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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사 원통보전 강원유형문화재 제35호

낙산사 홍예문 강원유형문화재 제33호
1466년(세조 12) 왕이 낙산사에 행차하여 사찰을 중수하고 세운 무지개 모양의 석문이며, 1962년 10월에는 팔작지붕의 누각을 세웠다.

아니 이럴수가 있는것인지... 관동팔경의 하나요, 명승고찰 낙산사는 화염속에 하릴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지킬 것 못 지키고 한줌의 재로 날려버리는 불(火)에 대한 불감증 언제 쯤 털어내려나
이맘 때면 항상 우리 마음이 아프다 이러다 고성부터 영덕까지 민둥산 타고 남은 시커먼 흔적만이 을씨년스럽게 다가오지 않을런지
언론에선 사라진 낙산사 특집으로 내 보내나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괴로움
어쩌다가 큰 길 건너 사찰까지 불이 옮겻나? 재앙도 이만한 재앙 다시 있을까?
저렇게 아름다운 풍경 앞으론 볼 수 없고, 저렇게 고즈넉한 풍경 어디가면 만날까 가끔 구경하던 낙조도 멀리 떠나갔으리라.

낙산사 보타전

낙산사 보타락

낙산사 해수관음상

낙산사의 중심법당으로서 현 건물은 1953년에 복구된 것이다

낙산사 담장 강원유형문화재 제34호 황토와 기와로 켜를 이루어 쌓아 올리는 사이에 둥근 점선무늬로 일월성신을 나타내었다

낙산사 칠층석탑
보물 제499호. 조선시대.

백두대간의 힘찬 기운을 받은 설악산이 나지막이 흘러가 동쪽 해안에 머물러 이루어진 오봉산 자락에 자리한 낙산사 신라의 고승 의상(義相)이 창건했다. 중국 당나라의 지엄문하에서 화엄교학을 공부한 의상이 신라로 돌아온 해는 문무왕 10년(670)이었다. 그 후 어느 해 의상은 낙산의 관음굴(觀音窟)을 찾았다. 그는 지심을 기도하여 관음보살을 친견했고, 그리고는 낙산사를 창건했다. 낙산사의 창건 연기설화는 『삼국유사』에 전한다. <낙산이대성(洛山二大聖)>조에 전하는 설화의 내용 예전에 의상법사가 처음 당나라에서 돌아와서 대비진신이 이 해변의 굴 속에 계시기 때문에 낙산이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 대개 서역에 보타낙가산(寶陀洛伽山)이 있는데, 여기서는 소백화(小白華)라고 하고 백의대사의 진신이 머무는 곳이기에 이를 빌려서 이름한 것이다. 의상은 재계한 지 7일 만에 좌구를 물 위에 띄웠는데, 천룡팔부의 시종이 그를 굴 속으로 인도하여 들어가서 참례함에 공중에서 수정염주 한 벌을 주기에 의상은 이를 받아서 물러 나왔다. 동해룡이 또한 여의보주 한 벌을 주기에 의상은 이를 받아서 물러 나왔다. 다시 7일 동안 재계하고서 이에 진용을 뵈고, ...이 자리위의 꼭대기에 대나무가 쌍으로 돋아날 것이니, 그곳에 불전(佛殿)을 짓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듣고 굴에서 나오니 과연 땅에서 대나무가 솟아났다. 이에 금당을 짓고 소상(塑像)을 봉안하니, 그 원만한 모습과 아름다운 자질이 엄연히 하늘에서 난듯했다. 대나무는 다시 없어졌으므로 바로 진신이 거주함을 알았다. 이로 인하여 그 절을 낙산사라 하고서 의상은 그가 받은 구슬을 성전에 모셔두고 떠나갔다.
...자료글....
출처 : 하늘님블로그및 낙산사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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