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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 연중 제17주일(조부모와 노인의 날)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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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여행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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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하 [domini0727] 쪽지 캡슐

2006-06-11 ㅣ No.100694

   

        몽골 그 기구한 역사의 부침(浮沈)이여!


도착 다음날인 6월 2일 아침에 울란바토르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제2차 대전 전승 기념탑인 ‘자이 승전탑’ 앞에 서서 울란바토르 시를 내려다보니 먼 산에 며칠 전에 내렸다는 눈이 희끗희끗하게 보였고 주위에 있는 나무들은 이제 막 연록색의 잎을 틔우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일행이 비행기라는 이름의 타임켑슐을 타고 초여름에서 이른 봄으로 날아온 듯 했다.

 

2차 대전 때 소련군과 함께 몽고인들이 참전했던 승전기념탑을 둘러보고 다시 울란바토르 시내로 돌아가 몽골 국립박물관을 견학하고 박물관장의 영접을 받았다.

통역관을 가운데 둔 박물관장의 대화는 “한국의 전국문화원연합회나 몽골국립박물관이 각 민족의 전통문화의 보존과 계승이라는 공통적인 목표를 가지고 노력하는 기관이기 때문에 더욱 친밀감을 느낀다. 바쁘신 일정에도 특별히 우리일행을 환영해 주기 위해 자리를 마련한데 대해 일행을 대표하여 진심으로 깊은 감사를 드린다”고 하자 우치르 관장은 답사를 통해 “한국과 몽고는 무려 2천년의 역사적 유대를 갖고 있다. 한국에 비해 아직 몽고는 인구가 적고 경제력이 미약하여 지방문화재를 미처 발굴하지 못하고 있으나 한국이 문화재를 잘 보존하여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데 대해 부러움과 또한 경의를 표한다”고 말하면서 “특히 여러분이 서 계신 이 박물관의 1,2층 전시실이 바로 한국의 재정지원과 한국인기술진에 의해 훌륭한 시설을 갖춘데 대해 한국국민인 여러분들께 감사한다”고 말했다.

 

이어서 울란바토르 시내에 있는 한국음식점에서 박물관장과 우리 일행이 점심을 함께 하면서 같은 테이블에 마주앉아 얘기를 나눠보니 우치르 관장은 한국을 이미 6번이나 방문한 적이 있는 역사학자였고 고구려역사연구에 한국의 사학자와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다고 했다.

한국기술진에 의해 지어진 전시관을 관람하면서 몽고역사를 공부했다.

 

몽고에서 신석기시대인 스키타이 문양의 유물이 발굴되고 있는 것을 미루어보아 BC 3세기 이전에는 유럽인들이 몽고대륙에 살았으며 흉노족에 의해 이들이 쫓겨나고, BC 3세기이후 AD 3세기까지 흉노족이 제국을 이루어 요동반도인 산해관에서 흑해에 이르는 대륙을 휩쓸며 세력을 키웠다.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은 것도 실은 바로 이 흉노족의 침입에 대비한 것이었다고 한다.

4세기부터 10세기까지는 오스만 터키제국으로 알려진 돌궐 족이 흉노족을 무찌르고 대륙을 지배하였으며 8세기경에 위구르족이 북부에 제국을 세웠지만 키리키스 족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13세기에 들어와 몽골족인 칭기스칸이 타타르 족을 무찌르고 몽고대륙을 평정한 후에 중앙아시아 전지역과 멀리 페르시아 만까지 진출하였으며 칭기스칸의 손자인 쿠빌라이 칸이 원(元)제국을 세워 고려를 침공하기도 했지만 이후 원나라는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에 의해 몰락하고 만다.

만주족은 몽골족의 숫자를 줄이기 위한 방편으로 일명 티뱃불교 라고도 하는 라마불교를 신봉하게 했으며 각 가정의 아들 중에 한사람은 반드시 승려가 되도록 했고 라마생불인 부부트칸에 의한 신권정치를 행하도록 사주했다.

근세사에 들어오면서부터 청나라가 힘을 쓰지 못하자 몽골은 제정 러시아의 지원을 얻어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였지만 5년 뒤에 帝政러시아가 무너지면서 다시 중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1921년에 수흐바타르 같은 민족지도자가 나서서 볼세비키 혁명군 5천명을 끌어들여 중화혁명 와중에 있는 중국측 세력인 만주족과 한족을 완전히 몰아내고 공산국가 체제인 몽고 인민공화국의 독립을 선포했다.

이후 다시 중국공산당정부의 내정간섭을 받기도 했지만 소련과의 외교로 간신히 주권을 지켰으며 1990년대 들어와 소비에트연방의 붕괴와 동구권에 불어 닥친 민주화 바람을 타고 의회(단원제)정치에 기초한 대통령제 신헌법을 제정 공포하고 국호부터 몽골인민공화국에서 몽골공화국으로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몽골 또한 우리나라처럼 빈번한 외세의 침략에 따른 수난으로 옛 영토가 쪼개져서 몽고족 티벳족 위글 족이 어울려 사는 내몽고지역은 마치 우리네의 고구려영토였던 간도 땅이 연변자치주가 되었듯이 중국의 내몽골자치주가 되어버렸고, 바스칼 그 넓은 호수는 쏘비에트연방(현재의 바스칼공화국 영토)에 주어 버리고 외몽고에 붙은 조그만 호수 하나 겨우 영토로 건진 것을 생각하면 동병상린일까 칭기스칸이 지하에서 목을 놓아 통곡하고 있을 것 같다는 감회에 젖어 몽골 국립박물관을 견학했다.


그날 오후 우리는 울란바토르를 떠나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자연유산으로 지

정된 바 있는 테를지 국립공원으로 향했다.

2차선 아스팔트 도로 변에 드문드문 몽고말로 ‘오보’라고 하는 돌무더기가 쌓여있는 것을 보았는데 계절을 따라 유목민들이 초지를 찾아 길을 떠날 때와 다시 마을로 돌아올 때 오보에 하나씩 돌을 던져 얹으면서 무사여행과 떠난 이들의 무사귀환을 비는 마치 우리나라 오래된 마을 어귀에 서있는 성황당 같은 샤머니즘이 깃든 곳이었다.

테를지 언덕에 올라 멀리 산야를 바라보니 구름 그림자가 초록융단 위에 듬성듬성 무늬를 만들며 깔리는 것 같은 그 아름다운 경치에 모두들 입에서 감탄성이 쏟아졌다.

잠시 테를지에 머물렀다가 기암괴석이 즐비한 바위산을 끼고 몽고말로 ‘영원한 말의 고향’이라는 뜻을 가진 뭉근머리트를 향해 떠난 우리 일행은 무려 4시간을 달려서 숙소인 게르 휴양촌에 여장을 풀었다.

 

6월임에도 초원 위로 불어오는 건조한 바람은 서늘했고 밤에는 게르 안에 비치된 난로에 장작을 태워야만 잠을 이룰 수가 있었다.

정확하게 밤 9시 40분에 해가 지고 밤 11시가 넘어서야 바깥이 어두워졌다.

고원이어서일까 하늘이 너무 가까웠다. 어둠이 깃들자 바로 머리 위에서  파란 별들이 보석처럼 반짝이기 시작했다. 유성이 길게 꼬리를 끌고 지나가는 것도 보였다. 북두칠성, 카시오페아, 작은 고니자리 거문고자리.....여기가 바로 세계 3대 별 관측지라는 말이 헛말이 아니었다.

 

3인이 쓸 수 있도록 게르 안에는 나무침대가 놓여 있었고 가운데 난로가 있어 자작나무 장작을 넣었더니 나무 타는 냄새가 너무 구수하고 좋았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장소를 옮겨가며 우리 일행은 연 3일을 게르에서 지내면서 9인승 봉고차 4대에 나눠 타고 그때부터는 자동차 트랙킹을  하듯이 초원을 향한 강행군이 계속되었다.

어디로 가든지 평평한 잔디밭이어서 찻길이 따로 있을 필요가 없을 듯 한데도 기사들은 모두가 이미 차가 지나다녔던 지정된 길을 벗어나려하지 않으려고 했다. 단단한 땅에 잔디밭이니까 굳이 차가 지나다녀서 기왕에 움푹 페인 길을 브레이크를 밟아가며 힘들게 갈 것이 아니라 잔디밭으로 비켜서 지나가면 아무 일이 없을 텐데도 몽고인 기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것은 혹시나 풀 한포기라도 차바퀴에 의해 다치지 않도록 하기위한 유목민의 후예다운 배려였으리라.  

칭키스칸의 고향마을에 들러 유목민들이 우유를 짜는 일도 해보고 우유로 만든 수태차도 마셔보았다. 양을 직접 잡는 광경을 보고 잡은 양을 그 자리에서 압력솥에 돌을 넣고 찜을 해서 초원의 별빛 아래에서 캠프파이어를 하며 양 갈비찜을 안주로 40도짜리 칭기스칸 보트카에 취하기도 했다.

 

70년을 공산주의 체제하에 살았으면서도 몽골국민들 중에 공산주의를 체험한 사람은 겨우 10%미만이었다 한다. 워낙 넓은 대지에 살다보니 몽고인들의 시력(視力)은 4킬로나 떨어진 거리의 야산의 숲속에서 여우나 늑대가 움직이는 것까지도 판별할 수가 있고, 청력(聽力) 또한 주위에 음향을 흡수하거나 반사할 장애물이 없으므로 8킬로 밖의 자동차소리와 4킬로 밖의 말발굽소리를 판별할 수 있다고 했다.

공산군이나 공산당원들이 오는 낌새만 차리면 전달 전달로 이어져서 그 즉시 가축을 멀리 등 넘어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놓고 겨우 몇 마리 가축만을 보여주면서 이게 전부라고 내 놓았으니 공산주의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말이다.

소와 말 양들은 밤에만 가두어 두고 아침이 오면 저들 스스로 풀밭으로 나가 해가 기울거나 비가 오면 저들끼리 모여서 축사로 돌아온다고 한다. 목동들은 그저 풀밭 근처 그늘에서 쉬기만 하면 될 일이다.

그래서인지 몽고남자들은 힘만 세지 게으르다고 한다. 교육도 남자는 힘만 있으면 무슨 일이든 해서 먹고사는 데 문제가 없으니 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고 여자들은 힘이 약하니 머리를 써야 살 수 있다 하면서 도시에 있는 상급학교에는 주로 여자들만 보낸다고 한다.

그동안 신문이나 잡지에서 보아왔던 것과는 달리 도시의 여자들은 의외로 예뻤다. 여러 세기에 걸쳐 혼혈이 된 탓일까 살색은 우리네보다 오히려 희고 어릴 때부터 고기와 우유 등 낙농제품을 즐겨먹으며 의자생활을 해서 그런지 대부분이 쭉쭉빵빵이었다. 하지만 초원에서 유목생활을 하는 이들은 대부분 화장도 없이 강한 자외선에 피부가 끄슬리고 우유를 짜거나 힘든 일을 해서 그런지 상체가 유난히 커서 몽골에도 우리나라처럼 농촌총각들이 결혼을 하는데 큰 애를먹는 모양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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