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5일 (목)
(홍)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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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5주간 목요일 ... 독서, 복음서 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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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군 [ahyin70u] 쪽지 캡슐

2021-05-05 ㅣ No.146604

1독서<내 판단으로는,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하느님께 돌아선 이들에게 어려움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5,7-21

그 무렵

7 오랜 논란 끝에 베드로가 일어나 사도들과 원로들에게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다른 민족들도 내 입을 통하여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하느님께서 일찍이 여러분 가운데에서 나를 뽑으신 사실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8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하신 것처럼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시어 그들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9 그리고 그들의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정화하시어, 우리와 그들 사이에 아무런 차별도 두지 않으셨습니다.

10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왜 우리 조상들도 우리도 다 감당할 수 없던 멍에를 형제들의 목에 씌워 하느님을 시험하려는 것입니까?

11 우리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 예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습니다.”

12 그러자 온 회중이 잠잠해졌다. 그리고 바르나바와 바오로가 하느님께서 자기들을 통하여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표징과 이적들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13 그들이 말을 마치자 야고보가 이렇게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내 말을 들어 보십시오.

14 하느님께서 처음에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당신의 이름을 위한 백성을 모으시려고 어떻게 배려하셨는지, 시몬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15 이는 예언자들의 말과도 일치하는데,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6 ‘그 뒤에 나는 돌아와, 무너진 다윗의 초막을 다시 지으리라. 그곳의 허물어진 것들을 다시 지어, 그 초막을 다시 지으리라. 그곳의 허물어진 것들을 다시 지어, 그 초막을 바로 세우리라.

17 그리하여 나머지 다른 사람들도, 내 이름으로 불리는 다른 모든 민족들도 주님을 찾게 되리라. 주님이 이렇게 말하고 이 일들을 실행하니,

18 예로부터 알려진 일들이다.’

19 그러므로 내 판단으로는,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하느님께 돌아선 이들에게 어려움을 주지 말고,

20 다만 그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우상에게 바쳐 더러워진 음식과 불륜과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피를 멀리하라고 해야 합니다.

21 사실 예로부터 각 고을에는,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모세의 율법을 봉독하며 선포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1독서 주해

7

12장에서 사라졌던 베드로가 다시 등장하여 중요한 증언을 한다. 그는 사도들의 으뜸으로서 최종판결을 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선교체험을 이야기함으로써 예루살렘 지도부의 올바른 결정을 유도하기 위해 입을 연다.

들음과 믿음의 연결은 루카 8,11-15에도 나오고 바오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루카는 사도행전에서 일반적으로 복음을 전하다라는 동사를 많이 사용하고 복음이라는 명사는 이곳과 20.24에서만 사용한다. “일찍부터의 직역은 처음 날들로부터인데 10장의 사건을 가리킨다. 베드로는 이방인들의 선교를 하느님이 계획하고 추진하셨으며 자신은 그분의 조수 역할을 했을 뿐임을 증언한다.

 

8

이방인들의 선교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하느님이 베드로를 선택하고 때를 맞춰 이방인들에게 성령을 내리실 수 있는 근거는 그분이 사람의 마음을 꽤뚫어 아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성령에 대한 언급으로 고르넬리오 사건을 직접적으로 상기시킨다.

 

9

하느님은 믿음으로 이방인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여 유다인들과 동등하게 만드셨는데, 베드로는 이 믿음이야말로 하느님이 마음을 정화시키기 위해 사용하신 최선의 방법임을 증언한다.

 

10

베드로의 비난은 적어도 세 가지 의미를 지닌다. 하느님이 이토록 이방인들의 구원을 충실하게 주도하시는데 왜 일부 바라사이파 사람들이 이에 반대하는가? 이들의 도전은 동료 인간들을 거스르는 도전이 아니라 하느님께 맞서는 도전이다. 이들은 결딜 수 없는 율법의 멍에를 이방인들에게 강요하고 있다. 랍비 유다이즘에서 이미 율법의 명령을 지켜내는 일을 멍에라는 상징적 표상으로 표현했다. 이 구절에서 시험하다동사는 하느님의 계획에 저항하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비슷하게 사탄이 예수를 시험하고 반대자들이 예수를 거슬러 시험하며 아나니아와 삽피라가 하느님의 영을 시험한다(사도 5.9).

 

11

직역: “저들과 마찬가지로 구원되기 위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믿습니다.” 베드로의 이 결론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된 믿음이 구원을 가져다준다는 선언이다. 그들 시대에 하느님이 마련하신 이 원칙은 이미 첫 이방인 개종 사건에서 명백하게 드러났으며 유다인들도 결코 이 원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놀라운 것은 구원의 원칙을 밝히는 데 있어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의 순서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방인들에게 적용된 구원의 원칙이 이제 유다인들에 대한 원칙의 기준이 된 것이다.

 

12

베드로의 중재 연설은 논쟁을 간단히 종식시켰고 잠잠해진 회중에게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보고를 들을 기회를 열어주었다. 루카는 언제나 표징과 기적을 하느님의 예언적 영이 작용하고 있다는 표시로 묘사한다. 유다교의 율법을 거치지 않은 이방인의 그리스도교 영입은 이제 여러 가지 사실로 정당화하게 되었다. 현시를 통한 하느님이 차별대우하지 않으신다는 계시. 세례받기 전에 내려온 성령, 믿음으로 하느님이 이방인들을 정화하심, 율법의 실천 불가능함. 이방인들 가운데 일어난 많은 표징과 기적 등.

 

13

루카는 사도행전에서 요한의 형제 야고보와 구별되는 이 야고보를 세 번 등장시킨다. 12.17에서 베드로는 예루살렘을 떠나면서 야고보와 형제들에게전갈을 보낸다. 야고보의 지도자 역할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여기서는 그가 예루살렘 사도회의를 주관하는 대변인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21,18-23에서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서 원로들과 더불어 바오로에게 유당니들 앞에서 취할 행동에 대해 조언한다. 그러나 어느 대목에서도 야고보는 베드로나 바오로와 불목이나 갈등을 일으키는 인물로 묘사되지 않는다. 야고보의 지도자 위치에 대해서는 바오로도 증언한다. 루카가 현재 상황에서 야고보에게 부여한 임무는 두 가지다. 하나는 베드로의 기조연설 다음에 성서적 근거를 덧붙이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회중이 채택할 수 있는 타협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14

처음으로7절의 일찍부터곧 고르넬리오 사건을 가리킨다. “하느님께서 찾아오신다는 그분이 인간 역사안에 개입해 들어오신다는 사실을 간략하게 표현하는 말이다. “이방인들 가운데서 당신 이름을 위한 백성을 얻는다라는 구절은 구세사의 전체적 구도와 관련된다. 우선 백성은 루카에 의하면 거의 언제나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을 지칭한다.

 

15

인용구절은 아모 9.11-12이지만 복수로 예언자들이라 한 것은 12 소예언서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이방인 선교가 성서 말씀과 일치한다는 말은 이 일이 하느님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성서적 증명은 이방인 선교설교의 한 요소다.

 

16

16-18절에 인용된 성서 대목은 히브리 본문이 아니라 칠십인역의 그리스 본문과 거의 일치한다. 히브리 본문은 이 인용문과 오히려 반대의 의미를 보인다. “그 날이 오면 내가 무너진 다윗의 초막을 일으키리라. 틈이 벌어진 성벽을 수축하고 허물어진 터를 다시 세워 옛 모습을 되찾아 두리라. 에돔에 남은 백성뿐 아니라 내 백성이라는 칭호를 받을 모든 민족 위에 군림하게 하리라. 이 일을 이루실 야훼의 말씀이시다실제로 정통 유다인으로 야고보가 성서를 인용했다면 당연히 보편주의적 성격을 띤 그리스 본문의 성서구절보다 국수주의적인 성격을 띤 이 히브리 성서 본문을 끌어들였을 것이다.

 

따라서 이 칠십인역 성서 본문을 여기에 인용한 장본인은 보편주의 신학을 표방한 루카 자신이다. 이 인용문의 내용중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다시 지으려니 그 허물어진 것들을 다시 짓고 그것을 바로 세우리라는 말씀은 결코 다윗 왕국의 물리적 재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부활로써 완성될 예수사건을 가리킨다. 루카에 의하면 예수 사건은 이방인들로 하여금 하느님을 찾게 만들 것이다.

 

19

야고보의 맺음말은 의장으로서의 결정을 공식적으로 밝히는 장엄한 어투다. “그러므로곧 베드로가 이야기한 하느님의 분명한 중재를 전해들었고 율법에서 해방된 이 이방인 선교가 예언자들의 말에 부합한 까닭에, 이방인들이 하느님을 찾겠다고 나선다면 율법으로 그것을 방해해서는 안된다.

 

20

야고보는 절충안을 제시한다. 우선 유다인들은 할례와 율법의 수많은 시행세칙들. 곧 명령과 금령 조항들을 새로 교회의 문을 두드리는 이방인들에게 요구하지 말아야 하며, 그 대신 이방인들은 유다인들이 혐오하는 몇 가지 사항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 이방인들은 우상에게 바치쳐진 고기를 먹지 말고 가나안의 풍산신 숭배에서 드러나듯 우상숭배와 직결된 온갖 음행을 멀리해야 하며 마지막으로 목졸라 죽인 짐승과 피는 같은 의미를 지닌다. 모든 피조물의 생명은 피 안에 있고 생명을 상징하는 피는 먼저 하느님께 바쳐져야 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생명체의 피를 마시지 못하도록 금했다. 따라서 아직 몸에 피가 담겨있는 목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를 먹어서는 안된다.

 

21

야고보는 이 규범들이 오래되고 널리 통용되어 왔으며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전통에 기초를 두고 있음을 밝힌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자주 들르는 이방인이라면 개종자들과 외국인 체류자들을 염두에 둔 율법은 규범들에 이미 친숙해 있을 것이다. 예루살렘 사도회의는 그들에게 친숙해 있을 것이다.

 

예루살렘 사도회의는 그들에게 과중한 멍에가 될 할례를 비롯한 율법의 시행세칙들을 적용시키지 않는 대신 이미 들어 이해했을 최소한의 규범들을 지키도록 요구한다. 그럼 이 규범들을 지켜야 할 이유는 구원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유다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형제애를 실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유다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형제애를 실천하기 위한 것이다. 앞절에서도 누차 밝혔듯이 구원을 위해 필요한 조건은 믿음이지 율법의 준수가 아니다.

 

 

 

 

복음<너희 기쁨이 충만하도록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9-11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10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11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복음서 주해

9

예수는 자기 자신이 아버지에게 받은 그 사랑으로 제자들을 선택하고 받아들였다는 뜻이다.

예수에게 받은 사랑의 삶을 살아 예수의 뜻을 실천하라는 뜻이다. , 제자들은 참으로 예수의 제자임을 드러내 보이고 증언함으로써 예수의 사랑 안에 머문다.

 

10

예수의 사랑은 아버지의 사랑에 근거하고, 예수가 아버지의 계명들을 지킨 것은 동시에 제자들도 그렇게 할 수 있게 하는 동기가 된다는 뜻이다.

 

11

이 말을은 예수의 비유말을 가리키고 이제 그 비유말이 끝났음을 시사한다.

 

#. 이 대목은 포도나무와 가지들 비유말과 사랑의 계명인데 예수 안에 머물러야 결실을 맺게 된다는 내용으로서 포도나무와 가지들 비유말과 사랑의 계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두 부분은 10절에 언급된 계명들12절에서 사랑의 계명으로 설명됨으로써 서로 연결된다. 이 비유말은 수수께끼 같은 비유라는 목자와 양들 비유와 비교될 수 있으나 순수한 비유나 우화는 아니다. 의미를 전달하는 표상 또는 은유와 비유와 예수의 말이 서로 얽혀 있다. 그래서 비유말이라고 별칭한다.

 

이 비유 말에서는 머물다열매를 맺는다란 표현이 기조를 이루고 있다. 예수 안에 머물라는 경고는 제자들과의 예수의 이별 상황을 시사한다. 제자들의 청을 들어주겠다는 약속. 사랑하는 것과 계명을 지키는 것에 관한 결속관계. 사랑의 계명등은 앞서 살펴본 예수의 고별담화에서 이미 언급된 내용이다. 따라서 내용적으로는 고별담화와 맥락이 같다. 일반적으로 15-16장을 추가된 2차 고별담화라고 칭하고, 17장도 그 맥락에 추가된 것으로 여긴다. 이에 비해 12.31-14.311차 고별담화라 한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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