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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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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9주일 2006년 8월 13일 요한 6, 41-51 1열왕 19, 4-8.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요한복음서 공동체가 성찬에 대해 명상하는 바를 기록으로 남긴 것입니다. 요한복음서는 먼저 예수님이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이야기 한 다음, 성찬에 대한 오늘의 명상을 예수님의 입을 빌려 우리에게 말합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여 하느님에게 가신 후, 신앙인들 앞에 남은 것은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하신 말씀과 행위들에 대한 기억과 그들이 이미 행하고 있던 성찬이었습니다. 그들은 모여서 성찬을 거행하면서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기억을 더듬어 되살려내고 그것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들이 살아야 하는 새로운 삶과 새로운 질서를 발견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와 함께 광야를 헤맬 때, 하느님이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셨다.”(출애 16,4)는 고사에서 가져온 표현입니다. 우리는 오늘 제1독서에서 호렙 산으로 향하는 엘리야 예언자를 하느님이 먹이셨다는 열왕기 상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먹이신다는 또 하나의 고사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이 베푸신 만나를 먹고, 힘을 얻어 자유의 땅을 찾아 갈 수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하느님이 베푸신 음식을 먹고 힘을 얻어 호렙 산에 이르러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는 오늘 복음의 말씀은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의 몸이라 불리는 빵, 곧 성찬으로 힘을 얻어 새로운 삶과 새로운 질서를 산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 유대인들은 수군거렸다고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우리가 알고 있지 않는가?’라고 말하며, 그들은 그 말씀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습니다. 복음은 예수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못마땅함이 그분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예수님이 요셉의 아들이라는 사실에만 머물지 않고,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듣고 배우는 사람이 발견할 수 있는 예수님의 참 모습이고, 새로운 삶이며 질서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 안에 하느님의 일을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성찬을 중심으로 모여서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기억하고, 그것을 실천한 사람들이 새로운 삶과 새로운 질서를 만났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삶과 질서였습니다.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신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다.’는 오늘 복음의 말씀들이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삶과 질서를 발견하고 실천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를 중심으로 한 삶과 질서에서는 우리 자신만 보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삶과 질서에서는 하느님의 생명이 보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다른 생명들이 보입니다. 그 삶에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질서가 있습니다. 그 질서를 요한복음서는 사랑이라고 지적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그대들을 사랑했습니다. 내 사랑 안에 머무시오...서로 사랑하시오”(15,9.17).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하느님의 생명을 산다는 뜻입니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고도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성찬에 참여하면서 그분이 보여주신 실천을 하는 사람은 죽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산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죽지 않고 사는 것, 곧 장생불사(長生不死)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느님 아버지의 생명을 실천하며 살다 돌아가시고 부활하셔서 하느님 안에 영원히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믿고 있는 신앙공동체가 하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생명을 실천한 삶은, 예수님과 같이, 현세를 넘어서도 하느님 안에 영원히 산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이 중심이 된 세계에서 살고자 합니다. 우리 자신을 보호하고 우리 자신의 위상을 높이려 합니다. 나 자신을 중심으로 사람들을 봅니다. 그래서 내 자식, 내 부모, 내 형제자매들을 소중히 생각합니다. 나와 특별한 인연으로 연결되지 않은 사람은 내가 사랑해야 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들은 나의 길을 방해하고 내 욕심의 행로를 가로막는 장애물에 불과합니다.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을 우리는 백안시하고, 싫어합니다. 흔히는 신앙생활도 나와 내가 아끼는 사람들이 잘 되기 위한 수단이라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것은 하느님까지 이용하겠다는 우리의 이기주의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십자가, 그리고 예수님을 기억하여 우리가 행하는 성찬은 우리 자신을 중심으로 한 삶을 벗어나, 하느님을 우리 삶의 중심으로 삼으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의 나라라는 주제도 하느님을 중심으로 살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읽고 성찬에 참여하면서도, 우리 자신만이 잘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 신앙인이 아닙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루가 6,27)는 말씀이 있습니다. 미운 사람도 사랑하여 자기를 위한 공적을 쌓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느님으로 발생한 질서에는 어느 누구도 그 사랑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지극히 작은 내 형제 가운데 하나에게 해 주었을 때마다 그것은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흐르는 곳에는 우리 눈에 작은 사람도 예수님과 같이 소중히 보입니다. 우리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삶에는 주변에 죽음이 발생합니다. 대자연도 죽고 우리의 이웃도 죽습니다. 우리 모두가 우리 편리대로 살다 보니 오늘 대자연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물고기가 살지 못하는 강, 새들이 살지 못하는 하늘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바빠서 이웃을 바라볼 여유도 없는 우리의 마음에 이웃은 오래 전에 이미 지워졌습니다. 잘 있는 이웃을 찾아다녀서 귀찮게 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알게 된 질서에는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외롭고 가난한 이웃들에게 우리의 사랑이 흐른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이 성찬에서 빵을 예수님의 살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분의 삶이 보여 준 그 사랑을 우리의 실천 안에도 흐르게 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내가 발산하는 것이 생명을 위한 것인지 생명이 억압당하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랑이 흐르면 우리의 동작도 그것으로 채색될 것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행보에 있어야 하는 사랑입니다. 부족한 그대로, 못난 그대로 우리는 사랑하며 하느님에게로 갑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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