심판통 사건이라 불렀다. 심판통은 지금의 원효로 도동(桃洞)이다.
1월 17일 종로경찰서 민완형사 15명이 김상옥 의사의 은신처를 포위하고 쳐들어갔다. 유도 2단을 자랑하는 타무라(田村)라는 일본 형사가 문을 열고 돌격해 들아 가다가 김 의사의 정확한 사격에 쓰러져 죽었다. 김 의사는 방안에 엎드려 이불을 말아서 방탄벽으로 삼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신발을 벗은 채로 뛰쳐나갔는데 형사 세 명이 쓰러졌다.
현장을 탈출한 김 의사는 남산으로 올라갔는데 간밤에 온 눈으로 남산은 은색이었다. 일본 경찰은 서울의 총병력을 동원하여 산을 포위하였다. 그러나 김 의사는 이미 산을 벗어나 왕십리 안장사(安臟寺)라는 작은 절에 가 있었다.
이른 아침이었다. 한 동승(童僧)이 밥을 짓고 있는 것을 보고 솥뚜껑을 열어 보니 아직 밥은 덜 되어 생쌀이었으나 허기진 그는 그대로 먹었다. 그리고 주지住持 김봉암(金峰岩)에게는 승복과 양말 그리고 짚신을 얻어 신고 절을 떠났다. 일경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 김 의사는 짚신을 거꾸로 신고 산을 내려갔다.
김상옥 의사
다음날 그는 효제동 73번지 이태성(李泰晟)씨 집에 숨어
김영진(金永鎭)이란 가명을 썼다. 사흘째 되던 날 새벽 아직도 날이 어두운 새벽 다섯시에 수백 명의 무장 경찰이 집을 포위하였다. 날이 새자 10여 명의 일본 경찰 결사대가 지붕을 타고 안으로 넘어 들어왔다. 그들은 권총을 난사 하면서 항복하라고 고함을 쳤다. 그러나 김 의사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방을 샅샅이 뒤졌으나 그는 보이지 않았다. 단 한곳 벽장이 남아 있었다. 한 일본 경찰 지휘관이 벽장문을 열었다. 이때 총성이 울리고 일본 경찰이 뒤로 나자빠졌다. 김 의사는 책을 방탄벽으로 삼고 마지막 한발을 남겨놓고 쏘았다. 마지막 한 발은 자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힘차게 '대한만세'를 고창하고 숨을 거두었다.
본문 출처 : 알기 쉬운 독립운동사(朴成壽 著)
애국시․어록
야 설(夜雪)
답설야중거(踏雪夜中去)
불수호란행(不須胡亂行)
금일아행적(今日我行蹟)
수작후인정(遂作後人程)
(현대문 풀이)

눈을 밟으며 들길을 갈 때

모름지기 함부로 걷지 마라.

오늘 내가 남긴 발자국(행적)이
오는 사람에게는 이정표가 될 것이니.
1948년 남북협상길에 나선 김수선생이 38선을 넘을 때 자신의 의지와 각오를 자신의 의지와 각오를 다지며 읊은 서산대사의 시입니다. 이후 김구선생님께서 애용을 하셨다고 합니다ㅣ
- 자료출처 : 백범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