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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신앙의 성조(聖祖)..순교자성월에 드리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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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호 [park05] 쪽지 캡슐

2006-09-05 ㅣ No.104017

 

우리 신앙의 성조(聖祖) 


  9월 순교자 성월을 맞이하여 알아두어야 할 우리 신앙이 들어오게 된 배경과, 선조들의 가계(家系)가 어떻게 이루어져왔고, 그분들의 신분과 또 그분들이 어떻게 신앙을 증거 하였는가를 알아보고자한다.


■ 조선 초기 천주교가 들어오게 된 배경

 

1. 초기 신앙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친 인물들

   

● 판토하(D. Pantoja, 龐迪我, 1571∼1618)신부

- 칠극대전(七克大全)을 저술한 판토하(D. Pantoja, 龐迪我, 1571∼1618) 신부는 스페인 출신으로 예수회신부이며, 중국(북경)에서 선교활동 시에 궁중악사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기도 했고 중국어 문장에도 능한 선교사였다.


- 칠극대전은 죄악의 근원이 되는 일곱 가지 뿌리와 이를 극복하는 일곱 가지 덕행(德行)을 다룬 일종의 수덕서(修德書)이다.


- 1614년에 중국 북경에서 7권으로 간행된 이래 여러 권판을 거듭하였고, 천학초함(天學初函) 총서에도 수록되었으며, 이를 상·하 2권으로 요약하여 칠극진훈(七克眞訓)이라는 책명으로도 간행되었다.


- 판토하 신부는 천주교의 칠죄종을 동양의 칠극에 맞춰, 유교의 나라인 중국에 일곱 가지의 죄의 근원을 비교 제공하였다. 일곱 가지의 죄의 근원을 살펴보면! 


1). 교오(驕傲) : 라틴어  superbia 

남을 무시하거나 업신여기는 마음의 태도와 행동으로 허세를 부리는 것.


2). 간린(慳吝) : 라틴어  avaritia 

재물을 지나치게 탐하고 아끼며 재물 모으기에 급급, 지나치게 인색한 태도.


3). 미색(迷色) : 라틴어  luxuria 

비정상적이고 불규칙적인 성행위. 간음, 간통, 강간, 혼전 성행위 등이 해당.


4). 분노(憤怒) : 라틴어  ira 

몹시 화를 내어 이성을 잃는 상태. 투쟁, 복수, 폭행 등을 유발한다.


5). 탐도(貪) : 라틴어  gula 

먹고 마시는 일을 지나치게 하며 음식과 재물을 탐(貪)하는 것을 말한다.


6). 질투(嫉妬) : 라틴어  invidia 

이웃사랑에 대한 배반죄. 이기심과 냉혹에서 빚어지는 슬픔이 죄악이다.


7). 나태(懶怠)

게으르고 성실하지 못함. 태타(怠惰). 해타(懈惰) 라고도 하며, 이와 같이 칠죄종(칠극)을 죄원(罪源)이라고도 한다. (모두 대죄에 해당, 고해성사의 근본) 



● 마태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1552-1610)신부

- 동방견문록을 저술한 마태오 리치 신부는 1601년-10년까지 북경에서 판토하 신부의 보좌신부로서 전교활동과 저술활동을 하였다.


- 칠극대전은 마태오 리치 신부의 천주실의(天主實義)와 함께 일찍부터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연구되었고, 남인학자(南人學者)들을 천주교에 귀의케 하는데 기여한 책 중의 하나이다.


● 이익(李瀷, 1681∼1763)

- 이익은 그의 저서 성호사설(星湖僿設)에서 이 책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는 곧 유학의 극기설(克己設)과 한가지라고 전제한 다음, 죄악의 뿌리가 되는 탐욕, 오만, 음탕, 나태, 질투, 분노 색과 더불어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덕행으로 은혜, 겸손, 절제, 정절, 근면, 관용, 인내의 일곱 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 이익선생이 분석한 칠극 중에는 절목(節目)이 많고 처리의 순서가 정연하며 비유가 적절하여 간혹 유학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점도 있는 만큼, 이는 극기복례(克己復禮)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는 것이 있다고 말함으로써 천주교와 유교사이에 윤리 면에서 어느 정도 일치할 뿐 아니라, 때로는 천주교가 우월함을 은연중에 시인하였다.


● 남인 학자들

- 한편 칠극은 1777년부터 1779년간, 천진암·주어사(天眞庵 ·走魚寺) 강학에서 남인학자들에 의해 연구 검토되었다. 남인학자들에 의해 한글로 번역되어지고 많은 사람에게 읽혀져 강화시켰음을 짐작 할 수 있고, 한글필사본이 절두산 순교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2. 초기 신앙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인물들


● 남인학자 정재원 집안 내력

- 정씨집안은 9대 옥당(玉堂, 홍문관)으로 대단한 집안이다. 선조(先祖)중에 한 사람만 옥당에 들어가도  “옥당 집”이라는 아름다운 칭호를 얻기 마련인데 연달아 9대가 옥당의 벼슬을 지냈으니 대단한 집안이라 아니할 수 없다.


- 12대 할아버지인 정자급(丁子伋)이란 분이 조선왕조 초기에 벼슬하여 옥당에 들어가, 이후 5대조 정시윤(丁時潤)과 그의 아우에 이르기까지  옥당벼슬을 지내서 9대 옥당집안이라 불린다.  다산 정약용도 홍문관 교리를 지내 옥당벼슬을 하였으니 대단한 가문(家門)이라 할 수 있다. 

 

● 聖 정하상(바오로)집안의 가계도(家系圖)

 - 정재원은  첫째 부인 의령 남씨와의 사이에 첫째 아들 정약현을 낳았고, 정약현의 처남이 초기 천주교 전파에 큰 영향을 끼친 광암(廣菴)이벽이다.


- 정약현의 딸이 황사영에게 시집을 갔으니 황사영은 정약현의 사위가 된다.

황사영은 중국에 올릴 백서를 쓰고 밀고에 의해 붙잡힌 후 처형당한다.


- 정재원은 둘째 부인 해남 윤씨 사이에 세 아들과 딸을 두었으니 딸은 조선 최초의 영세자인 이승훈(베드로)에게 시집을 갔다.


- 둘째 아들 자산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를 가 자산어보(玆山魚譜)를 저술하여 후세에 귀한 자료를 남겼고(자산어보는 전해지지 않음),


- 셋째 아들 선암 정약종(아오스딩)은 신유박해(辛酉迫害)때 임금을 독재자, 악마로 표현하며 맏아들 정철상(가를로)과 함께 우리의 신앙을 증거 하다 순교(殉敎)하였다.


- 선암 정약종(아오스딩)의 둘째 아들 聖 정하상(바오로)와, 부인 聖 유소사(세실리아), 딸 聖 정정혜(엘리사벳)은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순교하였으며,


- 다산 정약용은 넷째 아들로서 전남 강진으로 유배를 가 목민심서 외 500 여종의 책을 저술하였다.


- 고산 윤선도의 6대손인 윤지충(바오로)은 다산 정약용의 외종 6촌 형이며 25세에 진사에 급제하여 채제공의 신망이 두터웠다.


- 윤지충은 호남지방 진산(지금의 금산)출신으로 고종사촌인 권상연(야고보)과 함께 1791년 모친상 때 진산사건으로 알려진, 부모의 위패(位牌)를 불태웠다하여  조선 최초의 순교자(殉敎者)가 되었다.


- 분주폐제(焚主廢祭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움)로 말미암아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은 진산에서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어지고, 전라감사의 문초에 최초로 하느님을 증거 한 공식적인 호교론(護敎論)이었다.


- 선암 정약종(아오스딩)의 둘째 아들인 聖 정하상(바오로)는 천주교 최초의 호교론서인 “상재상서”로써 박해자들에게 천주교의 입장을 밝히고, 박해를 그치도록 문서로 힘 있게 주장하였다.


- 聖 정하상(바오로)는 한국 교회 최초의 평신도회장이며 성인의 노력으로 신부(모방, 샤스탕)와 주교(엥베르)가 잇달아 들어올 수 있도록 북경을 오가며 큰 역할을 하였다.


- 聖 정하상(바오로)의 모친 聖 유소사(세실리아)는 기도생활과 성사와 대재를 지키며 애인(愛人)하는 마음이 유난하여 가난한 사람을 만나면 애긍시사를 희생으로 하고 열심히 미사에 참례 하였다.


- 聖 정정혜(엘리사벳)은 여신도회장을 하면서 앵베르 주교님 아래서 신자들 교리지도에 충실하였고 동정을 지켰으며 옥중에서도 고문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신앙을 증거 하였다.


- 이렇게 하여 정씨가문에서는 위대한 성인이 세 분 나오셨고, 1925년 7월 5일 로마 성 베드로 성당에서 교황 성 비오10세에 의해 복자위에 오르셨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위해 방한 중이신 교황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 되었다.


■ 조선 천주교 초기에 파리외방전교회가 미친 영향


 ● 조선교회의 대리감목구

- 모진 박해의 위험 속에서도 새로운 성직자를 영입하기 위한 초대교회의 노력은 우리들이 꼭 기억해 둬야할 부분이다. 聖정하상(바오로)는 여러 차례 북경을 드나들면서 북경 주교에게 신부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고, 


- 1825년에는 유진길(아오스딩)과 함께 조선교회에 성직자를 보내 줄 것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교황에게 보내기도 했다. 초대 교회 교우들의 이 같은 노력은 마침내 결실을 맺어 1831년 9월9일 조선교회는 조선대리감목구로 공식 설정됐다.


-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소칙서를 통해 조선교회를 중국 북경교구로부터 독립시켜 조선대목구로 설정하는 한편, 동시에 파리외방전교회 브뤼기에르 주교를 초대 조선대목구장 주교에 임명했다.


- 조선천주교회는 1784년 이벽의 집에서 최초로 수표교 공동체가 창립된 지 48년 만에 조선 교구가 중국 북경교구의 관할에서 벗어나 독립하게 됐고, 아울러 사도로부터 내려오는 사도전승의 로마 가톨릭 교회와 온전하게 결합돼 “보편교회”에 참여하고 교류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됐다.


- 조선교구 초대주교로 임명받은 브뤼기에르 주교는 일 년 뒤인 1832년에

조선을 향해 가다가 1835년 10월 갖은 고초 끝에 마침내 만주 땅에 도착했지만 뜻하지 않은 뇌일혈로 조선 땅을 눈앞에 둔 채 선종한다.


- 한편,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선교소식이 전해지자 중국의 유방제 신부를 비롯해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모방신부와 샤스탕 신부 등이 조선 파견을 지원했고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을 향해 여행 중이던 1834년 유방제 신부가 먼저 조선에 들어온 데 이어 1836년에는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모방신부가, 그리고 그 이듬해에는 샤스탕 신부가 조선에 입국했다.



※ 아래의 기사는 평화신문 06년 9월 3일 “순교자성월” 기획특집 기사내용을 발췌하였습니다.


● 선교사들 조선 입국 거점 활용(06. 9월3일자)

- 고구려의 옛 영토 중국 만주 지역은 1831년 조선교구가 설정되면서 한국천주교회사에 중요한 선교 거점으로 등장하게 된다.


- 특히 1838년 요동대목구가 설립되고 다시 만주와 몽고 지역이 분리돼 1840년 만주대목구가 설정되면서 중국 동북 삼성지역은 조선교회의 일부가 된다.


- 조선교구는 요동성 지역의 사목권을 위임받아 짧게는 1881년까지 넓게는 1946년 중국에 교계제도가 설정될 때까지 이 지역에 관할권을 행사했다.

 

- “만일 요동 지방을 북경교구로부터 분리, 독립시킬 수 있다면 조선에서 박해가 일어났을 때 선교사들이 잠시 피신할 수도 있을 것이며, 이곳에 조선인 사제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세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요동을 북경교구로부터 분할하는 것은 오직 조선대목구에만 유익한 것이 아닙니다."(제1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가 교황청 포교성성에 보낸 1835년 8월7일자 서한 중에서)


- 처음 '요동대목구'로 불렸던 '만주대목구'는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선교 정책의 하나로 1838년 4월 설정됐다. 만주대목구 관할지역은 중국 동북부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등 동삼성(東三省) 전 지역이었다.


- 만주대목구 설정은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로부터 1831년 9월 조선대목구 설정과 함께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브뤼기에르 주교가 제안했다. 그 이유는 조선대목구 설정 이전에 조선의 신자 공동체에 자치권을 갖고 있던 중국 남경·북경교구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조선교회 분리를 노골적으로 방해했기 때문이다.


-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브뤼기에르 주교 건의를 받아들여 1838년 요동대목구를 설정, 사목권을 파리외방전교회에 위임하고 초대 대목구장에 베롤 주교를 임명했다. 만주와 몽고 지역을 관할한 요동대목구는 1840년 '몽고대목구'와 '만주대목구'로 분리됐다.


- 조선대목구 설정 이전부터 만주 동삼성 특히 요녕성은 유난히 조선교회와 관련한 사적지가 많았다. 박해시기 윤유일(바오로)·정하상(바오로) 등 조선교회 밀사들이 북경을 오가면서 거쳐야만 했던 압록강 북안의 단동(옛 안동), 책문이 있던 봉성(옛 봉황성), 요녕성의 수도 심양(옛 봉천) 등이 있기 때문이다.


- 또 소팔가자, 양관·차쿠, 백가점 등 요동반도 일대는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거점이었다.

 

- 요녕성 특히 개주시 양관과 차쿠는 1842년부터 1881년까지 조선교회와 밀접히 관련돼 있던 지역이다. 이 지역은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 주교와 최양업 신부의 사목지였다.


- 그뿐 아니라 1869년부터 1881년까지 12년간 조선대목구 대표부가 설치돼 있던 곳으로, 조선 선교사들에게 사목 재치권이 위임돼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거점으로 활용됐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만주대목구가 설정되기 이전부터 만주지역에 신학교를 설립해 조선인 사제를 양성해 나가는 것을 구상했다.


- "앵베르 주교가 만주에 집 하나를 가지게 해달라고 파리에 신청한 것을 곧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허락은 우리에게도 매우 바람직스러워 보이는, 즉 앵베르 주교가 그곳에 신학교를 세우려 한다면 더욱 필요해질 것입니다." (모방 신부, 1837년 서한 중)


- 이 소망은 병인박해 당시 리델 주교가 1872년 차쿠에서 신학교를 운영하면서 부분적이나마 성사된다. 이 신학교에서 중국인 배 야고보와 민 다미아노가 사제품을 받았고, 한국인 요셉과 도미니코도 신학공부를 한 후 1876년 귀국했다.


- 만주대목구 주교좌성당이 있던 양관은 만주 남부의 선교 중심지였다. 1843년 12월31일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 성성식이 이곳 양관 주교좌성당에서 거행됐다. 또 최양업과 김대건 신학생이 조선 입국로를 개척하기 위해 만주를 여행할 때 자주 양관에 거처했다.


- 만주대목구에는 초기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가 마카오에서 1842년 최양업 신학생과 함께 요동까지 동행하며 그에게 신학을 가르쳤던 브뤼니에르 신부를 비롯해 후에 조선교구장이 된 베르뇌 주교 등 10명이었다. 이들의 선교로 1862년에는 신자가 6000여명으로 증가했다.


- 장하에서 북쪽으로 약 70리 지점에 위치한 '차쿠'역시 요동의 중요한 사목거점이었다. 조선 입국을 준비하면서 1848년까지 양관에서 사목하던 베르뇌 주교는 1849년 말 차쿠로 옮겨 이 지역을 선교했다.


- 지리적으로 요동 지역에서 조선과 가장 가까웠던 차쿠는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1867년 조선에서 피신한 제6대 조선대목구장 리델 주교와 칼레 신부, 조선 선교를 위해 파견된 리샤르, 마르티노, 제7대 조선대목구장 블랑 주교의 거주지가 됐다.


- 리델 주교는 1869년 1월말 차쿠성당을 조선 입국의 거점으로 삼기 위해 만주대목구장 베롤 주교와 협의, 사목 관할권을 부여받았다.


- 만주 요동 땅 일부가 조선 선교사들에게 위임된 것은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만주대목구 관할권 일부가 조선대목구로 이관된 것이기 때문이다.


- 조선 선교사들은 1881년 조선대표부를 일본 나가사키로 이전하기 전까지 만주 지역에서 사목권과 재산권을 행사하면서 자유롭게 선교활동을 펼쳤다. 조선 선교사들의 요동 지역 관할권은 조선대표부가 나가사키로 이전하면서 소멸됐다.

 

- 만주대목구의 선교 중심지였던 양관과 차쿠는 최양업 신부의 첫 사목지이기도 했다. 1849년 4월15일 중국 상해 예수회 서가회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은 최양업 신부는 그 해 5월부터 12월 조선으로 귀국하기 전까지 양관·차쿠에서 7개월간 베르뇌 주교(당시 신부)의 보좌신부로 사목활동을 했다.


- "7개월 동안 요동에 머물면서 병자들을 방문하고, 신자들에게 주일과 축일에는 짧은 강론을 하며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큰 축일에는 고해성사를 주며 성체를 배령하게 해주는 일에 정성을 다 바쳤습니다. 페레올 주교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저는 12월에 변문으로 해서 조선에 들어갈 준비를 하였습니다." (최양업 신부 1859년 10월1일 편지 중에서)


 

- 만주대목구는 1898년 길림을 중심으로 한 '북만주대목구'와 심양(봉천)을 중심으로 한 '남만주대목구'로 양분됐다. 1924년 남만주대목구는 '봉천대목구'로, 북만주대목구는 '길림대목구'로 개칭됐다.


- 이후 두 대목구는 계속 새로운 교구를 분리, 독립시켜 1928년 '연길지목구'가 조선교회 원산대목구 상트 오틸리엔 베네딕도회에, 1932년 '무순지목구'가 메리놀외방전교회에 위임됐다.


- 특히 심양관구에 속했던 연길지목구 복음화는 조선인에 의해 씨앗이 뿌려져 한국교회와 각별한 인연을 맺고 있다. 1896년 5월 간도 호천포에 살던 김영렬(세례자 요한)이 함경도 원산본당에서 베름렐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간도 교회의 첫 신자가 됐다. 김영렬은 1897년 봄 최규여(그레고리오)·유패용(라우렌시오) 등 176명에게 교리를 가르쳐 세례를 받게해 간도 지역 복음화의 기초를 놓았다.


- 이후 1902년 대한제국이 간도에 시찰원을 파견하는 등, 간도 영유권에 관심을 보이자 제8대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는 1907년 '간도에 정착한 한국인들을 위해 조선교구 성직자가 필요하다며 북만주교구 선교사가 파견될 때까지'라는 조건으로 북만주교구 랄루이에 주교로부터 '간도지역 사목권'을 위임받았다.


- 뮈텔 주교는 사목권을 위임받자 최문신·조양하 신부 등 한국인 신부와 라리보·퀴를리에 신부 등을 파견, 용정·팔도구·연길·훈춘 등지에 본당을 설립했다.


- 1920년 8월 원산대목구가 설정되자 북만주교구에 속했던 연길과 의란 지역은 원산대목구 관할로 편입됐다.


- 원산대목구장 사우어 주교는 용정, 연길, 팔도구, 삼원봉 등에 성당과 함께 교육시설을 설립, 한반도에서 이주한 한국인 신자공동체 자립에 힘썼다.


- 원산대목구의 이러한 노력으로 1928년 연길지구목가 설정됐고, 해방 직전인 1944년에는 19개 본당 신자 1만8000여명으로 성장했다.


★★★ 위의 내용은 배봉균(요아킴)형제님의 자료와 평화신문, 그리고 제가 알고 있는 자료를 근거로 작성한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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