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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5주간 금요일] 하느님의 그리스도 (루카9,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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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21-09-24 ㅣ No.149943

 

2021년 9월 24일 금요일

[연중 제25주간 금요일하느님의 그리스도 (루카9,18-22)

 

   

 

1독서<머지않아 내가 이 집을 영광으로 가득 채우리라.>(하까1,15-2,9)

15 다리우스 임금 제이년이었다.

2,1 그해 일곱째 달 스무하룻날에 주님의 말씀이 하까이 예언자를 통하여 내렸다.

2 “너는 스알티엘의 아들 즈루빠벨 유다 총독과 여호차닥의 아들 예수아 대사제와 나머지 백성에게 말하여라.

3 ‘너희 가운데 이 집의 옛 영화를 본 사람들이 남아 있지 않느냐지금은 이 집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너희 눈에도 있으나마나 하지 않느냐?

그러나 즈루빠벨아이제 용기를 내어라주님의 말씀이다여호차닥의 아들 예수아 대사제야용기를 내어라이 땅의 모든 백성아용기를 내어라주님의 말씀이다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니 일을 하여라만군의 주님의 말씀이다.

너희가 이집트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맺은 언약대로 나의 영이 너희 가운데에 머무를 터이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마라.

6 - 정녕 만군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 머지않아 나는 다시 하늘과 땅바다와 뭍을 뒤흔들리라.

내가 모든 민족들을 뒤흔들리니 모든 민족들의 보화가 이리 들어오리라그리하여 내가 이 집을 영광으로 가득 채우리라.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은도 나의 것금도 나의 것이다만군의 주님의 말씀이다.

이 집의 새 영광이 이전의 영광보다 더 크리라.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내가 이곳에 평화를 주리라만군의 주님의 말씀이다.’”

 

화답송 시편 43(42),1.2.3.4(◎ 5ㄷㄹ 참조)

◎ 하느님께 바라라나의 구원나의 하느님을 나는 찬송하리라.

○ 하느님제 권리를 찾아 주소서불충한 백성에게 맞서제 소송을 이끌어 주소서거짓되고 불의한 자에게서저를 구해 주소서

○ 당신은 저의 하느님저의 피신처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어찌하여 제가 원수의 핍박 속에슬피 울며 걸어가야 하나이까

○ 당신의 빛과 진리를 보내시어저를 인도하게 하소서당신의 거룩한 산당신의 거처로 데려가게 하소서

○ 저는 하느님의 제단으로 나아가오리다제 기쁨과 즐거움이신 하느님께 나아가오리다하느님저의 하느님비파 타며 당신을 찬송하오리다

 

복음<예수님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카9,18-22)

18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도 함께 있었는데그분께서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19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

20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1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셨다.

22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

 

 

 

 연중 제25주간 금요일 제1독서 (하까이1,15ㄴ-2,9) 

 

"너희가 이집트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맺은 언약대로, 나의 영이 너희 가운데에 머무를 터이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마라."  (5)

 

하느님께서는 과거에 언약하신 말씀대로 그의 영이 그들 가운데 머물게 하실 것임을 나타낸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그 백성과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하실 뿐만 아니라, 과거 그 조상들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에 그들에게 하신 언약의 말씀대로 주님의 영으로 하여금 여전히 그들 가운데 머물러 있다는 말씀까지 하신다.

 

'나의 영이 너희 가운데에 머무를 터이니'에 해당하는 '웨루히 오메데트 뻬토케겜' (weruhi omedeth bethokekem; and my Spirit remains among you)인데, 이렇게 하느님 자신과 그의 영('나의 영';웨루히 ; weruhi ;and my Spirit)까지 그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들은 두렵다고 겁낼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한마디로 완벽한 보호 가운데 성전 건축에 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머무를 터이니'에 해당하는 단어 '오메데트'(omedeth)의 원형 '아마드'(amad)는 어떤 한 장소에 서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창세18,22; 24,30).

 

본문에서는 능동태 분사형으로 사용되어 주님의 영이 이스라엘 가운데 지속적으로 서 있는 상태를 강조한다.

이것은 그들이 하느님께서 간택하신 계약의 백성이라는 의미이며, 그들이 주님의 영의 도우심을 통해 성전 건축을 성공리에 완수하게 될 것을 보증한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이 처한 형편이나 주변 환경으로 인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본문에서 '너희는 두려워하지 마라'에 해당하는 어구 '알 티라우' (al thyrau; do not fear)는 현재 당면하고 있는 두려움을 즉각적으로 물리치라는 의미를 지닌다.

하느님의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 환경이나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 것처럼 크게 방해되는 것도 없다. 그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느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믿는 것밖에는 없다.

 

 

"은도 나의 것, 금도 나의 것이다. 만군의 주님의 말씀이다." (8)

 

 

본문은 기본적으로 시편 50장 10절과 11절의 내용과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숲속의 모든 동물이며 수천 산들의 짐승이 내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산의 새들을 모두 안다.  들에서 움직이는 생물들도 내게 속한 것들이다." (시편50,11-12)

 

당시 포로 생활을 하다가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삶이 넉넉치 않음으로 인해서 새 성전을 은과 금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지 못함을 아쉬워했는데, 이것을 하느님께서 위로하시는 말씀이라고 볼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보화를 다 소유하신 분으로서, 성전에 은이나 금이 소요되거나 장식되지 않았음에 전혀 상관하지 않으시는 분임을 나타낸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하까이서 2장 8절은 '모든 민족들의 보화가 이리(성전으로) 들어오리라'고 예언하는 하까이서 2장 7절의 진술을 논리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구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세상에 흩어져 있는 모든 은과 금 등의 보화가 다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 모든 것들을 당신께서 원하시는 곳으로 이끌어 들이실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이교(이방) 민족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느님의 은밀한 섭리에 따라 그들은 그 보화들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곳으로 가져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본문에서 '은도'에 해당하는 '학케쎄프'(hakkesep; the silver)와  '금도'에 해당하는 '핫자하브'(hazzahab; the gold) 모두 단수형으로 표기되어 있고, 정관사와 더불어 사용되어 있다.

이러한 표현은 어떠한 특정한 은과 금을 염두에 둔 것이라기 보다는 이 세상에 속한 모든 은과 금을 한가지로 포괄하기 위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집의 새 영광이 이전의 영광보다 더 크리라. ~ 내가 이곳에 평화를 주리라."   (8-9)

 

 

당시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에는 너무나도 보잘것없어 보이는 이 성전에 대한 하느님의 궁극적인 평가이다. 그것은 당시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너무나도 다른 평가였다.

여기서 하느님께서는 이 성전의 새 영광이 이전의 영광보다 더 크리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서 '이전의 영광'에 해당하는 '하리숀'(harishon; the former) 문자적으로 '첫번째의'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과거 솔로몬이 맨 처음 건축했던 첫번째 성전에서 나타났던 영광을 의미한다.

사실상 솔로몬이 지은 성전은 그 재료나 비용만도 지금의 화폐단위로 계산해 보아도 천문학적인 계산이 나올 만큼 엄청났다(1역대29,2-7).

또한 솔로몬은 성전 건축을 위해 레바논에서 아름드리 향백나무를 수없이 많이 수로로 운송해왔다.

 

이처럼 매우 값비싼 재료들로 만들어졌던 솔로몬 성전의 영광은 너무나도 대단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어려운 여건 가운데 지금 건축되고 있는 제2성전은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

그러나 만군의 주님꼐서는 제2성전의 영광('새 영광')이 첫번째 성전의 영광('이전의 영광')보다 더 크다고 선언하신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제2성전의 영광을 '지금 영광'이 아닌 '새 영광' 혹은 '나중의 영광'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이에 해당하는 '케보드 ~ 하아하론'(kebod ~haaharon; the glory of (this) latter)은 문자적으로 '맨 마지막의 영광'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일차적으로는 제2성전이 완공된 이후에 나타날 영광을 가리킨다.

 

그러나 구원사적으로는 성전의 진정한 실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날 영광을 상징하고 예표한다. 따라서 그 영광이 이전의 영광보다 클 것은 자명하다.

과거 솔로몬의 성전은 하느님 임재의 상징적 처소로서만 존재했으나, 새롭게 지어질 제2성전에는 하늘과 하늘 위의 하늘도 감히 모실 수 없는(1열왕8,27) 하느님이신 제2위 성자, 그리스도께서 직접 임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을 아는 포로 귀환민들은 과거의 영광과 대조되는 외적 초라함으로 인해 슬피 울 것이 아니라 장차 하느님께서 임하실 그 영광을 고대하고 희망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이곳에 평화를 주리라'

 

 

하느님께서는 바로 지금 짓고 있는 제2성전에 특별한 평화를 베푸실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평화'에 해당하는 '샬롬'(shallom)은 부족함이 전혀 없는 온전하고 충만한 상태를 의미하는 어원에서 유래한 단어이며, 여기서는 하느님께로부터 내려오는 평화와 만족을 의미한다.

 

하느님께서 그러한 평화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은 곧 성전을 당신께서 기뻐하신다는 의미를 함축한다.따라서 그의 기쁨이 그곳에 있으며, 그의 보호하심이 그곳에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곳에 오는 자들은 하느님의 평화를 직접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예언은 성전의 실체되시고 주인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체를 통해,그를 중심으로 새롭게 세워진 성전인 그리스도의 교회 가운데서 완전하게 이루어지게 된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요한14,27).

 

예수님께서 이러한 약속을 하실 수 있는 것은 당신 자신이 평화의 근원이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워진 교회는 그 안에 머무는 자들에게 참된 평화, 곧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은 누구도 앗아갈 수 없는 구원의 평화를 누리게 하는 것이다.


 


 

 [연중 제25주간 금요일]

하느님의 그리스도

(루카9,18-22)

18ㄱ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도 함께 있었는데,

= 제자들도 함께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혼자기도 하셨다?-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예수님 만이 기도 다운 기도, 곧 하느님의 뜻을 위한 올바른 기도를 하셨다는 것이고~~

두 번째 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 그 아버지의 일 만을 예수께서 하셨고, 그 아버지의 말씀 만을 가르쳐 주셨다는 것, 그것이 기도라는 것이다.

 

18ㄴ그분께서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19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 20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을 마귀도 알고 믿는 사실이다.(루가8,28참조)

 

21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셨다.

= ‘그리스도’의 정리~ 먼저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오신 분이 그리스도 예수님(요한1,14)이시다.

 

(요한1,12) 12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로마10,17) 17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에페1,4.7) 4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풍성한 은총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 그리스도의 대속, 그 피(죽음)로 우리가 하느님 앞에 흠 없는 사람이 되는 것, (도덕과 윤리의 그 인간의 거룩은 흠도 티도 없는 완전한 구원의 힘, 권위가 없는 것)

 

(로마5,6) 6 우리가 아직 나약하던 시절, *그리스도께서는 정해진 때에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로마10,4) 4 사실 *그리스도는 율법의 끝이십니다. 믿는 이는 누구나 의로움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 율법을 그리스도 당신의 죽음으로 완성하셔서 죄인들이 하늘의 의로운 존재가 된 것이다.

 

(2코린5,21) 21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


(로마12,5) 5 그래서 우리도 수가 많지만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을 이루면서 서로서로 지체가 됩니다.


(1코린1,24) 24 또한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콜로2,3) 3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물이 숨겨져 있습니다.


(콜로3,3) 3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 세례 때,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것이다,

 

(히브10,9-12. 22) 그리고~ 9 그다음에는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 것(새 계약)을 세우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첫 번째 것(율법)을 치우신 것입니다. 10 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11 모든 사제는 날마다 서서 같은 제물을 거듭 바치며 직무를 수행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결코 죄를 없애지 못합니다. 12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한 번 제물을 바치시고 나서, 영구히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22ㄴ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 악에 물든 양심을 벗고 깨끗해졌으며, 우리의 몸은 맑은 물로 말끔히 씻겨졌습니다.

= 위와 같이 그리스도와 하나 됨의 하느님의 약속, 그 말씀을 모르고 믿는다면 마귀의 믿음이 되는 것, 그래서 20절에서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그것을(그렇게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 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 당신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신 것이다.

 

22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

= 사람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죗값, 그 속죄 제물로 십자가에서 반드시 죽으셔야 했다. 그것이 하느님의 구원의 뜻이기에~~~

*그런데 많은 이들이 그 예수님의 십자가가 주는 용서, 자유, 그 쉼의 신앙이 아닌 스스로 자신의 십자가에 묶이는 곧 자기 의로움으로 구원에 이르겠다고~ 십자가의 의로움, 곧 예수님의 죽음을 헛되게 하는 헛된 신앙을 살아가고 있다.

다시~ 구원은 우리의 행위, 그 의로움이 아닌 그리스도의 대속, 그 십자가의 의로움을 입어 얻는 것이다.(로마3,21-25참조)

 

(1요한4,10) 10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아멘.

 

 



 

 연중 제25주간 금요일 복음(루카9,18~22)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0)

 

루카 복음 9장 18절부터 21절까지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베드로의 최초의 신앙 고백이 기록되어 있다.

마태오 복음 16장 13~20절과 마르코 복음 8장 27~30절과 병행을 이루는 이 사건은 예수님의 제3차 갈릴래아 활동의 후반부를 새롭게 여는 역할을 한다.

 

제3차 갈릴래아 활동의 후반부의 특징은 앞에서의 활동의 주요 대상이 다수의 군중들이었다면, 이제 소수의 제자들에게로 옮겨간다는 점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수난을 약 1년 정도 남겨 놓은 시점에서 제자들의 훈련에 보다 큰 관심을 기울이셨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혼자 기도하였고, 후에 제자들이 기도를 끝내신 예수님과  함께 합류하게 되었을 때에, 중요한 질문을 제자들에게 던지신다.

루카 복음 9장 18절에서 '군중'에 해당하는 '호이 오클로이'(hoi ochloi; the people; the crowds), 즉 '무리들'이 예수님을 누구라고 하는지를 제자들에게 물으신다.

 

이 질문의 의도는 그 답변의 형태로 보아 지금까지 당신의 능력을 지켜보아 온 사람들의 칭송을 듣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무리들의 고백과 제자들의 고백을 확실히 구분시키고자 한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에 해당하는 '휘메이스 데 티나 메 레게테 에이나이'(hymeis de tina me legete einai; who do you say I am?')에서 '그러면'으로 번역된 '데'(de; but)라는 접속사와 '너희'를 의미하는 '휘메이스' (hymeis)를 문장의 맨 앞에 위치시킨 것에 주목을 해야 한다.

말하자면, '이제 내가 중요한 것을 묻겠다. 그렇다면 바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질문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던지시는 질문이다.

 

루카 복음 9장 19절의 '어떤 이들'에 해당하는 '알로이'(alloi; some; others) 수군거림과 구분되는 제자들 자신의 진실된 신앙 고백을 이끌어 내려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베드로는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하고 대답한다.

병행구절인 마태오 복음 16장 16절이 가장 자세하게 원형에 가깝고, 마르코 복음 8장 29절은 주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특히 강조했다.

 

반면에 루카 복음 9장 20절의 '톤 크리스톤 투 테우'(Ton Christon tu theu; The Christ of God)에서 희랍어의 속격 형태인 '투 테우'(tu theu;'하느님의')는 다양한 형태로 해석될 수 있고, 한글의 문법 형태에는 없는 것으로, 라틴어 문법에서 독립적으로 취급하는 제5격에 해당하는 '탈격'(the Ablative)의 의미로서 '~로 부터' 또는 '~로 말미암은'이라는 뜻을 가진다.

따라서 '하느님의 그리스도'라는 표현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크리스톤'(Christon)의 원형 '크리스토스'(Christos) '기름을 붓다'를 뜻하는 '크리오'(chrio)라는 동사에서 명사의 형태로 굳어진 단어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나타내므로 그 뜻이 더욱 분명해진다.

또한 '크리스토스'(christos), 곧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명칭은  유대 전통에서는 임금, 예언자, 사제를 가리키지만, 이 문맥에서는 특히 위임받은 임금(왕)을 가리키는 의미가 강하다.

 

이런 사실은 이 단어가 70인역(LXX)에서 '톤 크리스톤 퀴리우'(ton christon Kyriu) 라는 표현으로 임금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2사무1,14).

그리고 당시 메시야 사상에 있어서도 메시야는 예언자인 동시에 사제라는  사실을 거부하지 않지만, 특히 다윗 왕국의 영화를 재건하는 임금의 이미지로 부각되었다.

 

여기서는 예수님께 온 세상의 통치권을 위임받은 왕적 권위에 대한 절대적 타당성을 부여하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오늘을 사는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하신다. 베드로, 바오로, 마리아, 데레사 등등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신다.

 

우리 믿는 자들도 루카 복음 9장 19절에 나오듯이 다른 사람들의 신앙 증거라는 간접적 지식만을 가졌지, 정작 자신 안에는 아무런 신앙 고백이 없는 경우가 있다.

또한 루카 복음 9장 19절의 군중들의 반응에서 대단한 인물들이 죽음을 물리치고 다시 살아났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이전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들은 신앙 증거보다 더 크고 충격적인 무언가를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예수님께서는 루카 복음 9장 20절의 질문을 통해 제자들의 이러한 의존적 신앙을 올바르게 붙잡아 주시려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스스로의 입으로 신앙 고백을 함으로써, 그들 스스로 신앙을 세울 수 있는 단계에 이르기를 원하신 것이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은 '역사의 예수님을 믿음의 그리스도, 생명의 주님,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나는 누구인가?' 하는 그리스도인의 신원과 정체 의식을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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