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랜 전, 이천 년 전의 일입니다. 로마의 식민지였던 변방의 예루살렘과 6Km정도 떨어져 있는 세포리스라는 마을에서 반란이 일어났다고 해서 그 도시의 모든 장정들이 끌려가서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그 수가 무려 이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 십자가 처형은 페르샤 사람들이 최초로 사용했는데, 본래 저항하는 외국인들의 처형방식이었습니다.
로마 시대에는 십자가형이 노예나 외국인, 또는 반란을 일으킨 자 등에 대한 처형방식이었는데, 로마의 십자가형은 탈주, 비밀 폭로, 내란선동, 살인, 반역 등의 중죄에만 적용되었습니다. 십자가형이 정치범을 다스리는 형이 되자 십자가형은 로마변방의 속주들에서 가장 널리 행해졌고, “로마의 평화”를 유지하는 이상적인 수단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었는데, 그 중에 한 명이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단순한 처형이나 순교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머리 흔들기”(브레인 스토밍)를 해 볼까요? 예수의 죽음을 여러분은 교회에서 뭐라고 배웠습니까? - 대속, 속량(속전), 희생이라고 하죠. 그리고 그러한 예수를 희생제물, 화목제물, 속죄제물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 이러한 전통적이고 일반적인 내용과 교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예수의 제자들과 사도 바울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선포라고 하는 것은 ‘케리그마’라고 하는데, 사도적 교회의 중요한 기능 중에 하나입니다. 그리고 그 선포의 중심에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있습니다.
실제로 신약성서에는 복음서 외에는 예수의 삶에 대한 일화가 전혀 소개되고 있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에 의해 선포된 내용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이후의 교회에서 형성된 교리에는 예수의 삶이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전통적인 교회에서 예수의 삶을 거론하는 것은 그 교리를 증명하거나 증거하기 위한 보조 자료로 사용될 뿐입니다.
이러한 현실을 비판한 것이 한완상 교수가 새길교회 창립 17주년 기념예배에서 행한 설교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는 “예수 없는 기독교 : 동정녀와 빌라도 사이의 공백”(마태 6:25-32; 누가 7:18-22)이라는 제목으로 기독교에서 가장 보편적인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는 사도신조의 내용에서 예수의 삶이 빠져 있는 것과 그것을 그대로 현실로 옮겨 놓은 교회의 모습을 비판하였습니다. 케리그마라는 테두리에서 이처럼 예수의 삶이 생략되어 선포되는 것은 신약성서의 반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더이상 성전을 필요로하지 않는다
초대교회의 선포(케리그마)의 원형은 대개 오늘 본문에 있는 내용입니다. “예수는 우리의 죄를 위해 죽었다.” “예수는 우리의 죄를 위한 희생제물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케리그마는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의하여 조명되어야 하고, 그 케리그마가 1세기의 초대교회의 상황에서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야 그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당시에 성전과 제장들이 차지했던 유대사회의 지배력을 생각해 봅시다. 성전은 죄에 대한 용서를 독점하는 기관이었습니다. 성전과 제사장은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을 독점하는 체제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는 우리의 죄를 위한 희생제물이다.”라는 선언은 성전의 독점, 즉 죄에 대한 용서와 하느님께 나아감에 대한 성전의 독점을 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던 성전무효화 선언(마가 11:16-17)과 맥을 같이 합니다.
결국 “예수는 우리의 죄를 위한 희생제물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는 성전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는 성전과 제사장들 없이도 죄를 용서받을 수 있고,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예수는 우리의 죄를 위해 죽었다.”라는 선언은 하느님의 철저한 은총은 우리가 아무런 조건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가 우리의 죄를 대신하기 위하여 ‘한번에 다’(유일회적으로; 히브 7:27; 9:12; 10:10) 바쳐진 희생제물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분리된 이유에 대해 우리가 생각하는 것들이 무엇이든 간에 하느님이 이미 처분하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죄인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도록 강요당하는 사람들에게 이제야 인간으로 당당하게 살 수 있는 희망을 주는 선언입니다.
“예수는 우리의 죄를 위해 죽었다.”는 선언은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께 나가기 위한 조건을 철저하게 규정한 율법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율법에 의한 지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율법을 마커스 보그는 “필요조건 체제”라고 말합니다. 즉 바리새파 사람들에 의해 외형적으로 확대되고 형식적으로 굳어진 율법은 하느님께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일정한 필요조건이 있고, 그 필요조건을 채우지 못하면 받아들여지지 못하게 하는 체제라는 것입니다.
예수 삶이 빠진 신앙고백은 '성서의 왜곡'
교회의 선포(케리그마)에 대하여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예수의 삶과 가르침의 내용과 일치합니다. 예수는 그의 치유 활동과 가르침에서 관습이나 전통, 그리고 종교적 기관(성전)과는 별도로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면 왜 초대 교회의 선포(케리그마)에서 예수의 삶이 빠져 있을까요? 그 대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상황에서 예수의 삶을 직접 보거나 소문을 들어서 다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똑같은 것을 되풀이해서 설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이나 바울이 활동하고 글을 남길 때에는 예수가 죽은 후 한 세대가 지나기 전입니다. 예수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는 우리의 죄를 위해 죽었다.” “예수는 우리의 죄를 위한 희생제물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의 삶이 빠진 신앙고백이나 선포는 성서를 왜곡하는 것이고, 결정적으로 예수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에 우리 자신과 하느님과의 관계는 극적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진정으로 자유인으로, 자유롭게 살게 될 것입니다.
나를 위해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
지금 우리는 처음 신앙인들이 고백하고 선포했던 중요한 내용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우리의 죄를 위해 죽었다.” “예수는 우리의 죄를 위한 희생제물이다.” 이 내용을 한 마디로 말하면 “대속”입니다. 그러면 오늘 그 대속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천 년 전에 이스라엘 땅에서 죽은 예수가 오늘 여기에서 살고 있는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그 의미와 관계는 누군가가 나를 위해 죽었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밝혀질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 죽었다.” 그 누군가는 내 생명의 은인입니다. 그는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생명을 대신해서, 우리의 생명을 위해서 죽은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여기에 있을 수 있는 것, 우리가 숨쉬며 먹고 마시는 것은 어떤 생명의 죽음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종이 한 장에서 우주의 숨소리를 듣는 사람은 지금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모든 활동이 우리 시대뿐만이 아니라 우리 이전과 우리 이후의 생명이 우리를 위해 대속한 결과임을 알 것입니다. 더 적극적으로 말한다면,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알든지 모르든지 누군가가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천 년 전에 예수가 우리의 죄를 위해 죽었다는 그 선언으로 죄로부터 자유로워지고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우리가 대속의 의미를 오늘에 되살리는 것은 모든 생명들이 우리를 위해 존재하고 또한 희생한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서 시작합니다. 사도 바울의 말을 빌자면 ‘빚’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 사람에게나 미개한 사람에게나, 지혜가 있는 사람에게나 어리석은 사람에게나, 다 빚을 진 사람입니다.”(로마 1:14)
모든 생명에게 빚 진 자로 사는 것, 특히 억울한 죽음을 당한 사람들에게 빚 진 자로 사는 것은 예수의 대속을 우리 삶에서 현재화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나를 위해 죽었고 그 은혜에 감사하며 사는 길은 그 예수를 따라 사는 것이며, 지금도 나를 위해 죽어가는 수많은 생명을 대신해서 다른 생명을 섬기는 것입니다.
“무임승차 이론”이 있습니다. 버스가 노선대로 움직이는데, 내가 타지 않아도 어차피 그 길을 따라 운행해야 하는데, 나 하나쯤이야 그냥 타고 가도 되지 않느냐 하는 것이죠. 무임승차 이론은 사회현상이나 경제 현상을 설명하는데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무임승차’란 아무런 노력도 없이 다른 사람의 노력과 노동의 결과를 빼앗아 자기만 누리려고 하거나, 살짝 끼어들어 그 결과를 함께 누리려고 하는 행위입니다. 예수의 대속, 수많은 생명들의 희생으로 살고 있는 우리가 다른 사람과 생명들에게 의미 있는 삶을 살지 않는 것은 무임승차 행위입니다.
교회, 죽음에 빚 진 자로 살아야
그러면 오늘 우리가 선포해야 할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초대교회의 선포(케리그마)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집중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대신한 것이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신 예수의 은혜에 감사해서 그의 길을 따라 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필요조건 체제”를 만들어 다른 생명에게 그것을 강요하는 일이 다방면에서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에 반대하면, 수많은 생명을 억울한 죽음으로 몰아넣습니다.
억울한 죽음에 빚 진 자로 사는 것은 초대교회의 선포를 오늘에 되살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죽음에 저항하고 생명을 살리는 길을 찾아 행동하는 것이 교회 공동체의 케리그마입니다.