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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엽제전우회 태안군지회 창립 행사를 치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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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요하 [jiyoha] 쪽지 캡슐

2006-07-06 ㅣ No.101744

 

       고엽제전우회 태안군지회 창립 행사를 치르고





부대기(部隊旗)들에서 느끼는 반가움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 태안군지회' 창립 행사가 지난 6월 30일 오후 2시 태안군청 대강당에서 거행되었다. 아직 지회가 없는 예산과 청양을 제외한 충남 도내 각 시·군 동네에서 200명이 넘는 고엽제 전우들이 참석해 주었다. 태안에서는 50명 정도가 참석을 했고, 지역의 많은 유지들이 자리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다.

'국민의례'에 이어 '순국선열 및 월남전과 고엽제로 투병 중 유명을 달리한 선·후배 전우들에 대한 묵념'을 할 때는 잠시 동안이나마 삼십 수년 전 베트남 전장에서 보고 겪었던 참상들을 떠올리며 진심으로 기도를 했다. 그리고 고엽제에 의한 갖가지 참상들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이유도….

묵념 다음 '부대기 입장' 순서를 진행하며 나는 이런 멘트를 했다. "이어서 1964년 7월 18일부터 1973년 3월 23일까지 8년 8개월에 걸쳐 용전 분투하며 값비싼 희생으로 세계 만방에 국위를 선양하고, 국가 경제 및 군사·사회 발전에 초석이 되었던 주월 한국군 부대기 입장이 있겠습니다." 그리고 차례로 부대 호명을 했다.


▲ 단상에 도열한 월남 참전 부대기들. 고엽제 전우들은 부대기를 보면서 각별한 반가움과 긍지를 느끼는 것 같았다.
ⓒ 지요하

내 호명에 따라 주월사 부대기, 맹호 부대기, 백마 부대기, 청룡 부대기, 비둘기 부대기, 십자성 부대기, 백구 부대기, 주월사 공군지원단 부대기가 입장을 했고, 마지막으로 고엽제전우회 태안군지회 단체기가 입장을 했다. 참석자들의 힘찬 박수를 받으며 입장한 도합 아홉 개의 부대기들은 경례 의식을 마친 다음 모두 단상에 착기(着旗)가 되었다.

고엽제 전우들은 부대기를 대할 때 조금씩 흥분 상태가 되는 것 같았다. 부대 이름을 들으며 부대기를 보는 데서 각별한 반가움을 느끼는지도 몰랐다. 그들의 힘찬 박수 소리에는 분명 반가움과 함께 젊은 시절의 기백이 담겨 있었다.

행사는 기백환 태안군지회장의 내빈 소개, 양재용 사무장의 경과보고, 지회인증서 및 임명장 수여, 태안군지회기 전수, 표창장 수여 순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기백환 지회장의 대회사, 이병선 충남지부장의 격려사, 진태구 태안군수와 박인복 태안군의회의장과 김창석 홍성보훈지청장의 축사가 있었다.

기백환 태안군지회장은 대회사에서 "8년 8개월 동안 연인원 32만 명이 참전하여 5천여 명의 전사자와 1만 6천여 명의 전상자, 그리고 5만여 명의 고엽제 피해자가 발생한 가운데서도 우리 파월 전우들은 대한민국 국군의 위용을 세계에 알리며 한국인의 기상에 불을 붙였고, 조국 경제 발전의 기초를 놓았다"고 말했다.


▲ 대회사를 하는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 기백환 태안군지회장
ⓒ 지요하

그리고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위정자들은 참전 용사들을 무시하고 고엽제로 죽어 가는 전우들을 돌보지 않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한 한국군의 베트남 전쟁 참전과 관련하여 '대리전쟁', '청부전쟁', '용병', '양민학살' 등등의 용어들을 접하는 현상에 울분을 표하기도 했다.

고엽제전우회에 참여하면서 갖는 마음

나는 고엽제전우회 태안군지회 창립에 참여하면서 한 가지 원칙을 세웠다. 여러 가지 '공동선'을 위한 단체 활동에는 적극 참여하되, 고엽제전우회가 <한겨레21>의 '양민학살' 보도와 관련하여 2000년 6월 27일 한겨레신문사에 난입한 것과 같은 단체 행동에는 절대 동참하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나는 2000년의 한겨레신문사 난입 사건은 매우 잘못된 행동이었다고 생각한다. <한겨레21>의 그런 보도를 참전 용사들의 전체 명예와 결부시키는 태도도 옳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설령 그것이 일정 부분 명예 손상을 가져오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처럼 몰이성적인 단체 행동을 할 필요까지는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군복을 입어 집단 심리가 발동한다 하더라도 중년 이상의 세월을 살고 있는 어른들이 그와 같은 이성을 잃은 집단 행동을 한다는 것은 사실 부끄러운 일이다. 한국군이 힘없는 남의 나라 전쟁터에 머문 8년 8개월 동안 양민 학살로 비쳐질 수도 있는 사건이 전혀 없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참전 용사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한겨레21>의 그 같은 보도에 과민 반응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침묵을 지키거나 부분적으로 인정할 것은 인정하면서 베트남 국민들에게 사죄를 하는 것이 더욱 어른스럽고 참전 용사들의 명예를 크게 세우는 일이다.

'용병'이라는 용어 따위에 대해서도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베트남 전쟁 참전 용사들은 '조국 경제 발전의 기초를 닦았다'는 사실에서 큰 자부심을 가진다. 그것을 무엇보다도 큰 명예로 여긴다. 하지만 그 말은 미국으로부터 얻은 '반대급부'라는 부분과 밀접히 연결된다. 기본적으로 그런 성격을 안고 있기 마련이다. 경제 발전 운운하면서 용병이라는 용어에 과민반응을 하는 것은 자가당착일 수도 있다.

베트남 전쟁에는 여러 가지 시각과 평가들이 혼재되어 있다. 한국군의 참전도 마찬가지이다. 부정적인 시각이나 평가들에 대해 과민반응을 하기보다는 의연하면서도 탄력적인 태도를 갖는 것이 좋다. 한국군의 베트남 전쟁 참전은 많은 희생이 있었지만 경제 발전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현실적인 국가 이익을 가져왔다. 이념 대결 시대였던 당시에는 한국군의 참전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 베트남 전장에서의 모습. 광활한 정글 가운데에 있는 넓은 공터에 지휘본부와 포대를 설치했다. 제초제를 사용하여 만든 공지였다. 거기에서 상의를 벗고 방탄조끼만 입은 몸으로 치누크 헬기가 떨구어준 물품들을 운반하는 일을 했다.
ⓒ 지요하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8년 8개월 동안 우리는 많은 피를 흘렸다. 5천여 명 전사자들의 유족과 1만6천여 명의 전상자들과 그 가족, 그리고 수만 명에 달하는 고엽제 환자들과 그 가족들에게 베트남 전쟁은 아직 현재진행형이지만, 이제는 그 전쟁 후유증을 최소화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전쟁 후유증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보훈(報勳)' 의지를 더욱 적극적으로 발휘하여 보훈 쪽으로도 국가의 품위를 잘 세우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전우애의 참된 실천을 위하여

연령 탓이기도 할 테지만 대체로 보수 성향에 가깝고 그로 말미암아 군사 독재 시절 친정부적인 사람들이 많았던 듯싶은 고엽제전우들도 전두환 노태우 두 군인 출신 전직 대통령들에 대해서는 꽤 혐오감을 갖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전두환씨와 노태우씨가 파월 부대에서 대대장을 지냈던 사람들인데도 대통령 자리에 있을 때 고엽제 전우들에 대해 너무도 무관심했던 사실 때문이다.

그리하여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 홈페이지의 '고엽제란?'이라는 문패를 가진 방에 들어 있는 글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전략) 미국에서는 이처럼 요란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대한민국 제5공화국 정부에서 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철저한 보도통제와 억압으로 (실제로 1984년 <중앙일보>에서 고엽제 문제를 보도하였으나, 제보 기자 해고시키고, 타 언론사에 보도하지 못하도록 통제하였음) 독재 정권 하에 있는 한국에서는 대부분 그런 사실을 모르거나 입이 막혀(후략)"

1980년대 MBC문화방송의 드라마 <수사반장>이 한창 인기를 끌 때 작가로 활동했던 권태하(현 서울 동대문문화원 사무국장)씨는 이런 진술을 하고 있다.

"1985년도 10월경, 중앙 일간지에서 운영하는 모 월간지의 프리랜서로 일할 때 데스크로부터 고엽제 피해자의 참상을 취재해서 써달라는 청탁을 받고 전국을 다니며 '월남참전전우회'를 통해 고엽제 피해자의 참상을 취재한 적이 있었습니다. 외상으로 보이는 후유증, 붓고 진물이 나고 살이 썩고 절단하고, 그뿐 아니라 뼛속까지 침투해서 휘거나 2세에까지 영향을 주는 등 그 참상을 필설로 다하기 힘들 정도였지요.

합천에 있는 원폭 피해자 병원처럼 고엽제 피해자 병원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심혈을 기울여 원고지 140매를 쓰고 수많은 사진까지 곁들이는 등 정성을 다했건만 결국 그 글은 활자화되지 못했습니다. 당시 서슬 퍼런 5공 시절 언론은 당근을 얻어먹으면서 힘없는 작가와의 약속을 저버리고 일간지의 5단 기사로 보도하면서 자료 제공이라는 명목으로 몇 푼 수고비를 주더군요. 그 아픈 기억이 내게 있지만 이제 와서 양심고백을 한들 뭐하겠습니까?"


▲ 비교적 깔끔한 모습으로 천주교 신자 장병들의 교회 활동에 참여한 적도 있었다. 투이호아 성당의 고아원을 방문했을 때의 모습. 예쁜 간호장교의 이름도 이제는 잊었고….
ⓒ 지요하

고엽제 전우들 중에는 단군 이래 최대의 도둑으로 일컬어지는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부정 축재한 돈을 모두 환수하여 우선 고엽제 환자 보상비와 치료비로 사용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도 있다.

또 월남에서 대대장을 지낸 전두환과 노태우는 대통령 시절 권력에 취하고 부정축재에 눈이 멀어 월남 전우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히려 억압했지만, 목숨 걸고 월남 정글을 기었던 우리 이름 없는 전우들은 죽는 날까지 서로 돕고 위로하며 살아야 한다고 목멘 소리로 말하는 이도 있다.

모두 이해가 가고 공감이 가는 말들이다. 고엽제전우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우선적으로 '전우애의 실천'이라는 그 덕목을 위해 기꺼이 시간과 비용을 들이며 노고를 나누는 이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고엽제전우회 태안군지회의 창립을 준비하며 군내 고엽제 환자들을 수소문하고 연락을 취하는 과정에서 안타까운 사실들도 접할 수 있었다. 원북면 반계리와 소원면 송현리에서 살다가 최근 사망한 두 분 얘기를 듣게 되었다. 보훈병원에서 사망을 했음에도 정보에 어두워 유족들이 국가보훈처에 신청을 하지 않은 관계로 장례비를 전혀 지급 받지 못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고엽제전우회 태안군지회 운영을 본격적으로 실시하게 되면 우선 차량을 마련하여 군내의 거동이 불편한 고엽제 환자들을 모두 접촉하면서, 정기적으로 대전보훈병원을 다니며 원활하게 검진과 치료 혜택을 받게 할 생각이다.

나도 고엽제 후유증을 안고 사는 처지이지만(그것이 앞으로 어떤 양상으로 발전할지 알 수 없지만) 현재로서는 비교적 나은 신세이므로 앞으로 봉사의 폭을 더 넓히며 살게 될 것 같다. 내 문학 활동을 더욱 위축시킬 수밖에 없는 그런 생활 조건이 내게 두려움과 슬픔을 안겨주기도 하지만, 그것 역시 하느님이 베푸시는 내 '몫'이라고 생각한다.


2006-07-06 15:25
ⓒ 2006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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