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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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7주간 화요일 ... 독서, 복음서 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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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군 [ahyin70u] 쪽지 캡슐

2021-05-17 ㅣ No.146899

1독서<나는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를 다 마칩니다.>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20,17-27

그 무렵

17 바오로는 밀레토스에서 에페소로 사람을 보내어 그 교회의 원로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18 그들이 자기에게 오자 바오로가 말하였다.

여러분은 내가 아시아에 발을 들여놓은 첫날부터 여러분과 함께 그 모든 시간을 어떻게 지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19 나는 유다인들의 음모로 여러 시련을 겪고 눈물을 흘리며 아주 겸손히 주님을 섬겼습니다.

20 그리고 유익한 것이면 무엇 하나 빼놓지 않고 회중 앞에서 또 개인 집에서 여러분에게 알려 주고 가르쳤습니다.

21 나는 유다인들과 그리스인들에게, 회개하여 하느님께 돌아오고 우리 주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증언하였습니다.

 

22 그런데 이제 나는 성령께 사로잡혀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나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나는 모릅니다.

23 다만 투옥과 환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성령께서 내가 가는 고을에서마다 일러 주셨습니다.

24 그러나 내가 달릴 길을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 곧 하느님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야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25 이제, 내가 두루 돌아다니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한 여러분 가운데에서 아무도 다시는 내 얼굴을 볼 수 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압니다.

26 그래서 여러분 가운데 그 누구의 멸망에 대해서도 나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것을,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엄숙히 선언합니다.

27 네가 하느님의 모든 뜻을 무엇 하나 빼놓지 않고 여러분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1독서 주해(해제.역주 정태현 신부님)

17

루카는 지역교회에 처음부터 원로제도가 있었다고 추정한다. “불러모으다는 뒤따르는 설교가 장엄한 성격을 띠고 있음을 시사하기 위한 것이다.

 

18

22까지 이어지는 설교의 첫 대목은 바오로가 에페소에서 이제까지 한 일을 상기시킨다. 여기서 아시아는 16절에서처럼 에페소를 뜻한다. 에페소의 원로들은 바오로에 의해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첫 번째 사람들이며 처음부터 바오로와 함께 지낸 사람들이다.

 

19

겸손과 눈물과 유다인들의 박해는 바오로의 생애를 특징짓는다. 눈물의 주제는 31절에, 박해의 주제는 22절 이하에 다시 나온다.

 

20

유익한 것은 구원에 필요한 것을 말한다.

 

21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을 동시에 언급하는 일화가 13-19장 사이에 자주 나온다. 이것은 바오로 자신의 편지에서도 강조되는 요소다. 21절의 내용은 이방인들과 유다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그리스도교의 복음선포를 최대한 짧게 요약한 것이다. 비슷한 요약이 1데살1.9-10에도 나온다. 하느님을 향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은 그리스도교 구원관의 핵심이다.

 

22

설교의 둘째 부분이 여기서 시작하여 24절에서 끝나는데 바오로의 현재 상황을 다룬다. “묶인다는 표현은 바오로의 생애를 묘사하기에 불가피한 낱말이다. 바오로는 제자들을 묶어 예루살렘으로 넘기려고 다마스쿠스로 가다가 오히려 부활하신 예수에게 사로잡혔고, 여기서는 그가 성령에 묶여 예루살렘에 인도된다. 또한 바오로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묶이게 될 것이다. “예루살렘에 간다는 바오로의 선언은 예수의 수난 예고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바오로 는 스승 예수와 달리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루카복음에서처럼 이 대목과 관련하여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23

사슬은 감옥에 갇히는 것을 뜻한다. 사슬의 언급은 23.29; 26.29.31에 다시 나올 것이다. 감옥을 뜻하는 사슬에 대한 바오로 자신의 언급. 바오로는 앞에서 자신이 세운 교회들이 많은 환난을 거쳐서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야 합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환난의 주제도 바오로 자신의 편지에 자주 등장한다.

 

24

여정의 직역은 달릴 길. 곧 운동장의 경주로다. 윤리적 노력을 체육과 비교하는 수법은 그리스-로마 사회의 윤리적 가르침 안에서 널리 통용되었다. 루카도 세례자 요한에 대한 언급에서 이 단어를 사용한 바 있다. 바오로 자신도 서간에서 같은 표상을 사용한다. 여기서 말한는 봉사직은 재정 문제와 관련된 것일 수도 있고 하느님의 은총에 대해 증언하는 직책을 가리킬 수도 있다. 또는 모금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을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순종으로 보는 2고린9.13에 비추어 이 두 개념이 합쳐진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25

서방 사본군에 속한 몇몇 사본은 나라예수의” “주 예수의또는 하느님의를 덧붙인다. 그러나 루카는 1.6에서처럼 아무런 수식이 없는 나라를 루카복음의 사도행전 전체의 일관된 주제인 하느님의 나라와 동일시 한다. “내 얼굴을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라는 표현은 고별연설이나 최후증언에서 흔히 쓰던 말이다.

 

26

이제부터 어떤 사람이 잘못되어 간다 하더라도 그 책임은 바오로의 것이 아니다. 바오로는 자기의 의무를 충실히 다 완수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피에 대한 결백

 

27

하느님의 모든 뜻은 루카가 중요시하는 구세사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 전체를 가리킨다. 이 구절에서 20절의 내용이 반복되는데, 바오로의 설교 내용이 교회의 가르침과 일치함을 시사하는 동시에 30절 이하의 잘못된 가르침에 대한 비판을 준비한다.

 

 

 

 

복음<아버지,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7,1-11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1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말씀하셨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

2 아버지께서는 아들이 아버지께서 주신 모든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도록 아들에게 모든 사람에 대한 권한을 주셨습니다.

3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4 아버지께서 저에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수하여, 저는 땅에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였습니다. 5 아버지, 세상이 생기기 전에 제가 아버지 앞에서 누리던 그 영광으로, 이제 다시 아버지 앞에서 저를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

 

6 아버지께서 세사에서 뽑으시어 저에게 주신 이 사람들에게 저는 아버지으 이름을 드러냈습니다. 이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이었는데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켰습니다.

7 이제 이들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모든 것이 아버지에게서 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8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말씀을 제가 이들에게 주고, 이들은 또 그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제가 아버지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참으로 알고,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9 저는 이들을 위하여 빕니다.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을 위하여 빕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10 저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고 아버지의 것은 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통하여 제가 영광스럽게 되었습니다.

11 저는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지만 이들은 세상에 있습니다. 저는 아버지께 갑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복음서 주해(해제.역주 이영헌 신부님)

1

예수가 고별담화를 마쳤다는 것을 가리킨다. 예수의 기도가 제자들과의 작별 때 이루어진 것으로 말하려는 의도가 반영된다. 예수는 이제 기도하는 모습으로 제자들과 작별하게 된다.

하늘은 하느님의 초월적 공간을 상징한다. 예수는 바로 그 하늘에 속하고 결속된 것으로 보도되기도 한다. 따라서 예수는 하느님을 향해 모든 시선을 쏟았다고 이해할 수 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름으로써 예수는 하느님과의 유일무이한 내적 결속관계와 하느님께 온전히 신뢰하는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준다. 따라서 이 존칭은 파견된 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느님과의 독특한 관계를 시사한다.

 

지상활동을 마치고 아버지께로 가는 시간즉 수난과 영광의 시간이 왔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다만 아버지께 기도하기 위한 동기로서 언급된다.

 

아버지와 아들의 상호교환적 영광이 언급된다. 아들은 십자가상 죽음 안에서 아버지로부터 부여된 임무를 최종적으로 수행하고 아버지는 십자가를 통해 아들을 당신 자신에게 들어올린다. 아들은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했으니, 아버지도 이제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달라고 청한다. 아들 자신을 위한 이 요청은 바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기 위한 것으로서 그 목적이 언급된다. 이 목적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생명을 줌으로써 이루어진다. 예수가 자신의 영광을 위해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은 곧 사람들에게 구원의 생명을 계속 주시도록 요청하는 것이다.

 

2

원문에는 모든 육체(육신)”, 셈족 계통의 표현으로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

문맥상 일종의 설명문구로서 영광스럽게 하기 위함입니다와의 관련을 배제할 수 없다. “권능을 주셨습니다. (권능)에 따라 ...”또는 “...영원한 생명을 주게 하시려고 ...권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라고 의역할 수 있다. 이 구절은 신학적 쟁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아므튼 예수의 이 권능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느르 지니고 있는 그런 권능보다는 오히려 파견 때 부여된 권능과 더 관계가 깊다.

 

여기서는 아들이 영광스럽게 됨으로써 얻게 되는 그런 권능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 영광스럽게 된 아들로서 가지는 그런 권능의 관점이 더 지배적이다. 위 본문에서는 다만 직역했을 따름이다. “모든 사람을 (다스릴)권능은 보편적 권능을 가리킨다. 생명을 주는 권능과 심판하는 권능을 뜻한다.

 

아들의 보편적 권능이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있는구원의 능력으로 강조된다. 그렇다고 심판의 권능이 배제된 것은 아니다. 원문에는 모든 이가 중성으로 표현되어 있어 개체의 전체성을 강조하고 구원받는 자들이 오히려 모든 이안에 속함을 시사한다. 따라서 아들의 권능이 제한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강조된 구원권능과 더불어 보편적 의미가 내포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들은 예정론적 의미가 아니라 선택적 의미가 강하다. 예수의 기도 가운데 특별히 그런 표현으로 언급된 것은 아마도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신학사상이 반영된 듯하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존하고 하느님의 은총으로 인해 구원을 얻는다는 생각이 반영된 것이다.

 

3

영원한 생명이 어디 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삽입된 일종의 주해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구원 개념이 예수의 기도 가운데 더 이상 언급되지 않고 오히려 영광이란 표현으로 대치된다. 기 구절은 없어도 문맥상 하자가 없고, “예수 그리스도란 칭호도 예수의 기도 맥락에 적합지 않으며 오히려 문체상 상충된다. “오직 한 분, 참된 하느님이란 표현도 하느님께 대한 신앙고백으로서 선교용어라 할 수 있다.

 

하느님을 안다란 표현은 원래 구약성서적 개념으로서 하느님과 친교를 나눈다는 것을 가리키는데, 특히 유다 헬레니즘 문헌에서는 구원적 의미로 사용되었고 요한 1서에서도 하느님과의 공동체를 가리키는 표현으로서 많이 언급된다. 아무튼 삽입된 주해에 따르면 사람은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통해 또는 하느님과 함께하는 공동체로 이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 요한 교회의 근본적 신학사상으로서 당시 공동체를 격려하는 의도가 지배적이다.

 

4

2절에 지결된다. 아들은 아버지께서 맡겨주신 일을 지상에서 수행하고 완성함으로써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했으니 이제 아버지께서 그런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달라는 뜻이다. “땅에서는 아버지 곁에서 영광을 누릴 하늘과 대조되는 표현이다.

 

5

아버지 곁에서 아들이 누렸던 원래의 영광대로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달라는 뜻이다. 물론 이 요청은 믿는자 모두가 그 영광에 참여토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제라는 표현은 아들이 아버지께로 가는 시간 곧 아버지로부터 와서 다시 아버지께로 가는 아들 예수의 길의 전환점을 가리키다. “세상이 있기 전은 아들의 선재를 가리키면서 동시에 아버지 하느님의 계시자로서 세상을 능가하는 아들의 실존도 시사한다. 아들이 영광 가운데 아버지께 돌아감으로써 주님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시자로 생명을 주는 자로서 임무를 완성했다는 것을 뜻한다.

 

6

예수와 함께하는 제자들을 구체적으로 가리킨다. 예수의 말을 받아들이고 믿는 이들의 공동체도 동시에 시사한다.

하느님의 본질과 특성 곧 아버지로 표현될 수 있는 일체의 모든 것을 가리킨다.

일종의 계시 용어로서 예수가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써 아버지 하느님을 계시했다는 뜻이다.

 

제자들의 특성이 언급된다. 그들은 하느님이 세상에서 선택하신 사람들이요, 예수로부터 들은 계시 말씀을 지킨 자들이라는 것이다. 이 특성이 아들 예수가 아버지께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이유로 제시된다. 예수가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근본 관심과 이유는 그들이 바로 아버지의 사람들이요, 또한 아버지께서 그들을 아들에게 주셨다는 데 있다.

 

7

제자들의 깊은 믿음을 강조한다. “알았다란 말은 이제란 표현과 함께 제자들의 성숙한 믿음, 곧 믿음의 완성된 단계를 시사한다.

 

8

제자들이 어떻게 그런 성숙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제자들이 받아들인 예수의 말들은 하느님으로무터 유래하므로 그들은 예수가 하느님으로부터 왔음을 참으로 알게 되었고, 또한 하느님이 예수를 파견하셨음을 믿게 되었다는 뜻이다. 제자들의 믿음이 재차 강조된 것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그들을 돌보시도록 예수가 기도한 이유와 동기를 말해주는 데 의미가 있다.

 

9

예수의 말과 행동으로 계시된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한 세상은 자기들을 위해 예수의 가구를 요청할 수 없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것은 세상이 진리의 영을 받을 능력이 없다는 말과 맥락을 같이한다. 믿지 않는 세상은 스스로 하느님의 영역에서 제외된 것이다.

 

믿지 않는 세상과 대조되어 제자들의 신원과 품위가 강조된다. 그들은 하느님께 속한 자로서 세상에서 하느님을 드러내 보이는 표지다.

 

10

아버지와 아들의 일치된 공동소유를 뜻하는 말로서 제자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제자들이 예수의 말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예수는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스럽게 되었다는 뜻이다. 예수는 지상에서 활동함으로써 아버지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했고, 제자들 또한 예수로부터 받은 사명을 수행함으로써 그런 예수를 드러낸다. 따라서 아버지께서 이제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시기 위해 그런 제자들을 보호해 달라는 예수의 청이 함축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11

예수가 제자들을 위해 하느님께 간구하는 동기가 시사된다. 즉 세상에 외롭게 남을 제자들의 실존을 걱정하는 예수의 마음이 하느님께 대한 기도로 표명된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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