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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을 사랑함에
꽃이 다 져버렸다고요! 벌써요, 그럴리가... 청구아파트 담장따라 노랗게 앙증맞은 손을 흔들던 개나리는 어디로 가고 파릇파릇 연초록 물결이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에 쏴~아 바다가 되어 넘실거리네요. 개나리는 꽃말이 희망이라지요. 그대의 가슴을 달뜨게 하던 희망은 어디로 갔나요? 자목련도 화사하던 꽃잎을 떨군 채 망연한 얼굴로 서 있는데 마치 속옷까지 홀랑 벗긴 수치심 땜에 얼굴이 달아오른 표정이예요.
불붙은 떨기나무 처럼 생긴 복사꽃이 얼마나 화사한지 보시려면 백련사에 가 봐야할 걸요. 하얀 조팝나무와 산벚꽃이 겹겹이 둘러싼 가운데 붉은 빛 복사꽃이 이글거리는 불꽃이 되어 타오르고 있는 봄의 절정입니다. 선홍색 진달래가 무리지어 만개한 봄날에는 숨도 쉬기 힘들어요.
붉은색이라고 다 같은 줄아시면 오산이지요. 진달래의 선홍색과 복사꽃의 타오르는 붉음과는 엄청난 거리가 있지요. 금방 새순을 내민 노린재 나무의 초록과 이름없는 일년초가 보라빛 꽃잎을 하늘거리는 틈에 언듯 보이는 연두빛 잎 사이에는 하늘과 땅만큼 푸름에도 차이가 커요. 뭇 사람이 오가는 번화가에 서 보세요. 지나는 사람 사람마다 다 얼굴생김이 다르고 돌아가는 가정에서 기다리는 아내가 뎁히고 있는 된장맛도 다른 법이거든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그 다름이 내 것과 견주어 낫고 못하고의 차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겠지요. 나와 견주어 코가 높다든가, 꿈꾸듯 먼 데 산을 쳐다보는 그대의 눈빛이 양순한 것을 왜 알아채지 못하는 걸까요? 서로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신뢰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보는 눈을 길러야 하는 게 아닐까요.
봄볕이 쏟아지는 백련사 앞마당에 다리쉼을 하며 일주일 사이에 변모한 자연의 변화를 실감하고 있었습니다. 쑥쑥 솟아오른 초록의 새싹과 물오른 나무가지들이 더한층 산골짜기를 풍요롭게 변모시켰습니다. 오늘에서야 누추하던 백련사의 푸르딩딩하던 기와 지붕도, 진달래 능선의 구비치던 허리도 넘실대며 말아올라가는 촉록의 기세에 꺽여 흔적도 없더이다. 온통 싱싱하게 뻗쳐올라가는 봄기운에 혼비백산하여 다 도망쳤나봅니다. 은방울꽃처럼 앵두나무 가지에 달려 있던 투명하던 보석도, 금방이라도 팅하며 울릴 것같은 그대의 맑음, 순결함도 사라지고 계곡이건 산허리건 뚝뚝 연초록의 물감이 번져가는데.... 봄이 온다고 지지배배하던 박새는 나무를 건너다니며 지저귀는 데. 이렇게 꽃이 지면 그많던 꽃들은 다 어디로 가나요.
봄은 이렇게 끝임없이 흘러가는 물결처럼 앞서거니 뒷서거니 밀려오는데 홀로 산 그늘이 내려앉아 고적한 백련사 앞마당에서 스님의 낭낭한 염불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또르르~ 목탁 소리가 들려오고 청아한 스님의 염불은 마당을 돌아 푸른 물결에 실려 산으로 올라가고 있네요. 반야심경이면 따라 해볼건데, 나즈막하면서도 힘이 실린 염불을 듣노라면 스님은 법력이 대단한 분인가 봐요. 이따금 스쳐지나가는 봄바람이 풍경을 어르고, 청량한 풍경소리 대웅전 용마루를 타고 온통 푸르게 날개를 키우는 산능선을 향해 가락을 타고 흐르네요. 산에서 내려오는 등산객의 얼굴은 하나 같이 진달래 꽃물이 들어 발그레합니다. 혹시나 술이라도 한잔 걸쳤나 의심한다면 그대의 추측은 틀린게지요. 해맑은 웃음소리와 봄을 기뻐하는 그들의 천진한 얼굴을 보셔야할 텐데. 하산객이 많아지는 늦은 오후, 백련사 앞마당은 조금씩 들뜨기 시작합니다.
가만히 앉아서 봄이 무르익어가는 소리를 즐기듯, 봄비에 매화가 꽃잎을 떨구며 탄식하던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나요? 득음(得音)의 경지. 청자를 사랑하는 선비는 깊은 밤 아끼던 비운무학(飛雲鶴舞)상감청자에 가만히 귀를 대어 본답니다. 청녹의 오묘한 청자 표면에 막 실핏줄마냥 미세한 금이 갈라지는 소리를 듣는다는군요. 천 년을 두고 이어지는 금이 갈라지는 소리. 알 듯 모를 듯 명징하게 울리는 그 소리. 그 소리는 어쩜 청자 안에서 학이 날개짓하는 소리던가 아님 푸른 산 아래에 흐르는 개울물 소리던가. 하나의 세계를 껴안고 살아가는 선비가 경건하게 의관을 차리고 청자가 들려주는 신화에 귀 기울이는 고요한 봄밤, 처마끝엔 매화가 뚝뚝 피빛으로 물든 몸을 떨구고 탄식처럼 봄은 화려한 늘숨과 날숨을 토해내고 있습니다.
깊이 숨을 내쉬고 무념무상의 세계에 젖어들면 귓가를 간지르는 바람소리, 약수터에 내려온 청설모가 사과를 벗겨먹느라 내는 사각사각거리는 소리도 무심치 않습니다. 빼어문 담배가 파르라니 연기되어 내 근심을 싣고서 초록의 산허리를 휘감고 올라가고 있습니다. 멀리 봄볕에 내다논 옥양목 빨래가 새하얗게 배를 말리고 있는가 해서 주섬 자리를 털고 일어나 가보았더니 어설픈 농꾼들이 호미를 들고 푸성귀를 키우는 주말농장이었습니다. 푸성귀를 품안에 키우고 있느라 잔뜩 부푼 배를 내민 비닐하우스가 쏟아지는 햇살에 눈이 부십니다.
어느새 조용하게 '그린 리브스'가 여린 멜로디를 이어가는 에프엠에 귀를 맏기고 봄맞이 산행을 끝내려합니다. 새순이 검은 땅을 헤집고 올라올 때면 백련사에 온통 마음을 빼앗겨 버렸는데 꽃이 피었다가 지고 오늘처럼 흐드러지게 꽃비가 되어 떨어질 때면 내 봄도 거두어들여야겠지요.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모세가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는 떨기나무를 보았다는데 어쩜 이글거리는 복사꽃을 본 게 아닐까고...
산행길에서 돌아온 나를 기다린 것은 내 뜨락, 눈 부시게 봄이 옴을 일러주던 목련이 봄비에 젖어 그 많던 꽃잎을 떨구고 말았네요. 우아할 수록 추락은 더욱 비참했어요. 어느 순결한 영혼을 지닌 분이 떨어진 꽃잎을 거두어 땅 깊이 묻어 주었으면 해요.
부질없는 짓이라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