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의 동쪽에 사는 사람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면, 우리는 “에덴의 동쪽”에 살고 있습니다. 세상의 처음에 사람과 하느님이 아무런 장애 없이 서로를 직접적으로 느끼면서 살았던 에덴동산의 삶은 하느님을 느끼며 사는 현존적인 삶을 은유합니다. 그러나 역사적인 삶은 에덴동산 동쪽에 에덴의 밖에 있는 삶,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지 못하는 삶으로 경험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고대의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는 책은 환단고기(桓檀古記)와 부도지(符都誌)인데, 신라의 박제상이 기록했다는 부도지에서는 인간이 어떻게 본성을 잃게 되었는지, 어떻게 해야 본성을 찾아 다시 마고성(이상향)으로 복본(複本)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그려져 있습니다.
처음 부도의 시작에서는 땅에서 나는 지유(地乳)를 먹고 살았는데, 음식이 한가지뿐이므로 맛을 추구할 수도 없어 추구해야할 욕망의 대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때의 사람들은 본성만을 가지고 생활을 했으므로 신성을 가지고 있어 하느님의 천지 창조에 동참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지유가 부족해져서 나무의 열매(포도)를 따먹었는데, 지유를 먹지 않아도 살게 된 사람들은 마고성을 나와서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부터 사람들이 성정이 흐려져서 욕망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본성으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이 다시 마고성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마고성의 문은 닫혀져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밖으로 나간 사람들이 지유를 먹기 위해서 마고성 밖에서 땅을 파고 지유의 맥을 찾아서 지유를 먹으려했으나 지유가 밖으로 나오자 곧 썩어서 먹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마고성 안에 있던 지유도 말라버려서 사람들을 더 이상 마고성에서 지유를 먹으며 살 수 없게 되었고, 사람들은 모두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구약성서나 부도지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일이나 마고성 밖에서 살게 된 일은 사람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진 이유를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후에 사람들은 하느님을 만나거나 자기 속에 있는 하느님의 형상(신성)을 찾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거의 모든 종교에서 이 문제를 종교의 본질적인 부분으로 두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느님의 신성 혹은 사람의 본성을 회복할 수 있는가?” 특히 오늘날 우리는 “생산과 소비를 중심으로 조직화된 삶의 방식에 매몰되어서 실재의 표면적 차원에서만 살게 되었고, 유한한 것 속에서 만족을 찾게 되었습니다. 더욱 하느님을 깊은 차원에서 만나는 일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고 깨닫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각 종교에서는 여러 가지 방편을 수련(훈련)하여 하느님께 가까이 가려고 합니다.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중요한 요소 - '마음'
우리 주변에 언제나 어디에나 현존하고 있는 하느님의 실재를 깨닫지 못하게 하는 요인들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성서는 그 원인이 되는 인간의 상태를 표현하기 위한 몇 가지 은유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중요한 하나가 “마음”입니다. 마음은 가장 깊은 차원에서의 자아를 묘사하는 하나의 이미지입니다.
고대 히브리인들에게서나 동양사상에서 마음은 인간의 전체성, 즉 단순한 감정만이 아니라 지성, 의지, 인식 등의 모든 활동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마음은 우리가 느끼고 생각하고 의지하고 보는 것보다 한층 아래에 있는 자아로서 이 모든 것에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이 마음의 상태는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 마음의 상태가 부드러운지 딱딱한지는 중요한 은유입니다. 딱딱한 마음은 완고한 마음, 돌같은 마음, 둔한 마음, 허황된 마음, 닫힌 마음입니다. 즉 닫힌 마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하며 두려워할 줄 모르고, 하느님의 소리와 뜻을 거부하고, 아픔을 나눌 수 있는 여유가 없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하느님의 실재가 더 이상 우리에게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우리의 닫힌 마음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열린 마음, 부드러운 마음, 새로운 마음입니다. 마른 뼈들만이 뒹구는 골짜기에 생명의 기운이 불어와 뼈들은 살로 연결시키는 것과 같습니다(에스겔 37장).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은 열려야 합니다. 그것은 마치 계란이 부화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은 껍질에 둘러싸인 계란과 같은데, 살아 있다면 껍질은 깨어지고 열릴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그 안의 생명은 죽게 되고, 악취가 나게 되며, 독성이 있는 유황으로 변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는 종교는 그 역사에 있어서 상반되는 역할을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마음을 열고 자아의 방향을 바로 잡아가는 과정을 돕는 역할을 했고, 또한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자기의 이해관계를 정당화하는 근원으로써의 역할을 했습니다. 따라서 종교는 마음을 더 두꺼운 껍데기로 덮어버릴 수도 있고, 반면 껍데기로 둘러싸인 마음을 열어 더 넓은 공동체로 나아가게 할 수도 있습니다.
예배, 마음을 여는 의식
마음이 열리는 일은 어떻게 일어납니까? 어떤 사람은 슬픔이나 절망의 경험 때문에 마음이 깨어져서 열리기도 하고, 우연한 종교체험이나 극적인 개종의 경험을 통해서 마음이 열리기도 합니다. 마음이 열리는 일이 나이를 먹은 결과로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지혜가 종종 원로들과 연결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때로는 일정한 종교전통의 제의에 참여한 결과로 열린 마음이 생기기도 합니다.
전통적으로 종교의 제의들은 사람이 하느님을 경험할 수 있도록 중재하고, 하느님께 마음을 열도록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 제의들 중에는 공동체 안에서 행해지고, 그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자연히 참여하게 된다는 의미에서 집단적 성격을 가집니다. 또한 스스로 마음을 열고 성숙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행하는 개인적이고도 의도적인 영적 훈련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집단적인 제의들 중에 하나입니다. 또한 집단적 의식을 전수하는 성례전은 신성한 신비가 사람에게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드는 하나의 의식이었습니다. 즉 성례전은 은총의 수단이며 신성의 중재자입니다.
종교적인 삶 속에는 하느님을 중재하는 많은 길들이 통합되어 있습니다. 종교인들에게는 몸에 밴 의식들이 있는데, 그러한 의식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종교적 삶에 참여하게 됩니다. 습관적으로, 당연히 해야 할 일이 기계적이기 때문에 역동성이 없다고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때때로 그런 제의들은 마음에 심오한 영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개암열매의 비유>
그러한 방식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신성한 이야기(성서는 믿어야 할 어떤 것이 아니라 신성을 중재하는 수단이다),
-제의(세례와 성만찬은 신성한 것에 대한 감각을 창조하는 기능을 한다),
-시간(주일은 예수님과 하느님의 실재를 상기시켜주는 시간이다),
-절기(교회력은 신성한 것을 상기시키고 중재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일년 동안 리듬을 타게 한다),
-소리(옴, 할렐루야, 징소리는 반복됨으로써 마음을 열게 하는 효과를 강화한다),
-음악(찬양을 하거나 들음으로써 공동체에 속하게 되어 마음을 부드럽게 한다),
-말(방언; 궁극적인 실재가 사람을 통하여 말하게 하는 것이다),
-침묵(영을 기다리고 영의 소리를 들음으로써 영과의 연합할 수 있다),
-이미지(성상, 성화, 촛불; 초월적인 실재를 투명하게 봄으로써 현존하는 경험을 하게 한다),
-공간(특정한 공간의 분위기는 신성한 것에 대한 감각을 갖게 한다),
-순례(목적지를 향해 가는 것은 하느님의 현존 안에 있고자 하는 마음의 열망을 표현한다),
-법(하느님의 실재를 항상 상기하도록 도와주고, 하느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간다)
위의 예들은 모두 예배의 요소들입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예배에 참여하기도 하지만, 진지한 참여는 하느님을 향해 마음을 열고 하느님과 만나는 중요한 제의입니다.
각 종교의 제의들 중에서 개신교의 예배는 하느님을 향해 마음을 열 수 있는 매개체들을 상당히 많이 포기했습니다. 개신교 예배는 주로 말과 이야기로 진행되기 때문에 항상 마음을 졸이며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것은 마음을 움직이기보다는 머리에 호소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열린 예배라는 형식으로 일정한 틀을 탈피해서 찬양을 오래 한다든지 성만찬을 자주 시행하는 등의 예배를 드리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의 예배가 우리의 전통악기를 연주하거나 국악찬송을 부르거나 침묵의 기도 순서가 있는 것은 다르지만 그 전체적인 흐름은 비슷합니다. 이러한 모든 예배의 요소들은 하느님을 향해서 마음을 열고 공동체적 경험을 나누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 예배에서 순서를 담당하는 교우들의 기도와 말씀은 너무나 감동적입니다. 삶에서 드러나는 간절한 소망과 깊은 사색에서 우러나오는 기원을 담은 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뭉클하게 움직이기에 충분합니다. 지난 해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교우들의 ‘하늘뜻펴기’는 교우들의 삶과 고민과 관심과 경험을 통해서 하느님 앞에서 언제나 깨어있는 믿음을 보여줍니다. 계속해서 우리의 마음을 더욱 활짝 열고 함께 기뻐하고 슬픔을 함께 나누며 하나가 되는 예배를 만들어 드립시다.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사람을 하느님이 찾으신다
사마리아의 수가라는 마을에 있는 우물가에서 예수님은 한 여인과 대화를 하고 계십니다. 사마리아 사람들과 유대의 사람들은 같은 하느님을 믿고 있으면서 다른 산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장소를 고집합니다.
예수님은 특정한 장소를 고집하는 것을 무시하고 참되게 드리는 예배의 중심을 말씀하십니다. 당시에 예배의 장소를 주장하는 것은 하느님을 독점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한 장소를 신성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장소를 통하여 다른 사람들 위해 하느님으로서 군림하려는 사람들의 욕심이 그 속에 있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그리심산이나 예루살렘이라는 장소에 연연하지 않고, 권력과 욕망에 얽매이지 않고,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사람을 하느님이 찾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는 영이신 하느님을 향해 마음을 열고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예배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을 향해 열린 마음은 당연히 다른 사람,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모든 생명들을 향하여 열린 마음입니다. 하느님을 향해 마음을 열게 하는 예배는 우리의 영성과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